천산채(天山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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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陝西)에서는 탈 없이 여정을 지속했으나, 문제는 섬서(陝西)를 벗어나 감숙(甘肅)으로 넘어오고 나서 발생했다. 천수에 거의 다 와서 생긴 일이었다.
“무림의 영웅들은 발걸음을 멈추시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언덕 너머에서 들려왔고, 홍 표두는 손을 들어 표행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언덕 너머를 향해 소리쳤다.
“산 중 호걸께서 이리 정중히 대해주시니 우리 또한 예의를 다할 것이오.”
홍 표두의 말에 병장기를 든 산적패가 언덕 너머에서 우수수 모습을 드러냈다.
산적패의 두목으로 보이는 이가 거도(巨刀)를 들고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
거도를 들고 내려오던 그는 홍진을 알아보고 말했다.
“진가표국의 귀창(鬼槍)이 아니시오.”
“눈이 어두워 호걸을 알아보지 못하는 홍 모를 용서하시오.”
“본인은 천산채(天山埰)의 장굉이라 하외다.”
장굉은 홍진 앞에서 주눅들지 않았고, 주변의 산적들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했다.
‘녀석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구나.’
“천산채의 호걸들께서 우리의 예가 마음에 들기를 바라외다.”
홍진은 미리 준비한 주머니 하나를 산적의 발치에 던졌다.
산채와 표국은 공생관계라고 봐야 했다. 중원에 산적들이 횡행하기에 아무나 산을 넘지 못하고 표국에 의뢰를 맡기는 것이다.
장굉은 거도로 주머니 끝을 걸어 들어올렸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고 살풋 얼굴을 찡그렸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에 쉽지 않은 예라오.”
“······.”
주머니 안의 은자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었다.
홍진은 더 많은 은자를 바라는 상대가 불만이었으나, 뒤를 따르는 진가장의 직계까지 생각해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 하나를 더 던졌다.
“중요한 분이 함께하고 있어 호걸들의 호의를 바랄 뿐이오.”
“······.”
장굉은 중요한 분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며 주머니를 다시 확인했다.
‘귀창(鬼槍) 홍진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대체 누구지?’
그리고 표행을 살피며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를 찾았고, 이제 막 뒤에 도착하는 호충과 나귀 수레를 볼 수 있었다.
“저 분이 중요한 분이오?”
“그렇소.”
“저 분의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겠소?”
“······.”
홍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진가장의 직계라는 것을 알면 더욱 몸을 사릴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진가장의 직계이신 진호충 공자이시오.”
“아.”
공자라 했으니 수레를 끌고 오는 젊은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수레에는 작은 천막이 있었기에 그 위에 더 중요한 인물이 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착각일 뿐이었다.
‘무공을 익힌 진가장의 직계가 수레를 끌어야 하는 인물이라면···.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다.’
“홍 표두의 깊은 예의에 만족하외다.”
“호걸들의 아량에 이 홍 모가 감읍하외다.”
그렇게 산적들은 길을 텄고, 표행을 뒤따르는 호충도 그를 볼 수 있었다.
‘녀석의 내공은 일류초반. 홍진 표두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테지만, 함부로 대적하면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상하겠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표국의 인물을 하나라도 잃으면 그것으로 표행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 지나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걸렸다는데 있었다. 호충은 나귀를 이끄는 손잡이를 놓고 잠시 장굉이라는 산적 두목의 앞으로 갔다.
“나는 이들과 일행이지만, 예를 보이지 않았구려.”
“···지나가시오. 이미 앞에서 예를 다하였소.”
괜히 진가장의 직계를 건드렸다간 토벌대를 불러올 수도 있음이다. 천막 안의 인물도 걱정이었다.
“저런···. 나 또한 예의를 보여주고 싶었거늘. 대신 내 작은 재주라도 보여드리리다.”
“그러실 것까지는···.”
홍진 표두가 뒤에서 지체하는 호충을 보고 달려오기도 전에 호충의 품에서 유엽비도(柳葉飛刀)가 날았다. 본래 비도는 호충이 가장 자신있는 부분이었다.
