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32)

의형제

***

왕호는 호의를 보였다는 말에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뭔가 달라진 것도 같았다. 맞고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이한 시원함이 있질 않았는가.

“!”

“자리에서 일어나보아라.”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확연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의 내부에서 용틀임하고 있었다.

‘배, 배가···.’

녀석의 배가 꾸르륵 소리를 내다가 무언가를 밖으로 배출했다.

뿌우웅.

갑자기 방귀를 뀌는 바람에 왕호는 얼굴을 붉혔고, 지독한 냄새에 뒤에 있는 녀석들은 코를 붙잡았다.

“격체전공(隔體傳功)으로 나의 내공을 전수했다. 네 몸의 노폐물을 빼내는 과정이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헙!”

사실 호충의 매질은 격체전공이라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중요 혈자리를 자극하는 정도로만 내공을 운용하여 때린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공도 제대로 연마한 적이 없는 녀석들이 그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마침 왕호가 뀐 방귀로 앞뒤를 끼워 맞춘 것이다.

호충은 왕호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며 밥이 다 되었음을 알았다. 낚시의 마지막인 챔 질을 할 때였다.

“왕호. 나는 너와 같은 기재(奇才)를 잃고 싶지 않다. 나의 동생이 되어주겠느냐?”

“동생!”

부하가 아닌 동생이란다. 의형제가 되자는 말이었다.

“내가 부끄러워 형으로 모시고 싶지 않다면 부하로라도 남아다오. 내가 너희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앞으로 중원 천지의 모든 흑패를 하나로 통합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천수(天水) 흑패는 자장(子張) 흑패와 더불어 중원 흑패를 다스리는 나의 수족이 될 것이다.”

“아!”

왕호는 상대가 주변 흑패를 차지하려는 작은 그릇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중원 천지의 모든 흑패를 통합하려는 거대한 그릇이었다. 왕호는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음을 알게 됐다.

“왕호. 너의 답을 들려다오.”

“저, 저는···.”

말을 잇지 못하던 왕호는 천천히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쿵.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던 자신을 인정해주고 알아봐주지 않았는가. 사내는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거는 법이다. 거기다 상대는 드높은 무공을 갖추고 있었고, 자신에게 내공까지 전수한 고수였다. 어디서도 마주하지 못했던 고수가 자신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고수가 자신에게 형제가 되어 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를 오래 보고 잠깐 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생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대형을 뵈옵니다!!!”

호충이 어리다는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왕호 자신도 흑패 내에 나이 많은 녀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호의 뒤를 이어 흑패 녀석들이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쿵.

““대형을 뵈옵니다!!””

“오늘 동생들이 이리 많이 생겼으니 참으로 기쁘구나.”

왕호와 같은 눈빛을 가진 놈들은 굳은 고집을 갖고 있었지만, 한번 믿음을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믿기도 했다. 지금 녀석의 눈빛이 그러했다.

‘진정으로 기재(奇才)를 얻었다.’

상인의 자질, 문의 자질, 무공의 자질과 같은 능력을 의미함이 아니었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을 줄 수 있는 녀석이었다.

“다들 나가서 도박장을 정리해라. 위에서 소란이 일었으니 손님들이 동요할 것이야.”

“예! 대형.”

“왕호는 남아라. 내가 긴히 전할 말이 있다.”

“···예. 대형.”

복잡스럽던 이층에 왕호와 호충만 남았다.

“잔이 있는가.”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왕호는 얼른 술병과 잔을 챙겨왔고, 호충은 술병을 두고 잔만 들었다. 의형제를 맺는 의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회칼을 들어 손끝에 생채기를 내고 술잔에 피를 담았다.

“!”

“네가 나를 대형으로 불렀으니 우린 의형제가 되었다. 그래도 형식은 지켜야지.”

왕호는 얼른 자신도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잔에 담았다. 각자의 잔에 피가 소용돌이치며 섞이고 있었다.

“피를 나누고 태어나지 않았으나, 피를 나누어 마신 오늘부터 진호충은 왕호와 형제가 될 것이다.”

