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232)

산서(山西)

***

협의맹이 먼저 회의 장소에서 빠져나간 다음 정무맹의 인사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당의 송호 장문인 또한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맹주. 이제 대체 어쩌실 생각입니까.”

“······.”

“오늘 일은 정말 뼈아픈 실책입니다.”

“······.”

“아무리 비어있는 지역이라지만, 이리 쉽게 내줘서는 안 될 일입니다.”

“······.”

“세가는 우리와 달리 충분한 금력을 갖추고 있기에 확장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

“안 그래도 주변 세가가 자꾸 커지고 있어 걱정이었건만···.”

“······.”

모두가 한 마디씩 하자 금방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정무맹 인사들의 말에 대꾸도 없이 고민을 이어가던 송호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하시오.”

굳은 얼굴을 한 송호 장문인은 정무맹의 구성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이 문제를 촉발한 것은 결국 마인(魔人)의 흔적이었소. 무림 방파의 제자들을 중원으로 대거 파견하여 마인(魔人)과 마교(魔教)의 흔적을 찾아내시오. 그리고 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 합시다.”

“아!”

“그리하면 세가가 확장할 명분이 사라질 터이니···.”

“지금의 상태를 고착화 할 수 있을 것이오.”

협의맹 맹주 당세천의 머리도 머리지만, 정무맹 맹주 송호의 머리도 장식이 아니었다.

“우리 정무맹의 조사가 늦어지면 세가의 확장을 돕는 일이 될 것이오. 정무맹의 무림 방파는 여력을 남기지 말고 조사에 투입시켜주시오. 혹여 실제로 마교(魔教)가 발호하는 중이라면 협의맹과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울 때가 아니기 때문이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마교의 흔적을 찾은 것으로 만들어 세가의 확장 명분을 무위로 만들 것임을···.

“맹주의 명에 따르리다.”

“역시 맹주는 수가 있었구려.”

“협의맹 당세천 가주의 혀가 생각보다 더 날카롭소. 연회에 참석하거든 다들 입을 조심하시오.”

“···큼. 쉬이 볼 상대는 아니더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니 경계심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

중원 무림의 정무맹과 협의맹이 어떻게 돌아가건 비고(祕庫)의 시간은 흘러갔다.

호충은 목표했던 대로 단 십일 만에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을 오성(五成)까지 익혔고, 진양의(眞兩意)는 육성(六成)까지 익힐 수 있었다.

“······느려.”

호충은 경이적인 속도로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양의(眞兩意)로 올라간 오성과 공동 내의 공청석유가 조화를 이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간을 줄였지만, 호충은 웃을 수 없었다.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을 익히며 환골탈태에 일주일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청석유는 차근차근 적응 단계를 거쳐야 했기에 복용하는데도 시일이 소요된다고 했다.

‘공청석유를 취하며 환골탈태에 돌입해 일주일 뒤 성공하면 이십일이 지난다.’

그렇게 되면 예정했던 한 달에서 십 일이 남는 셈이다.

‘그 십일 동안 경혼무흔(驚魂無痕)과 경신비천(輕身飛天)을 연마함과 동시에 비고의 무공을 뒤지고 알맞은 무공을 찾은 다음 필사까지 마쳐야 해.’

여전히 빡빡한 일정이었다.

이제 공동엔 예전과 같은 향기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 공동에 흐르던 모든 기운을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호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청석유라고 새겨진 문 앞에 섰다.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건곤(乾坤). 그리고 소우주(小宇宙).’

그간 호충은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을 통해 인체의 신비를 이해해고, 세상을 떠도는 기운을 공부했다. 겨우 십일이었지만, 새로 익힌 진양의(眞兩意)를 최대한 끌어올려 여기까지 익힐 수 있었다.

‘사람의 몸은 소우주(小宇宙)이기에 능히 하늘(天)을 담을 수 있다.’

하늘을 몸에 강림시켜 몸을 바꾸는 지고한 신비를 이해한 호충의 눈은 깊은 지혜를 담고 있었다.

턱.

이제 자연스럽게 문고리에 손이 올라간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

호충은 호기롭게 문을 잡아당겼고, 안에서 밀려나오는 진한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크윽.”

‘밖으로 나온 공청석유의 기운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구나.’

밖에서 느꼈던 기운과 비교도 되지 않을 농밀한 공청석유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호충은 얼른 들어온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다시 일 단계다. 적응이 필요해.’

밖에서 적응을 완료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정도 기운이라면 다시 적응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냥 먹으면 독약이나 다름없다.’

공청석유의 기운에 적응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거대한 기운에 잡아먹히고 만다.

과거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무림 문파에서도 괜히 영약을 단약으로 다시 제조한 것이 아니다. 영약의 독소를 없애고 진짜 도움이 기운만 남긴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적절한 수준의 기운으로 나누어 복용하기 위함이었다. 목이 마르다고 강물 전부를 입에 들이부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랬다간 배가 터져서 죽고 말 것이다. 지금 공청석유를 그냥 들이마시는 것은 소림의 대환단 열 개를 한 입에 털어 넣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짙은 기운이 호충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천천히 코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정무맹의 장문인들과 협의맹의 가주들은 가면을 쓰고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허허허. 예전부터 남궁가의 검이 날카롭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주님의 기도가 굳건한 것을 보니 가주님의 검도 능히 산을 베어낼 것 같소.”

