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문이 어디까지 난 거야
***
“저 자는 무림 세가의 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무공을 모른다?”
“······.”
이해불가인 것이 당연했다. 호충이 어찌 변명해야 상황을 모면할까 생각하는 사이 모용희가 마차 안 태자의 말에 대답했다.
“전하. 저 자는 진씨 가문에서 학문만을 배웠다 들었사옵니다. 가문에서 무공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허. 그것 참 괴이하구나.”
“가까이 부르시지요. 저는 저 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촌지간이지만 마주한 것은 처음이옵니다.”
“어이하여?”
“마치···. 직접 보셔야 하올 줄로 아옵니다.”
“흠. 가까이 오라.”
호충은 무릎걸음으로 마차를 향해 다가갔고, 관인들의 창날 앞에 멈추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다시 안에서 태자의 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라.”
호충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들었다.
“허. 희의 말이 맞았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겠구나.”
“감히 삿된 언행을 뱉을 수 없었나이다.”
“······.”
호충은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여차하면 목이 달아날 일이기 때문이다.
‘내 목이 베이기 전에 너희가 전부 죽겠지만···.’
위험이 닥치면 뭐든 못하겠는가. 무공을 드러내고 살육을 시작한다면 반 시진 내에 무공을 익힌 자들을 도륙 낼 수 있었다. 넉넉하게 한 시진이면 무인들 외에 황궁의 나인들까지 모두 도륙내고 시체로 산을 쌓을 수 있었다.
‘확실히 황궁은 상승 무공이 있다.’
태자를 지키는 관인들 가운데 고수로 보이는 인물이 몇 있었다. 하지만 호충의 상대는 아니었다.
‘화경에 오른 무인이 셋. 절정 급 무인이 다섯. 나머지는 잡졸이다.’
호충은 그들의 무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허. 저 자를 마차로 들여라. 대화를 나누고 싶구나.”
태자의 말에 곁에 있던 관인이 화들짝 놀랐다.
“전하!”
“무공을 모른다지 않는가. 아니면 그대가 확인하면 될 일.”
“충.”
화경의 고수인 황궁 무인이 호충의 팔을 잡아왔다.
‘네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을 터.’
황궁 무인은 호충의 몸에 내기를 넣어 혈을 자극했지만, 아무런 내공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신화경 말미의 무인이 경혼무흔(驚魂無痕)으로 감춘 내기와 무공을 어찌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이 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사옵니다.”
“거 보아라. 희가 거짓을 말하겠는가.”
“황공하옵니다. 전하.”
“가까이 보고 싶구나. 어서 마차로 들여라.”
“예. 전하.”
호충은 관인들의 팔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고, 허리를 바짝 숙인채로 마차로 올랐다.
“그대는 고개를 들라.”
“제가 어찌···.”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그대는 고개를 들어도 좋다.”
모용희의 말에 호충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낯이 익냐.’
호충은 처음 보는 황태자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도 괴이하냐? 나도 괴이하다 여기는 중이다.”
“아, 아니옵니다.”
얼른 고개를 숙인 호충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마치 면경을 보는 듯하구나.”
“!!”
호충도 그제야 태자의 얼굴이 자신과 많이 닮았음을 깨달았다.
‘뭐야. 왜 태자와 내 얼굴이 비슷하지?’
진가장의 가주인 진원우를 비롯해 형제들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어미가 다르니 그러려니 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닮은 사람을 만나고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진가장에서 받은 홀대가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혹시···. 정말 친자식이 아니었던 건가?’
자신은 진원우의 친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전에 셋째 어미에게 들었던 말도 떠올랐다.
[어찌 가주님 핏줄에 너 같은 것이 나왔을까. 근본을 모르는 여자의 아이를 들이신 것부터가 잘못이겠지.]
분명 근본을 모르는 여자를 들였다 하지 않고, 여자의 아이를 들였다 했다. 그렇다면 밖에서 아이를 낳고 진가장에 들어왔다는 말이 아닌가.
‘에이. 그래도 황실과 내가 연관이 있을 리가······.’
그렇다고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였다.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야 어디서든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다만 황제의 아들과 닮았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희와 유람하는 길에 이런 일도 생기다니 재미있구나. 어찌 이렇게 나와 닮았을까.”
“······.”
하지만 아무리 다시 고개를 들어 살펴봐도 자신과 닮았다. 환골탈태 이전이라면 형제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흠흠.”