파바박.
장굉의 곁에 있던 나무에 유엽비도(柳葉飛刀) 세 자루가 나란히 박혀 있었다.
“어떻소. 내가 가진 재주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라오.”
장굉은 비도가 뽑히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자신을 지나쳐 나무에 박혀 있었다.
“자, 잘 봤소.”
“다음엔 표행과 함께하지 않을 터이니 진심을 다한 예를 보여주겠소.”
작은 위협이었지만, 충분히 식은땀이 날 정도의 무공 수준이었다.
‘진가장의 직계는 생각보다 더 고수였어.’
“······.”
홍진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나섰다.
“공자님. 호걸들이 공자님의 재주를 충분히 느꼈을 줄로 압니다.”
“나중엔 나를 못 알아볼까 하여 그랬습니다.”
“호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오니 그만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표두님.”
장굉은 자신을 지나쳐 유엽비도(柳葉飛刀)를 회수하는 호충을 단단히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비도를 회수해 돌아가는 호충의 발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
장굉은 호충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크게 놀라는 중이다.
‘눈에 남은 발자국이···.’
눈에 남은 옅은 발자국은 상대가 몸을 가벼이 할 정도의 고수라는 것을 알게 했다. 비도를 날린 재주가 가장 보잘 것 없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일류의 끝자락. 저 정도 고수에게 걸렸다간 토벌대가 오지 않아도 천산채(天山埰)는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오늘 천산채(天山埰)의 행사는 실로 인상 깊었습니다. 내 꼭 기억하겠소.”
호충의 유형화한 살기(殺氣)가 장굉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고, 장굉은 절로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사, 살기의 유형화라니···. 대체 진가장의 저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호충의 살기가 뿌려지고 있었지만, 홍진은 이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호충을 재촉했다.
“사 공자님. 이제 그만 가시지요.”
‘사 공자? 그렇다면 막내란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직계 공자의 무위는 얼마나 더 대단하단 말인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호충은 홍진의 말에 다시 나귀의 끈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갑시다. 흥이 식었소.”
“···진 공자의 존성대명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장굉의 말에 호충은 슬쩍 곁눈질로 다시 장굉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목숨이 달린 일이다. 혹여 천산채(天山埰)의 산적 녀석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둘 참이었다. 또한 자신도 진가장 직계에게 잘 보여 나쁠 것이 없었다.
“진 공자의 높은 무위를 견식하게 해주셨으니, 저희도 예를 보이겠습니다.”
장굉은 홍진에게 받았던 주머니 중에 하나를 도로 앞에 던졌다.
“허어. 장 채주께서 저희 공자님의 체면을 세워주십니다 그려.”
“앞으로도 진가장의 표행이 천산을 넘을 때 불편함은 없을 것이외다.”
산적과 표국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러했다.
‘다음엔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진가장.’
‘공자님이 없었다면, 오랜만에 내 창이 피 맛을 보았을 것인데···.’
‘홍진이 없었다면 네 놈을 잡아 죽였을 것이다.’
산적들이 사라지고 홍진 표두가 뒤를 따르는 호충에게 다가왔다.
“공자님.”
“홍 표두님. 보통 산적들과 이렇게 협상하는 일이 잦습니까?”
“매번 분쟁을 통해 해결할 수는 없지요. 그랬다간 중원의 모든 산채가 진가표국을 적대할 것이옵니다.”
“어쩔 수 없음은 알지만, 씁쓸한 일입니다. 녀석들이 중원의 땅을 제 땅인 양 통행세를 거두는데 그대로 따라야 한다니 말입니다.”
“언제 비도술을 배우셨습니까. 공자님이 비도술을 연마했다는 말을 듣지 못해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서책만 보느라 많은 것을 익히지는 못 했습니다. 발이 느려 비도술이 알맞겠다 싶어 비도술만 무작정 익혔지요.”
