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天水)
***
“객찬의 별채를 잡아서 장기로 머물러야겠어요.”
“?”
송 영감은 호충의 의중을 몰랐기에 의문어린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어이. 점소이.”
“예이.”
호충이 손을 들고 부르자 점소이가 후다닥 달려왔다.
“들어오다 보니 별채가 있던데, 장기 숙박이 가능한가?”
“예. 물론입죠.”
“달포이상 머물고자 하네. 두 달 치를 선불할 터이니 방을 내어주게.”
“어이쿠. 예. 공자님.”
점소이가 사라지자 송 영감이 고개를 가까이하고 물었다.
“두 달이나 머무신다고요?”
“들어가서 말씀 드릴게요.”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점소이의 안내에 따라 별채로 들어섰다. 물론 숙박비도 먼저 치른 다음이었다.
“언제든 저를 찾아주십시오. 공자님.”
녀석은 호충에게 구리 동전 몇 개를 받은 다음이라 허리가 더욱 수그리고 있었다.
짐을 갖고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 송 영감이 호충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 계속 머무시려고요? 여행은 어쩌시고요.”
“가긴 갈 거야. 하지만 나 혼자 가야 해서 그래.”
“!”
“송 영감은 여기서 기다려.”
“도련님!”
“혼자 가야만 하는 일이 있어.”
“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도련님과 함께할 겁니다.”
“에효.”
호충의 계획 중에 가장 큰 난관이 바로 이것이었다. 송 영감과 밖에 나온 다음 다시 송 영감을 떼어 놓는 일이다.
“노구의 몸이긴 하오니 아직 팔팔하옵니다. 도련님의 걸음을 따를 수 있으니 혼자 갈 생각일랑 마십시오.”
“영감.”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쩐 답니까. 도련님이 어렸을 때도 제가 없는 사이에 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
호충이 되묻자 송 영감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이 부인했다.
“아, 아니옵니다.”
“······.”
호충은 자신의 기억을 뒤져 송 영감이 없을 때 벌어진 큰일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뭐지?’
지금까지 과거의 기억이 온전하다 여겼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혹시 내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도련님. 괜히 기억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제 겨우 이겨내셨는데···.”
‘뭔가 있었네.’
호충의 송 영감의 말을 들으며 양의(兩意)를 끌어올렸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라?’
양의(兩意)를 통해 내면을 관조하자 자신의 기억 속에 안개처럼 흐릿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드러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뿌옇게 감춰져 있었다.
호충은 양의(兩意)의 힘을 집중해 감춰진 기억을 더욱 힘차게 두드렸다.
양의(兩意)는 흐릿한 기억을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억의 균열 속에 보인 것은 붉은 피였다.
‘피?’
호충은 녀석이 왜 피에 강박적인 증세를 보였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녀석은 누군가를 피를 보고 이후 피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야.’
아직까지 그 이상을 알 수 없었지만, 송 영감이 없는 중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영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 이제 다 컸어.”
“도련님. 그래도 혼자서 밖으로 나가시는 것은 안 됩니다.”
“바로 떠나진 않을 거야. 이쪽 근방이 안전한지 살펴보고 안심이 되면 그때 갈게.”
“······도련님.”
송 영감은 언제까지고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 여겼던 호충이 이젠 자신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 수레에 천막까지 설치했고, 천수(天水)까지 오는 길에 단 한번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마치 상전이라도 되는 양 여기까지 편히 오지 않았던가.
‘이 고집을 어찌 한단 말인가.’
최근의 일들로 호충의 고집이 보통이 아님을 알게 된 송 영감이다. 이번에도 호충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래 걸리시옵니까?”
“아마도.”
“여기서 멀리까지 가시옵니까?”
“그건 아냐. 홍 표두에겐 서화(西和)로 간다고 했지만, 사실 평량(平涼)으로 갈 생각이야.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내 목적지가 있어.”
진짜 목적지는 평량(平涼)을 지나 그 위의 녕하에 있었지만,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유는 말씀할 수 없으시고요?”
“난 영감을 믿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하잖아.”
“정녕 혼자 가셔야겠습니까?”
“안전하게 다녀온다고 약조할게. 봄이 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간다는 여정은 계획과 같아.”
“하아. 도련님.”
송 영감의 한숨에 허락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있는 호충이다.
“내 강짜를 이해해줘서 고마워. 영감.”
“피가 마르는 시간일 것이옵니다.”
“···매일 나를 위해 고생했으니 휴가라고 생각해줘. 언제 이렇게 영감이 쉬어보겠어.”
“날마다 도련님이 돌아오실 날을 기다려야겠지요.”
“에헤이. 여기서 고운 할매도 찾아보고 그래야지.”
“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헤헤. 농인데 너무 놀라네?”
“도련님!”
“영감은 여기서 돈이나 펑펑 쓰면서 놀고 있어.”
“저는 객잔에서 주는 밥이나 먹으며 기다릴 것이옵니다.”
“그러면 휴가의 의미가 없잖아. 여기 총관에게 여비를 많이 받아뒀으니 다 영감 가져.”
출발하기 전 총관에게 받아온 주머니를 모두 영감에게 건넸다.
“도, 도련님. 제게 여비를 다 주시면 어쩌시려고요!”
“난 따로 주머니를 챙겼어.”
쩔렁.
호충은 다른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애초에 총관에게 여비를 받아올 필요도 없었지만, 여행을 간다며 빈손으로 가는 것은 의심할 일이라 생각해 일부러 여비를 요구했었다.
“나 이제 돈 많아.”
“허허. 어디서 그런 돈이···.”
“이것도 비밀.”
호충이 자장(子張)의 뒷골목을 접수한 것도 아직 송 영감이 모르는 일이었다.