“무당 앞에서 검을 논하는 것은 부끄럽지요. 허허허.”

진원우도 그들 사이에 끼어 정무맹의 장문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웃는 낯으로 대했다. 그리고 주요 목표인 화산의 청진 장문인을 마주했다.

“장문인. 회합에선 눈이 많아 인사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진 가주.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아까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소.”

마인(魔人)이 남긴 상흔을 가장먼저 알았으면서도 마인의 무공 수준을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산의 무공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으니, 마교의 마인들이 어떤 무공을 사용하고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원우가 아니었다면 종남파에 크게 체면을 상할 뻔했다. 같은 섬서 땅에 있는 종남파는 화산파와 오래 전부터 날을 세우는 무림 방파였다. 다른 곳에 지는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종남에 밀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화산파의 무인들이다.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장문인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저야 저 잘난 맛에 나선 것뿐이지요.”

“허어. 지금까지 제가 진 가주님을 잘못 생각한 모양입니다.”

상대가 부끄럽지 않도록 자신을 낮추고 보답까지 바라지 않는 모습에 청진은 깊이 감명한 모양이다. 섬서 땅에서 화산과 함께하기에 진씨 세가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곤 했었다.

진가장은 진원우가 가주로 올라선 다음부터 확장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고, 특히 세 명의 부인을 두고 처가를 이용하여 세가를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여 왔기에 이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오직 처가의 힘에 기대어 세가를 일으킨다하여 다들 진 가주를 얕잡아보지 않았던가.’

“화산에 이리 마음을 써주는 분을 몰라봤습니다.”

“정무맹이니 협의맹이니 따지기 전에 우리는 같은 섬서 지역의 동지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암요.”

“봄이 오면 막내아들을 화산으로 보낼 터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진가장에서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터인데···.”

“막내라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봅니다. 어려서부터 책만 붙들고 살기에 그러라 했는데, 녀석의 나이가 열일곱에 이르렀으니 이젠 무공에도 힘을 써야겠다 싶었습니다.”

진원우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어미가 일찍 귀천하여 응석받이로 자랐습니다. 집에서 가르치자니 차마 모질게 대하질 못하겠더군요.”

“어허. 그런 사정이···.”

집에서 벌레취급을 받아온 호충이 갑자기 응석받이로 변해버렸다.

“무공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니 화산에서 기초라도 잡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장문인.”

무공을 모른다는 호충은 지금 공청석유(空靑石流)를 앞에 두고 희대의 절세 신공을 연성하고 있었다.

“귀한 진 가주의 막내아들이 어디 하나 상하지 않게 잘 보살피겠소.”

“녀석의 팔 다리가 잘린다 하여도 화산을 원망치 않겠습니다. 그러니 강하게만 키워주십시오.”

“진 가주께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신 모양입니다. 확실하게 가르치겠습니다. 진 가주.”

누가 누구를 가르칠 것인가.

***

연회가 끝나고 호현과 마주한 진원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첫 돌은 잘 올린 것 같다.”

오늘 정무맹과 협의맹의 회합으로 협의맹이 큰 이익을 얻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오늘 가주님께서 현명하게 처신하시는 모습을 보고 많은 배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라고 너를 데려온 것이다.”

“허나 당 가주의 혀가 너무 날카로워 많은 경계심을 산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이번엔 이득을 얻었지만, 앞으론 쉽지 않겠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었지만, 진가장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협의맹의 맹주인 당세천이 정무맹의 장문인들에게 경계심을 샀으니, 훗날 두 맹이 하나가 되어도 당세천이 통합 맹주로 거론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정무맹이 협의맹에 잡아먹힌다는 인식이 있는 한 당세천은 그저 당문의 가주로만 남을 것이다.

“화산의 장문인과 나누신 대화는 어떠셨습니까.”

“산에서 도만 닦은 도인이라서 그런지 상대하기 어렵지 않더구나. 앞으로 화산의 무공을 받아오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

화산의 무공을 하사받는 형식으로 첫 걸음을 뗄 것이지만, 두 단체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화산의 정화인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진가장이 가졌기 때문이다.

“화산에 경계심이 없다면 가주님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녀석을 화산으로 보낸 다음엔 네가 직접 화산을 구슬려 무공을 빼 내와야 한다. 화산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줄로만 알고 무공을 내줄 것이다.”

화산파는 진가장의 요청에 일부 무공을 하사할 것이고, 진가장은 이를 숨기지 않을 것이다. 이후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의 다른 이름인 진강이십사검(眞强二十四劍)을 황궁에서 승인 받은 다음, 화산과 무림에 이를 공표할 생각이었다.

“화산은 진가장의 이름에 눌려 섬서에서 발을 펴지 못할 것이옵니다.”

“허나 다른 상승 무공을 찾는 일에 소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고작 진강이십사검(眞强二十四劍)으로 무림을 질타할 수는 없다. 무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무공이 가장 우선인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당 가주 덕분에 세가만 날개를 달았으니 앞으론 더욱 영역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허나 섬서가 아닌 주변으로 뻗어나가야 할 터. 너는 어디가 좋겠느냐.”

“진가장은 산서(山西)로 가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같구나. 산서는 무주공산이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