“예! 대형!”

호충은 잔을 들어 비릿한 피를 반절 삼켰고, 나머지를 왕호에게 건냈다. 왕호가 나머지 피를 마시자 왕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의형제가 되어 즐거우니 의제에게 한 잔 주겠네!”

“하하. 예!”

“동생과 같은 기재(奇才)를 얻어 즐거우니 한 잔 더!”

“하하하!”

“우리가 차지할 천하(天下)를 위하여 한 잔 더!”

“와하하하하.”

“의제를 이제야 만나게 해준 하늘을 원망하며···. 한 잔 더.”

“대형···.”

호충은 작정하고 왕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술병의 술이 떨어질 때까지 왕호에게 술을 따라준 호충은 빈 술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의제.”

“예. 대형.”

“의제와 오래 이곳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싶으나, 중요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워야 하네.”

“아.”

“같은 이유로 자장(子張)의 흑패를 사중환 녀석에게 맡기고 떠나온 길이지. 아! 녀석은 본래 흑패의 둘째였으나, 내가 기존 흑패주를 정리해서 녀석이 올라섰지.”

‘내가 천수(天水)의 패주였음에도 형님께서 죽이지 않으셨구나. 나를 그만큼 아끼시기 때문이겠지.’

작은 오해였지만, 지금 왕호의 귀엔 뭐든 좋게만 들렸다.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대형.”

“하하하. 의제의 마음은 고마우나 의제 없이 천수(天水)가 어찌 굴러가겠는가. 내 돌아와서 의제에게 꼭 맞는 무공을 선물해주겠네.”

“아. 대형.”

“달포 이상 걸릴 것이니 의제는 몸을 준비해두시게. 내가 의제에게 맞는 무공을 찾아오면 바로 익힐 수 있도록.”

“틀림없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내가 아비처럼 모시는 분을 천수(天水)의 상행객잔에 모셔두고 왔으니 의제가 가끔 가서 잘 계시는지만 봐주시게.”

호충이 오늘 흑패를 접수한 가장 큰 이유가 이제야 나왔다. 호충은 홀로 남을 송 영감을 염려해 흑패 하나를 접수해버린 것이다.

“대형께서 아버지로 여기신다면 제게도 아버지가 되십니다. 염려 놓고 다녀오십시오.”

“영감은 나의 종복이라 신분이 미천해. 허나 어려서부터 나를 키워주신 분이네.”

“아···.”

왕호는 종복이라는 말에 호충의 신분이 높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얘길 하지 않았어. 나는 진가장의 직계라네.”

“지, 진가장! 자장(子張)의 진씨 세가를 이르심 이옵니까.”

“진가장의 이름이 여기까지 퍼졌던가?”

“무림에서 기세 높이 성장하는 세가가 아니 옵니까.”

“그래봐야 진가장에 나의 자리는 없다네. 내 위로 형이 셋이나 더 있거든.”

“대형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가주 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을 터인데···.”

오늘 보여준 신법과 무공을 보자면 누가 이보다 강할까 싶었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이만한 무공을 가진 무림 인사를 보지 못했고, 있다는 풍문도 듣지 못다.

“나는 오로지 중원 무림에서 흑패와 함께할 생각뿐이야. 내 무공은 진가장에서 철저하게 숨기고 있지. 의제도 내 무공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하게.”

“예. 어디서도 소문이 퍼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어찌 오늘에야 이런 동생을 만났을까. 내일 길을 떠나기 위해 술을 자제했지만, 나중엔 거하게 마실 것이야.”

“예! 대형!”

.

.

.

어제 그렇게 왕호와 의형제를 맺고 늦은 밤에야 객잔으로 돌아온 호충이다.

“도련님이 친우까지 만드시다니 제가 꼭 뵙고 싶습니다.”

“친우는 아니고 동생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어허허. 더 궁금해집니다.”

