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32)

도법으로 대성할 자질

***

“잠룡진(潛龍陣)이 대월천룡권과 같은 절세의 신공은 아니나, 그에 비견될 특별한 무공이다. 너는 두 무공을 익혀야 하지만, 가장 먼저 잠룡진을 완전히 깨우쳐야 할 것이다. 황궁의 누구도 우리가 무공을 익혔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이를 깨우치고 있기에 지금까지 황궁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충은 왕호의 목젖이 크게 꿀렁이는 것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그럼 제가 정말로···.”

“너는 고수가 될 것이다. 무림에서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고절한 고수가 될 것이다. 또한 황궁의 무사들도 무림의 인사들도 네가 무공을 익혔음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왕호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지 못하고 입술만 들썩거렸다.

“대형.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직 첫 걸음도 떼지 못했으면서 다 이룬 양 착각하지 마라.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고수가 되는 법이다.”

“물론이지요. 저는 항상 고통과 함께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는 혼자가 아니지. 수뇌부인 류창과 나준을 단련시키면서 너 또한 무공을 습득해야 한다.”

“아.”

“그뿐이겠느냐? 천수 흑패의 조직원들도 단련시켜야지. 네가 홀로 느긋하게 무공을 연마할 시간이 있겠느냐?”

“단련은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될 것인데···.”

호충은 다시 손을 뻗어 아까 꺼내뒀던 일반 조직원 전용 무공서를 허공섭물로 잡아당겼다.

“애들 몸이 준비되면 너는 이 무공서를 익히며 지도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이것도 익혀야 한다굽쇼?”

[파산도법(破散刀法)]과 [류상비도(柳狀飛刀)]라고 쓰인 비급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네 부하들이 누구한테 배워? 네가 배워서 가르쳐야지.”

호충은 애초에 왕호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이후 자장 흑패도 마찬가지였다. 사중환과 옥비연을 시작으로 밑으로 전파되어야 했다.

“······.”

왕호는 아득한 심정이었다.

“그럼 저는 누구한테 이 많은 무공을 배웁니까요.”

“나에게 배워야지.”

그렇다고 처음부터 혼자 익히라 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조직원은 맡기더라도 수뇌부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이 직접 가르칠 생각이었다.

“···대형은 익히셨습니까?”

“별로 어렵지 않더라.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은 조금 신경을 써야했지만, 나머지는 아주 쉬웠지.”

진양의가 십성(十成)에 도달하며 오성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대형.”

“오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편히 쉬자.”

“네?”

“내가 저것들 챙겨오느라 이 겨울에 수천리 길을 다녀왔다. 편히 먹고 쉴 생각이다.”

“역시 오늘은 놀고 내일부터 시작하는 맛이 있지요.”

“크하하. 역시 내 의제로구나. 가자!”

“예! 대형.”

호충은 왕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주루를 찾아갔다.

“류창이랑 나준도 불러. 다른 놈들은 몰라도 흑패 수뇌부 얼굴은 익혀야지.”

“옙!”

왕호를 비롯한 이들은 주루의 별실에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켰다. 호충은 차마 술을 입에 댈 수 없었다.

‘아직이다. 술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

대신 호충은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맛깔나게 풀어내며 자리를 흥겹게 만들었다.

“내가 산삼을 딱 발견하고 ‘심봤다.’하고 소리치지 않았겠어?”

“우아. 삼을 찾았으면 의당 그래야 하지요.”

“저도 한번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잘 챙겨두셨으면 저도 한 입만···.”

“아서라. 벌써 다른 사람 입으로 다 들어갔다.”

호충은 지방 방송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산적들이 찾아왔지 뭐야.”

“네에? 산적패가 들이닥쳤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인데···.”

“대형께서 다 물리치셨겠지요.”

“맞습니다.”

이럴 때 반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면상을 보니 전에 본 놈이었던 거야.”

“오오. 산적패도 알고 지내셨습니까요?”

“알고 지내는 건 아니고 전에 여기 오는 길에도 한번 인사하고 지나갔었지. 그때는 표국 일행과 같이 있어서 굽실거렸는데, 나 혼자 있다고 아주 기고만장이더라고. 내가 산삼을 캤다니까 탐이 난 게지.”

“그래서요?”

“마침 녹림에서 높은 손님이 오셨다고 둘이서 아주 나를 껍데기를 벗기겠다고 나서네?”

“노, 녹림.”

섬전비도라고 했던 나준이라는 놈이 녹림이라는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왜. 너희가 흑패면서 녹림이 무섭냐?”

“녹림보다는 녹림왕의 소문이 있는지라···.”

“무슨 소문인데?”

“녹림은 어차피 관과 적대하는 곳이지 않습니까요. 관에 잡히면 어차피 죽는 목숨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지요.”