“도련님은 갈수록 비밀이 많아지시옵니다.”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내가 영감하고 잘 살려고 그러는 거야.”
객잔에 짐을 푼 호충과 시전을 나선 송 영감은 호충을 위해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
“건량은 조금 더 챙기는 편이 좋겠고···.”
“조금 더 챙기긴 해야지요.”
혼자 길을 떠난다니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발이 시릴 수 있으니 양모가 있는 가죽신이 좋겠고···.”
“그래도 두 개까지는 필요 없을 것···.”
찌릿.
송 영감의 눈빛에 호충은 거절할 수 없었다.
“두, 두 개를 가져가면 비상시에 쓸 수도 있는 거지. 암.”
호충은 같은 상회에서 밧줄을 찾아냈다. 본래 호충이 사려던 물건이다.
“주인장. 이건 길이가 몇 장이나 하오.”
“그거 한 묶음에 오십 장은 너끈합니다. 줄이 튼튼해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절벽 꼭대기에서 삼십 장 밑에 숨겨진 비고(祕庫)로 들어가려면 밧줄이 필수지.’
호충은 줄을 잡아당기며 강도를 확인했다.
팡팡. 뚝.
“······.”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던 줄이 뚝 끊어져 버렸다. 호충은 아연한 얼굴로 주인을 쳐다봤다. 이 줄을 믿고 절벽을 내려갔으면 어쩔 뻔했는가.
“···오래되어 조금 삭았나 봅니다요.”
“조오금?”
자신이 고른 밧줄만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다른 밧줄은 다릅니까?”
“어···.”
대답이 늦었다. 호충이 주인장의 말을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대신 내가 싸게 드릴게. 반값 좋다! 공자 어떻소?”
싸게 준다고 목숨이 걸린 밧줄을 아무거나 살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 다른 곳으로 가요.”
“···그러는 편이 좋겠구나.”
송 영감도 골랐던 가죽신을 내려놨다. 밧줄이 이 모양이라 다른 물건도 믿을 수 없는 탓이다.
호충은 다른 잡화점에서 밧줄을 찾아냈고, 강도까지 다시 확인 다음 값을 치렀다.
“저쪽에서 사지 않길 잘 하셨소. 괜히 엄한 물건을 싸게 사봐야 돈만 버리는 꼴이지요. 이곳이 처음인 떠돌이들은 자주 속는다오.”
“······.”
무림의 인물만 조심할 일이 아니었다. 중원에선 상인들도 조심해야 했다.
“고맙습니다. 물건은 확실한 것 같네요.”
“조손(祖孫)이 꼼꼼하게 물건을 고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허허허.”
호충은 다른 것보다 둘이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인다는 말이 참으로 듣기 좋았다.
“저희 할아버지가 좀 꼼꼼하긴 하시죠. 흐흐.”
“흠흠.”
튼튼한 가죽신을 들고 있는 송 영감은 멋쩍은 듯이 헛기침을 했다. 실질적으로 물건의 품질을 알아본 것은 호충이었고, 자신이 모시는 공자의 할아버지로 보인다는 것도 어색했기 때문이리라.
시전을 돌아보고 객잔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충은 송 영감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버지랑 손자랑 가는데 손도 안 잡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리하시지요.”
서로에게 전해지는 온기가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고 있었다.
***
객잔에서 이틀을 머무르며 준비를 마친 호충은 송 영감에게 재차 당부했다.
“아끼지 말고 팍팍 써. 내가 객잔 주인에게도 일러두었으니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저는 도련님이 몸성히 돌아오시면 충분합니다.”
“내가 가서 마음 편히 움직이려면 영감이 잘 있겠다고 해야지.”
“···저는 여기서 도련님이 오시기만 기다리겠습니다.”
“에효.”
“···저는 따뜻한 방에서 기다리기만 하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매일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쉬면 폭삭 늙는다잖아. 객잔에만 있지 말고 주변 산책도 하고 그래.”
“예. 분부대로 합지요.”
“······.”
호충은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심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하루만 머물고 갈 것을 하루 더 머물렀다. 그럼에도 발을 옮기기가 어렵다.
‘내가 원래 이런 놈이 아닌데···.’
“겨울이니까 옷은 탄탄히 입고 나들이 가야 해. 그리고 상인들이 바가지가 극성이니까 물건 살 때는 특히 조심하고.”
“예, 예.”
“고운 할매 만나도 함부로 따라가지 마. 무림에선 어린 놈, 여자, 그리고 나이든 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잖아. 할매는 여자에다가 나이까지 많으니 당연히 제일 위험하지.”
“어···. 뭐. 그러죠.”
“그리고 시전에서 아는 척하는 놈이 있으면 편히 인사 받아줘. 손자다 생각하면 될 거야.”
“···벌써 친구도 사귀셨습니까?”
“별건 아니고···. 그냥 아는 놈이야.”
사실 어젯밤이 많은 일이 있었다. 송 영감을 혼자 천수(天水)에 두고 가기 내심 마음에 걸렸던 호충이 시전의 뒷골목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괜찮은 놈을 찾았지.’
어젯밤 호충은 천수(天水) 시전에 나가서 도박장을 물어 찾아갔었다.
.
.
.
“젊은 공자님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고. 흐흐흐. 주머니는 두둑하게 챙겨오셨소?”
도박장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놈은 호충을 보고 어리숙한 전주가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호충은 자신을 한껏 깔보는 녀석에게 조용히 말했다.
“가서 도박장 주인 좀 보잔다 해라. 불러와.”
“허허허. 재미있는 공자님이네. 우리 두목이 당신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오?”
“······.”
어차피 말로 해결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