“어쨌든. 나 없는 동안 아프지 말고 잘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

천수(天水) 흑패를 접수하며 왕호에게 송 영감의 안위를 맡겼음에도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다. 걱정을 더 해봐야 다시 걱정만 낳겠지.’

“날이 추우니 나오지 마.”

“그래도 도련님 가시는 것은 봐야죠.”

“에잉.”

이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추운 겨울 날 송 영감은 한참이나 따르다가 호충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멈춰서 손을 흔들었다.

“제발···.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천지신명이시어 우리 귀한 도련님을 그대로 돌려주십시오.”

송 영감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멀리서 호충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에 얼른 걸음을 돌렸다.

***

송 영감은 객잔에 들어가다가 무시무시한 얼굴을 건달패가 객잔의 한자리를 차지했음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저런 자들에게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구나.’

조심히 걸음을 옮겨 별채로 가려는데, 건달패 하나가 일어나 송 영감의 소매를 붙잡았다.

“거 영감. 말 좀 물읍시다.”

“저, 저는 이쪽 사람이 아니라 천수(天水)는 잘 모릅니다요.”

송 영감은 고개를 숙이고 손사레만 쳤다.

“혹시···.”

“아,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딱.

“아윽.”

송 영감에게 묻던 녀석은 뒤에 일어난 사내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야 이 새끼야. 누가 그렇게 예의 없이 물어보라든?”

“죄송합니다. 형님.”

“······.”

송 영감은 벌벌 떨며 더 흉악한 얼굴과 머리에 훈장처럼 상처를 가진 인물을 마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대형께서 잘 챙겨주라고 하셨던 분인가 싶어서 여쭈려 하였습니다.”

“나, 나는 아닐 것이외다.”

“혹시 송 영감님이 아니 시옵니까.”

“헙!”

어찌 건달패가 자신의 성을 안단 말인가.

“아이고. 저희가 눈이 어두워 이제야 알아봅니다요. 저희 대형께서 신신당부를 하고 가셔서 저희가 이리 찾아왔습니다.”

“성만 같겠지요. 저는 대형이라는 분을 모르온데···.”

왕호는 흉악한 얼굴을 송 영감의 가까이에 가져가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진호충 대형을 모르시옵니까? 여기선 송호충으로 부르라 하시던데···.”

“!”

“아시는군요. 저희가 잘 찾아와 다행입니다.”

“그, 그럼 아까 동생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크흐. 대형이 저를 동생이라 소개하셨다 그 말씀이지요? 제가 형님은 제대로 모셨지 말입니다.”

“허허······.”

아는 동생이라 하여 호충보다 더 어릴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이렇게 흉악한 몰골을 가진 건달패일 것이라곤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대형께서 아비처럼 생각하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대형의 의제인 저 왕호도 마음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

호충은 떠나고 나서도 송 영감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을 본 왕호가 같이 온 건달패를 향해 소리쳤다.

“니들 때문에 어르신이 마음이 상하셨잖아! 당장 꿇어!”

“죄송합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

“아이고. 이러지 마십시오. 어서 일어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노인장. 거 정말 괜찮은 거 맞···.”

송 영감을 향해 말하던 거한은 왕호의 눈빛에 말투를 바꿨다.

“저희가 맞아죽을 놈들입지요. 예.”

“그분의 동생들이면 제게도 자식과 같습니다. 어서 일어들 나세요.”

“하하하. 예. 어르신.”

거한은 지금까지 잃은 점수를 만회하고 호기롭게 외쳤다.

“술상부터 보겠습니다. 여기 말고 저희가 관리하는 기루로 가시죠.”

“기, 기루는 좀···.”

“아이. 빼지 마시고 그냥 가십시다. 제가 끝내주는 년으로다가 넣어 드릴 터이니···.”

“야 이 새끼야. 어르신 복상사 시키려고 작정했어?”

“그것도 큰 복이 아닐지···.”

“뭐? 이 새끼가 정신이 빠져가지고.”

“······.”

송 영감이 천수(天水)에 머무는 동안 심심할 날은 없을 것이다.

‘어서 돌아오세요. 도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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