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
호충의 심상 속 존재에 불과한 스승들이 여러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는 파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호충은 읽었다.
“괜히 무공서를 다 읽었어!”
진양의를 통해 무공서를 다 읽고 진의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심상 속 스승들도 이에 따라 무공을 구사하는 것이다.
오현락은 백보신권을 적중시키고도 단단한 자세를 유지하며 호충을 향해 다시 공세를 취했다.
‘스승님은 단 일합의 대련도 경시하지 않는다.’
호충의 스승들은 상상 속의 대련에서도 긴장을 놓는 순간이 없었다. 이들은 오직 황제의 명을 따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과 보살핌은 기대할 수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호충은 무당의 십단금(十段錦)을 피해 내며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빈곳을 발견하자마자 자신의 팔을 뻗어 경혼무흔을 통해 배운 조(爪)를 날렸다. 뾰족하게 변한 호충의 손가락이 오현락의 어깨를 찍어갔지만,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호충의 몸에 손바닥이 닿았다.
“컥.”
‘허초에 속았···.’
내부를 진탕시키는 십단금(十段錦)의 힘이 절세 고수의 손에서 발휘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호충은 실제로 피를 토하며 상상 속의 대련에서 빠져나왔다.
“우웩.”
잠깐의 대련이었지만, 살기가 넘치는 진짜 대련과 다르지 않았다.
“송 사부님은 좀 적당히 만드셨어야지.”
진양의에 수록된 가상의 대련법이였기 때문에 호충은 송 사부를 탓했다. 공동이 넓다지만, 칼과 도를 들고 무공을 발휘할 만큼 넓지는 않았다. 진양의에 이러한 수련법이 없었다면 이론으로만 익힌 무공을 밖으로 나가서 다시 익혀야 했을 것이다.
“이러다가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스승님들께 맞아죽겠습니다.”
아쉬운 소리를 해봤자 스승님들이 잠든 작은 봉분에선 아무런 말도 없었다.
호충도 대답을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마음대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다음엔 살살 부탁합시다. 네?”
공동에서 수련할 방법이라곤 진양의에 나와 있는 이 수련법 밖에 없었다. 심상 수련의 문제점은 또 있었다. 호충이 가장 꺼리는 공격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약점을 지우기 위한 송재호의 안배였으나, 덕분에 호충은 매번 심상 속 스승들에게 얻어터지는 중이다.
호충은 진탕된 내기를 수습하고 다시 가상의 공간에 진입했다. 그리고 호충의 눈앞에 다른 스승이 등장했다.
“워워. 파진후 스승님은 지금 나오면 안 되죠!”
호충은 가상 대련에서 파진후를 맞이하여 도망만 다니다가 거하게 얻어맞고 공동에 널브러졌다.
파진후는 이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무공을 구사하는 스승이었다. 무당의 태극신공(太極神功)을 기반으로 한 태극혜검(太極慧劍)이 파진후 스승의 손에서 재탄생했고, 호충은 아무것도 못해보고 몸을 난자당했다. 심상에서 얼른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며칠은 요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에효. 아직 멀었네.”
호충은 기존의 무공을 계속해서 익히고 비고에서 선택한 무공을 정독, 필사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
예정된 시간을 다 소진한 호충은 의관을 정제하고 작은 봉분 앞에 앉아 있었다.
“제자 호충. 하산하려 합니다.”
“······.”
“헤헤. 붙잡지 않으시는 걸 보니 제자가 상당히 뛰어난 성취를 보인 모양이죠?”
“······.”
스승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호충이다.
“또 오겠습니다. 제가 다시 왔을 때 공청석유가 가득 차있었으면 좋겠네요. 스승님들이 저승에서 힘 좀 써보세요.”
내실의 공청석유는 모조리 호충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벌레가 와서 먹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엄청난 내공의 증진을 이뤘음에도 호충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다음엔 스승님들의 이름 석 자가 담긴 비석을 들고 오겠습니다.”
“아. 전이라도 부쳐올까요? 술도 좀 갖고 와야겠네요. 제가 작은 제사라도 올리겠습니다.”
호충은 지금 미련을 떨치는 중이다.
“···그간의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스승님들 덕분에 제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호충은 깊이 절을 올리며 지금까지 가상의 공간에서 배운 스승님들의 무공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아직 미진한 수준이지만,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같지 않을 겁니다. 각오하세요.”
이번 가상의 대련에서 가장 큰 성과가 오현락의 팔소매 한 자락을 베어낸 것이었다.
“다음엔 스승님들의 옷자락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고수가 되어있을 겁니다.”
‘허허허허.’
“웃지 마세요. 진짜라니까요!”
호충은 가상의 공간에서 스승님들과 마주하고 있음이다.
“제자 진호충. 지하 무림의 절대자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봉분에 하직 인사를 올리는 것은 형식일 뿐이다. 스승들과의 대련은 가상의 공간에서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맨날 보는 건 저도 알죠! 때리지 마세요. 악!”
진양의는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충을 심상 대련으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가 지금의 이 모습이었다.
“그럼. 이제 진양의를 풀겠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언제나 진양의를 수련했다. 지금은 진양의를 풀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호충이 잠시 눈을 감았던 눈을 뜨자 적막한 동굴의 공간이 호충을 반겼다.
“···삭막하네.”
환경은 삭막하지만 호충의 봇짐과 기억은 풍성했다. 봇짐엔 부하들에게 전해줄 필사 비급으로 가득했고, 머리에도 정사마의 무공 비급이 가득 기억되어 있었다.
“진짜로 또 올 겁니다.”