“···그래도 함부로 나서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겨우 비도술 하나만 믿고 나선 것을 꼬집는 것이다. 젊은 치기로 나섰을 테지만, 여차하면 산적들과 전면전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은 당연지사다.
“나 때문에 표두가 더 많은 통행세를 내는 것 같아 나섰습니다.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하하. 그래도 공자님 덕분에 은자를 돌려받았으니 됐습니다.”
“곧 도착할 천수(天水)에서 저는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십니까? 저희는 감숙(甘肅)의 중심인 난주(闌州)까지 가는 여정이옵니다.”
“저는 천수(天水)에서 서화(西和)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사실은 북쪽 방향인 평량(平涼)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일부러 반대로 얘기했다.
“혹여 돌아오는 길에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천운이 닿는다면 그리 되겠지요.”
며칠이 흐르고 감숙(甘肅)의 천수(天水)에 이르러서야 진가표국의 일행과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무운(武運)을 비옵니다. 공자님.”
“남은 표행이 수월하길 바랍니다. 그간 배려에 고맙습니다. 홍 표두님.”
천수(天水)에서 표행과 작별한 호충은 나귀를 끌고 식사와 잠자리를 할 수 있는 객잔을 골랐고, 수레에서 내리는 송 영감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여기서 송 영감은 내 할아비가 되는 거야.”
“예?”
앞으로 진가장의 진호충은 없었다. 그저 겨울에 감숙(甘肅)을 여행하는 노소(老少)로 위장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표행과 함께했으니 감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무림이야. 진가장의 직계라는 사실을 알려봤자 도움이 되지 않아.”
“맞는 말씀이긴 하오나···.”
호충의 할아버지 노릇을 하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잖아. 그저 송 영감은 내 할아버지 역할만 잘 해줘. 이제부터 난 송호충이야.”
“···예.”
“그럼···. 우리 들어가요 할아버지.”
“허허.”
“어서옵셔!”
“뜨끈한 소면 둘과 만두 한 접시를 부탁하네.”
“곧 올리겠습니다요.”
점소이를 보내고 적당한 자리에 앉으면서도 호충은 송 영감이 앉을 자리를 먼저 마련해줬다.
송 영감은 잠시 혼란해 보였지만, 곧 호충의 인도에 따라 자리에 앉으며 호충의 할아버지 노릇에 충실했다.
“혹시 할아버지가 드시고 싶은 요리가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바로 시킬게요.”
“···어. 음.”
손자라 생각하고 말해야 했기에 송 영감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평생 도련님이라 부르는 말이 입에 붙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송 영감이 어려워하자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편히 하면 좋겠는데요···.”
그런다고 쉬이 적응할 순 없었지만, 송 영감은 걱정되는 일을 생각해 냈다.
“우리가 가진 돈이 많지 않으니 아껴야 하지 않을지···.”
“그도 그렇네요. 식사는 간단히 하고 할아버지와 시전 구경이나 하죠 뭐.”
사실 가져온 돈은 충분하지만, 이렇게 사람 많은 객잔에서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자살행위였기에 말을 아낀 것이다.
곧 어린 점소이가 소면과 만두를 들고 와서 탁자에 올려놨고, 호충은 송 영감에게 먼저 권했다.
“할아버지 먼저 드세요.”
“······.”
먼저 젓가락을 드는 것도 어색한 송 영감이었다.
“어서요.”
“그래···. 너도 어서 들어라.”
“예. 할아버지.”
어색한 시작과 달리 둘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말없이 식사에 전념했다.
뜨끈한 국물은 속으로 들어가 몸을 덥혔고, 고기로 채워진 만두에선 기름진 육수가 터져 나왔다.
“크아. 여기 만두가 정말 괜찮은데요?”
“소면도 괜찮습···. 괜찮구나.”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여기 오래 머물러도 되겠어요.”
“우리가 여행을 떠난 참인데 오래 머물기는···.”
“객찬의 별채를 잡아서 장기로 머물러야겠어요.”
“?”
송 영감은 호충의 의중을 몰랐기에 의문어린 표정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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