“그렇긴 하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상승 무공을 익히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상승 무공 비슷한 것이라도 있으면 무조건 익혀서 지금의 녹림십팔채(綠林十八埰)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상승 무공. 그래. 녹림의 사자라는 놈은 무공을 좀 익히긴 했었지.”

왕호는 그 뒤의 일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찌 하셨습니까? 대형.”

“둘 중에 누가 나설지 고민하기에 내가 먼저 나서서 녹림 사자의 이마에 비도를 날리고, 작은 칼을 꺼내서 채주의 목을 따버렸지.”

“······.”

“······.”

“······.”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만 많더라고.”

“정녕 그냥 죽여 버리셨단 말입니까?”

“그럼 날 죽이겠다는 놈들을 살려?”

“그러다 녹림이 찾아오면···.”

“다 조치해두고 왔다. 둘이 상잔한 것으로 만들고 부채주 놈을 채주로 만들어놨지.”

“······.”

“오호. 역시 대형은 뒤처리가 완벽하십니다요.”

“그렇습니다. 대형의 무공도 대단하십니다. 단숨에 비도를 날리고 목까지 따시다니요.”

왕호는 할 말을 잃었는데, 류창과 나준은 호충의 말에 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크흐흐. 어째 허풍으로 듣는 눈치다?”

“그럴 리가요.”

“절대로 아닙니다요.”

왕호는 호충의 무공을 견식 했기에 지금까지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류창과 나준은 아직 호충을 잘 알지 못했다.

“이러면 내가 한 수 보여주지 않을 수 없지.”

호충은 주루의 내실에서 어디에 비도를 뿌릴지 골랐다.

“내가 비도를 날릴 터이니 잘 봐라. 특히 나준 네가 잘 봐. 너는 섬전비도라고 불린다며.”

“하하하. 제가 비도는 좀 씁니다.”

“그러니 잘 봐.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호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비도를 날리기 위함이었다.

‘저 자세로 무슨 비도를 날리신다고···.’

“찬란한 십이비도가 간다.”

호충은 품에 손을 가져갔다가 떨쳐냈다.

단 한 수였다.

“큭큭. 내 십이비도가 날아가는 건 잘 봤냐?”

“풉.”

나준은 단 한번 손을 뻗어 놓고 십이비도를 날렸다는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에도 비도가 날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손을 뻗은 것도 우스운데 아무런 흔적도 없어서 웃은 것이다.

“······.”

“······.”

하지만 나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왕호와 류창은 웃을 수 없었다. 아직 이를 알지 못하는 나준은 해맑게 호충에게 물었다.

“대형. 비도가 어디로 갔습니까?”

“에잉. 괜히 보여줬다. 얘가 단 하나도 알아보지도 못하네.”

호충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왕호와 류창이 떨리는 손을 들어 나준을 가리켰다.

“왜요? 여기 뭐라도 있어요?”

“···네가 앉은 자리를 봐라 임마.”

“너 방금 뒈질 뻔했어.”

나준은 그제야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옆에 나란히 박혀있는 열두 개의 유엽비도를 볼 수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둘은 처음부터 의자 옆에 솟아난 열두 개의 비도가 보인 것이다.

“!!!”

너무 은밀해서 소리조차 나지 않았고, 앉아 있었음에도 비도가 박히는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비도가 박힌 방향은 비도를 발출한 방향의 반대편 이었다. 나준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고절한 비도술에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

‘미, 미친. 대체 어떻게···.’

“너는 어디 가서 비도 쓴다고 하지 마라. 그러다가 녹림의 그 놈처럼 머리에 비도자루가 솟아날 테니까.”

나준은 술을 먹던 자리에서 옆으로 나와 바닥에 엎드렸다.

“대형.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큭큭. 배우는 자세가 됐구나. 좋다. 왕호.”

“예. 대형.”

“얘가 배운다니까 착실하게 가르쳐라.”

“옙!”

“정말 가르쳐 주십니까요?”

“그럼 내가 헛소리를 하겠느냐? 대신 네 별호는 압수다. 진짜 섬전비도가 되는 날에 네 별호를 돌려주마.”

“하하하. 대형 앞에서 어찌 섬전비도라는 별호를 쓸 수 있겠습니까. 별호는 어찌 되든 괜찮습니다.”

방금 봤던 고절한 비도술만 배울 수 있다면 별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류창. 너는 거력패도라고?”

“···좀 쎄 하네요.”

“짜식이 감은 좋네. 일어나서 채주 새끼처럼 내게 도를 내리쳐라. 내가 한 수 보여주마.”

“온 힘을 다해서 내리칩니까?”

“그럼 나한테 힘 조절 하려고? 아서라. 네가 백년이 지나도 내 옷자락 하나 벨 수 없으니까.”

“큼. 비도는 몰라도 제 패도는 눈이 없습니다. 다쳐도 원망 않기요.”