호충은 머물렀던 자리에서 돌아서 계단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절을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썩을. 돌아갈 땐 좀 봐주지.”
올 때와 반대로 하나씩 되짚어 나가는 호충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황금 덩어리가 놓인 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짜 맞나?’
내기가 성장하고 보는 눈이 생긴 지금은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었다.
가짜 황금은 도무지 진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다 속아 넘어가겠어.’
손으로 들어도 무게가 비슷할 것이니 쪼개서 살피지 않는 이상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기관 장치를 해체하고 나서 확인해봐야겠어.’
동혈의 입구까지 단숨에 도착한 호충은 묶어둔 줄이 그대로 있음을 보고 마음을 놨다.
‘아무도 줄을 따라오지 않았구나.’
혹시 자신이 밖에 묶어놓은 줄을 누군가 발견했으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이다.
동혈을 열고 단숨에 밖으로 쏘아져 나간 호충은 봇짐에서 검을 꺼내 자신이 다듬어 놓은 바위를 향해 출수했다.
샤각.
기껏 부드럽게 다듬어 놨던 바위가 다시 날카로움을 뽐냈다.
‘이제 밧줄은 필요 없다.’
호충의 발바닥이 허공을 박차고 그대로 위로 쏘아져 올라갔다.
천상제에 이르는 경공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허공을 한 번 도약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호충은 그 한 번의 도약과 절벽을 두 번 디딘 것으로 힘겹게 내려왔던 삼십 장을 올라갈 수 있었다.
본래 자신이 밧줄을 묶어놓은 곳에 도달한 호충은 주변을 살핀 다음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밧줄을 끌어 올리고 묶은 흔적이 남지 않도록 나무와 돌에 흙을 문질러 발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곳을 가리키는 두 봉우리를 눈에 담았다.
‘지금은 저 봉우리를 자른 파진후(破陣厚) 스승님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경혼무흔(驚魂無痕)을 익히며 저 봉우리를 자른 이가 파진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분명 도달할 것이다.’
내공만큼은 그에 비견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호충에게 남은 것은 끝없는 수련과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호충은 잠시 날카로운 봉우리를 눈에 담았고 곧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팟.
호충이 서 있던 자리엔 작은 흔적만 남아있었고, 이후의 발자국은 눈 위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산자락엔 차가운 바람만 불고 있었다.
***
호충은 관도를 타지 않고 산과 산을 건너 천수를 향해갔다.
관도를 타봐야 괜히 사람과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이들이 어딜 다녀왔냐고 물으면 괜히 거짓을 늘어놔야했기에 일부러 인적이 없는 산을 선택했다. 게다가 경공을 발휘에 빠르게 가는 편이 관도를 통해 가는 것보다 더 빨랐다. 무공을 발휘하려니 사람이 없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호충이 산을 타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영감한테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호충은 안력을 집중하고 주변의 기운을 탐색하고 있었다.
“어디 영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약초라도 한 뿌리 찾아 송 영감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공청석유를 다 먹어치우고서야 송 영감을 떠올렸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었다. 벌써 한참이나 찾았지만, 오늘까지 영 허탕이었다.
“호오. 저긴가?”
호충의 감각에 미세한 기운이 응집된 것이 느껴졌다. 영약의 기운이 아니라 땅의 기운이다. 영약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기(地氣)가 집중된 곳에서만 영약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었다. 얼른 작은 언덕을 넘어 눈 쌓인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오오! 이건!!”
약초를 잘 모르는 호충도 잎사귀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는 귀한 약초였다.
“심봤다아아아아!!”
분명 삼(蔘)이었다. 인삼과 유사해보였지만, 산에서 캤으니 효능은 인삼과 다를 것이다.
“산에서 찾았으니 무조건 산삼이지!”
호충은 회칼을 꺼내 단단한 흙을 조심스럽게 부수고 삼을 캐내기 시작했다.
이후 주변에 나무를 잘라 속을 파내고 캐낸 삼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하지만 너무 기분을 낸 모양이다.
“어허허. 오늘 운이 좋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채주님. 생각지도 않은 손님이 제 발로 걸어들어 왔습니다.”
삼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친 덕분에 이런 상황을 만들고야 말았다.
“안 그래도 본산에서 귀한 손님이 오셔서 뭐라도 드리려 했는데, 마침 잘 되었어.”
“손님을 모셔올까요?”
“얼른 모셔 와라. 내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드리고 선물까지 드리면 녹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야.”
“예. 채주님.”
“······.”
호충은 자신과 산삼을 두고 다 잡은 토끼처럼 생각하는 산적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지금까지 배운 무공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나, 무공은 외부에 함부로 드러낼 일이 아니었다.
“저기···.”
채주라고 불린 이가 돌아서서 얼굴을 보였고, 호충은 그의 얼굴이 상당히 낯익다는 것을 알았다.
“장굉?”
전에 천수로 오는 길에 진가표국과 함께 만났던 천산채(天山埰)의 채주 장굉이다.
호충은 장굉을 통해 자신이 천수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대는 나를 아는가? 저런···. 청년은 운이 좋지 못하다. 어찌 나를 두 번이나 만나 횡액을 당하는가.”
“나 몰라?”
“···내가 산중에서 만나는 이들을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 어서 방금 캐낸 삼이나 상하지 않게 내려놓게.”
호충이 환골탈태를 겪으며 성장했기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큭큭. 이거 재미있네.”
호충이 고개를 돌리며 웃자 장굉은 호충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깊은 산중에서 산적을 만나고 어찌 웃음을 흘린단 말인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놈이로다. 적당히 벗겨서 널어놓아 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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