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스승
***
‘이번엔···. 황금의 유혹.’
공동에 진입한 호충의 눈에 비친 금빛 물결은 눈앞에 보물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금덩어리는 누구의 마음이든 들뜨게 할 것이다.
‘저거 다 가짜라잖아.’
외팔이 검객이 남긴 서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비고(祕庫) 입구에 쌓인 황금은 허락되지 않은 침입자를 위해 마련된 것이니 연자는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돌에 금칠을 한 가품일 뿐이다.]
가품이라고 했지만 너무나 진품과 유사했다.
‘혹시···.’
호충은 가짜가 아닌 진짜를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손을 들어 만지려던 호충은 얼른 손을 회수했다.
‘여기까지 와서 대업을 망칠 순 없지.’
이제 비고(祕庫)가 눈앞에 있다. 무공 비급을 위해 왔지 돈을 벌기위해 오지 않았음을 기억한 것이다.
호충은 고개를 들고 천정을 봤다.
옅은 야명주 사이로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많이 보였다.
‘저기서 쇠뇌가 쏟아지는 구조였구나.’
황금 덩어리를 들어 기관장치를 발동시켰다면 그 자리에서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황금 덩어리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내게 준 황금 덩어리와 너무 비슷하단 말이지.’
철궤에 남아 있었던 황금 덩어리와 비슷한 녀석들이었다.
‘어차피 이곳을 차지하면 기관장치도 알아야 할 터. 나중에 확인하면 된다.’
기관장치를 두고 계속 여기를 오갈 수는 없었다. 훗날 기관장치를 해제하고 확인할 마음이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다.”
지금까지는 앞으로 전진 했지만, 마지막 관문은 세 개의 문이 선택지로 남아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철문과 황금 덩어리 사이에 존재하는 양쪽의 문이 그것이다.
‘아예 찾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시네.’
사실 세 개의 문은 전부 함정이었다.
‘무슨 함정이 발동되는 지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분명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에게 죽음을 선사할 함정일 것이다.
호충은 공동으로 들어온 입구 근처로 가서 오른쪽에 미세하게 벌어진 틈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커다란 바위가 회전하며 새로운 입구를 만들어 냈다.
‘아는 놈이 아니면 들어오지도 못해.’
마지막 관문을 가볍게 통과한 호충은 안으로 들어서서 다시 돌문을 잡아당겼다.
쿵.
적막한 공동엔 황금 덩어리들과 세 개의 문만이 남아 자리를 지켰다.
***
돌계단을 조심히 내려가던 호충은 코를 자극하는 청량한 향기를 느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향기가 너무 강해져 향기만으로 취할 지경이었다. 동혈의 깊은 곳까지 들어왔기 때문인지 추운 겨울이 아니라 포근한 봄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기이한 향기와 더해지니 마치 깊은 숲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 이리 향기로울까?’
마지막 계단에 내려선 호충은 짙어진 향으로 끝이 아님을 알아챘다.
‘청량한 향속에 짙은 자연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다!’
계단에 걸터앉은 호충은 무흔(無痕)의 구절을 되새기며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능파공침(凌波空浸)하여 천지기회(天地氣回)하고···.]
눈에 보일 정도로 진했던 기운이 흐릿하게 호충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돌계단에 앉아 있던 호충은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녕 기운이 충만한 향이로다.”
호충은 마지막 계단에서 굽이진 굴을 보며 마음을 다졌다.
‘이제 비고(祕庫)가 나타날 것이다.’
호충은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허리를 접고 다리를 구부려 깊이 바닥에 머리를 닿게 했다. 마지막 관문의 마지막 기관장치였다.
슈각. 슉.
호충이 절을 하며 숙인 등 위로 날카로운 도가 두 번이나 지나갔다.
호충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길게 파인 동굴의 옆면을 보고 있었다.
‘이래서 내려가자마자 절을 하라고 했구나.’
[바닥에 내려서면 황실에 예를 표하듯이 깊이 절하여 충심을 표할지어다.]
전대 황실의 적이라면 절대로 여기서 몸을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툭툭.
무릎의 먼지를 털고 일어선 호충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굽이진 동굴 너머에서 호충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네 구의 시신이었다. 네 구의 시신 위에도 지금까지와 같은 옅은 야명주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
‘어찌하여···.’
네 구의 시신은 호충을 맞이하듯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 백 년이 흘렀음에도 마치 어제 죽은 것처럼 시신이 멀쩡하다니.’
검 푸릇한 얼굴색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호통을 칠 것 같은 보존 상태의 미라였다.
호충은 복색을 보고 이들이 황궁(皇宮) 비고(祕庫)를 지키던 마지막 황궁 무사임을 알 수 있었다.
‘전대 황실의 금의위 복장. 게다가 모두 붉은 색 비단에 금실이 수놓아져 있구나.’
금의위 중에서도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라는 뜻이다.
전대 황실이나 현 황실에 공경하는 마음이 있진 않았으나, 이들이 생전에 이루었을 지고한 무공과 황실을 향한 충성심은 공경할 만 하였다.
호충은 네 구의 시신 앞으로 가서 옷을 정돈하고 정성스럽게 절을 올렸다.
“무림말학 진호충이 대선배들께 인사 올립니다.”
일배(一拜), 이배(二拜), 삼배(三拜)···. 절은 구배(九拜)까지 계속되었다.
앞으로 이들의 뒤를 이어 비고(祕庫)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각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호충의 스승이 아니겠는가.
“선배님들을 스승으로 여기고 소중히 남겨주신 유진(遺塵)을 이어받겠습니다.”