“큭큭. 끝도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호충은 술상 옆으로 섰고, 류창도 자신의 거도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갑니다.”

“오든가 말든가.”

“흐읍.”

류창은 직도황룡(直道黃龍)의 정직한 초식으로 패도를 휘둘렀다.

후앙.

호충은 대기를 거칠게 가르며 내려치는 류창의 거도에 가볍게 손을 가져갔다.

텁.

“!!”

“!!”

호충의 엄지와 검지에 잡힌 거대한 도가 중간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류창은 아직도 온 힘을 다해 도를 잡고 있었다.

“끄응.”

“잡스러운 움직임이 많구나. 힘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어. 직도황룡(直道黃龍)은 강(强)에 쾌(快)가 가미되어야 한다. 또한 팔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하나가 되어 휘둘러야 한다. 너는 오직 팔의 힘에 기대어 도를 휘둘렀기에 이렇게 흔들린 것이다. 이리 내 놓아라.”

호충은 손가락 두개로 류창의 손에서 거도를 빼냈다.

파악.

“큭.”

그리고 가볍게 거도를 손아귀에서 돌리다가 자세를 잡았다.

“진정한 직도황룡(直道黃龍)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샤악.

도가 언제 발출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도광이 만월을 그리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와아.”

“허.”

“···!”

“도는 점과 점을 면으로 이어서 초식을 그려낸다. 그러자면 시작점과 끝 점이 일직선상에 놓여야 하지. 그것이 가장 빠른 도의 길이다.”

다음은 횡소천군(橫掃千軍)이었다.

샤악.

“다른 초식도 다르지 않다. 어차피 점과 점을 이어서 초식이 발현되니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건 옆으로 휘두르건 가로질러 휘두르건 똑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단단한 하체가 아래를 받쳐주고 유연한 허리와 어깨는 도의 길을 따라 움직인다. 팔꿈치와 손목은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걸음마도 못 뗀 녀석이 변초와 허초는 배워 무엇 하겠느냐.”

샤악. 샤악. 샤악.

호충의 손에서 도광이 번뜩이며 주루의 내실을 비췄다. 호충의 도는 정직하면서도 강인한 흐름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그저 도광을 통해 도가 지나갔다는 것만 인식할 수 있었다.

“······.”

류창은 호충이 그린 아름다운 도광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받아라.”

호충은 류창의 거도를 던지고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거도를 받아든 류창은 나준이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대, 대형.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도를 쓰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왕호.”

“옙.”

“열심히 가르쳐라.”

“옙.”

“으하하하. 류창이 대형께 구배지례를 올리겠습니다.”

“어허. 류창. 순서를 지켜라. 저 나준이 먼저 절을 올리겠습니다. 대형.”

“구배지례는 무슨···. 됐고! 제대로 배우기나 해.”

“옙!”

술도 마시지 않으며 술자리를 더 이어간 호충은 뚱한 표정이었다. 왕호는 호충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음을 알아채고 얼른 물었다.

“대형. 이제 피곤하십니까. 수천리 길을 다녀오셨으니 쉬기도 하셔야지요.”

“대형께서 그리 멀리 다녀오셨단 말입니까?”

“저희가 괜히 대형을 붙들었나 봅니다.”

이 와중에 류창은 예전 송 영감에게 했던 것처럼 여자를 권했다.

“으흐흐. 여독은 여자로 풀어야 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류창의 말에 왕호와 나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너는 못하는 소리가 없느냐.”

“감히 존경하는 대형께···.”

“류창.”

호충의 부름에 류창이 살풋 긴장하며 대답했다.

“예, 옙. 대형. 제가 헛소리를···.”

“너는 진리를 깨우쳤구나. 어찌 그리 지혜가 가득한 말을 하는 것이냐. 여독을 여자로 풀어야 하는 법이라니···. 오늘 내가 진리를 들었도다. 어서 자리를 옮기자. 시커먼 놈들과 마주하자니 나까지 울적해지려던 참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대형!!!”

“물이 좋은 곳으로 가자.”

“제가 혼을 쏙 빼놓는 년들이 있는 곳을 잘 알지요. 꽃마차가 항시 대기 중입니다요.”

호충은 허리를 숙이고 손을 비비는 류창의 턱을 긁어주며 말했다.

“오호. 너는 볼수록 행실이 귀엽구나. 도법으로 대성하겠어.”

“더 예뻐해 주십시오. 대형. 히히히”

“······.”

“······.”

호충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던 왕호와 나준은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류창 녀석이 옳을 때도 있었구나.’

호충은 뒤를 따르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너희는 안 가냐? 아니면 나 혼자 가서 재미 본다?”

“가, 가야지요!”

“대형! 의제도 데려 가십쇼!”

이들은 점잔 빼는 군자들이 아니었다.

그날 호충과 흑패들은 기루의 뜨거운 밤을 제대로 맛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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