더 이상 기관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행했을 뿐이다.
호충이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이고 일어났을 때 호충은 시신들의 표정이 조금 바뀌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바람이 일지 않았음에도 네 구의 시신은 옷가지와 함께 먼지로 부스러졌다.
“!!”
기이한 일이었다.
네 구의 시신이 먼지로 가라앉은 곳으로 간 호충은 이들이 자신들의 전인을 기다리느라 저승으로 가지 못했다고 짐작했다.
“···얼마나 걱정이 깊으셨기에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여기 머무셨습니까. 부디 영면(永眠)하소서.”
비고(祕庫)의 비급들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이곳을 지킨 이들의 봉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겨우 먼지만을 남겼지만, 한 줌의 먼지라도 이들이 삶을 살아간 흔적이 아니겠는가.
호충은 조심스럽게 먼지를 모으다 먼지 속에 서책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나머지에도 눈길을 줬다. 저마다 책자가 그 밑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먼지를 밀어내고 확인한 첫 번째 서책에는 [경혼무흔(驚魂無痕)]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 이건!!”
‘기존 무흔(無痕)에 경혼(驚魂)이 추가되었다!’
호충은 얼른 서책을 들춰 안의 내용을 살폈다.
“허어!”
무흔(無痕) 보다 더 상세했고, 담긴 무리(武理)도 지고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추가되었어. 혼(魂)이 놀랄(驚)정도의 비급임이 확실해.’
외팔이 검객이 전해준 무흔(無痕)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경혼무흔(驚魂無痕)의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경혼무흔에는 내공의 축적과 은폐에 관련한 상위 무리와 내공을 활용하는 검(劍), 도(刀), 권(拳), 각(脚), 퇴(腿), 조(爪) 등의 활용법이 망라되어 있었다. 묵직한 서책의 일부만이 무흔(無痕)의 흔적이었다.
서책의 마지막 장엔 경혼무흔(驚魂無痕)의 저자가 남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파진후(破陣厚)]
“스승님의 이름을 비석에 남길 수 있어 다행입니다.”
호충은 서책을 소중히 갈무리하고 다음 서책을 향했다.
다음 서책의 제목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경신비천(輕身飛天)]
경신(輕身)에 비천(飛天)이 더해진 서책의 뒷부분을 조금 들춰본 호충은 조용히 서책을 덮었다.
‘천상제(天上梯)가 여기 있었구나.’
그래서 몸(身)을 가벼이(輕)하여 하늘(天)을 난다(飛)는 제목이 붙었던 것이다.
경신비천(輕身飛天)의 저자는 [오현락(吳賢洛)]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다음 서책은 양의(兩意)를 생각하고 제목을 보았는데, 환체(換體)의 상위 무공이 있었다.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
환체강림천에는 환골탈태를 안전하게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신비로운 무리(武理)가 들어있었다. 운을 하늘에 맡기고 실행하는 평범한(?) 환골탈태가 아니었다.
‘하늘(天)을 몸에 강림(降臨)시켜 몸을 바꾼다(換體).’
천외천의 무리(武理)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찌 사람의 몸에 하늘을 강림시킨다는 발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의 저자는 [편수협(編秀燲)]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호충은 양의(兩意)의 진본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마지막 서책을 먼지 속에서 들어올렸다.
‘이제 마지막이다.’
[진양의(眞兩意)]
‘역시.’
호충이 주력으로 익히고 있는 양의(兩意)에도 상위 진본이 있었다.
진양의(眞兩意)의 저자는 [송재호(宋宰鎬)]라고 적혀 있었는데, 송 영감과 성이 같아 더욱 친밀하게 느껴졌다.
호충은 이들이 남긴 먼지를 모아 작은 봉분을 만들고 주변의 돌을 모아 쌓아올렸다. 그리고 옆의 돌바닥에 각자의 성명을 남겨두었다. 아직 비석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충은 비석 대신 갈무리한 네 권의 서책을 앞에 내려놓고 다시 절을 올릴 준비를 했다.
“네 분 스승님께 다시 인사 올립니다. 오랜 시간을 넘어 스승님의 가르침을 배울 제자 진호충입니다.”
호충은 다시 구배지례(九拜之禮)로 예를 보이고 넓은 공동에 주저앉았다.
앉아서 주변을 돌아보니 공동엔 생존에 필요한 물이 흐르고 있었고, 파릇한 이끼가 자라고 있어 건량이 없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밖은 겨울이었는데, 이곳은 푸근한 기운만 감돌았다. 또한 공동과 연결된 몇 개의 문이 있었는데, 문 뒤에 뭐가 있을지는 뻔히 짐작됐다.
‘지금 다른 무공이 중요하지 않아. 우선 이것들을 익혀야 해.’
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양의(兩意)를 통해 달달 외우고 머리에 각인시킨 무공이 바로 무흔(無痕), 경신(輕身), 환체(換體)였다. 이미 익힌 무공을 확실히 한 다음에야 다음 무공을 접해도 심상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무공 비급이 가득 쌓여 있을 문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배웠던 무공이라 선택하기도 했지만,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결정이기도 했다.
‘이 무공들은 최후까지 비고를 지킨 절세 고수의 무공이다. 이들은 모두 진양의(眞兩意)를 익히고 기존 무공을 섭렵했을 터. 이들이 남긴 무공이야 말로 비고(祕庫)의 최후 비급이다.’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해 대성에 이른 이들이다. 이들의 비급이 다른 기존 무공보다 더 나은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후읍.”
숨을 들이키며 마음을 다지던 호충은 가장 먼저 일으킨 양의(兩意)를 통해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 공청석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