호충은 모용희의 헛기침에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는 문(文)을 익혔다지?”
“한동안 문사가 되고자 수학하였사오나, 최근 가문에서 무공을 배우라 명하여 손을 놓았습니다.”
“어허. 역시 무림 세력은 어쩔 수 없구나.”
모용희가 태자의 말을 받았다.
“전하. 무림 세력이라 하여도 보잘 것 없는 무공을 가졌을 뿐이옵니다. 감히 황궁과 비기겠습니까.”
“그러니 더욱 아쉽지 않느냐. 황궁의 관인이 될 수도 있었던 동량이 결국은 보잘 것 없는 무(武)의 길을 가야한다니 말이다.”
“진씨 가문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 한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문에서 바라는 바를 행해야겠지요.”
“······.”
‘썅. 내 소문이 어디까지 난 거야.’
“밖의 인물들을 전에 만났다지? 자세히 말해보라.”
“예. 전하. 참혹한 일을 겪은 이들이옵니다.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산적으로 인해 저들이 따르던 대형이 나섰고, 온 힘을 다하여 산적의 행패를 막았사옵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대형인 한 씨가 산적의 칼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산적은 칼을 회수하지 못하여 목이 잘렸사옵니다. 한 씨의 고향이 어디인지까지는 듣지 못했으나, 이들이 한 씨의 고향에 장례를 치르러 간다고 들었사옵니다. 또한 산적은 목만 잘라서 가져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정이 안타까웠으나 도울 길이 없어 무척이나 상심했사온데, 오늘 이리 만나 저들의 사정을 증언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태자는 옆의 모용희를 돌아보았고, 모용희는 밖을 향해 물었다.
“사실과 일치하는가.”
“예. 한 씨는 머리에 칼을 맞은 것이 사실이옵고, 산적의 목을 제사상에 올리겠다고 하였사옵니다.”
“허허. 너의 말을 믿겠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앞뒤 다 따지고 믿기는 뭘 믿는단 말인가.
“희. 오해로 이들을 붙잡았으니 사례하고 보내주게.”
“예. 전하.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 제가 괜한 오해로 일을 키웠나이다.”
의심은 태자가 하였으나, 자신의 잘못인양 말하는 모용희였다.
감히 태자가 잘못하였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희는 현명한 부인이 될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모용희는 깊이 읍하고 호충을 향해 당부했다.
“전하를 뵈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발설하면 안 될 것이다.”
“가문에 돌아가서도 입을 다물겠습니다.”
소란이 끝나고 황실의 마차는 제 갈 길을 갔으며, 호충과 송 영감, 왕호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닥에 부복하고 있었다. 태자가 타고 있는 마차는 앞뒤에 호위 마차가 함께하고 있었고, 태자의 수행을 위해 따르는 많은 궁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마차들이 지나가는 데만도 한참이나 걸렸다.
“이제 가셨습니까?”
“아직 더 있어라.”
고개를 들려던 춘석도 호충의 말에 얼른 다시 바닥에 고개를 파묻었다.
한참이 지나고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충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신호였다.
“휴우.”
“아이고. 죽을 뻔했네.”
호충은 춘석을 보고 눈을 찡긋했다.
황궁의 인물들이 떠났지만, 언행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호충은 아까도 봤던 눈빛이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공자님 덕분에 저희가 살았습니다요. 마침 저희 마을을 지나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꼼짝 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요.”
“형님을 잃은 그대들이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작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
저 둘을 죽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대들은 어서 길을 가시오. 고향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더 남지 않았습니까.”
“예. 공자님. 공자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요. 덕분에 노자까지 생겼습니다요.”
호충은 가까이 다가가 춘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전음을 사용했다. 춘석은 귀엣말을 들었다고 여길 것이다.
[황궁의 무사가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너희는 오늘 하루 종일 허튼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우리도 어서 길을 가자. 오늘 지고한 신분의 귀인을 만났으니 좋은 일이 많이 생기지 않겠느냐.”
“예. 도련님.”
호충은 미련 없이 나귀를 몰아 길을 재촉했다.
“저···.”
왕호의 입이 열리려고 하자 호충은 얼른 발을 들어 툭 쳤다.
“갈 길이 멀다. 너는 주변이나 잘 살펴라.”
“······.”
호충의 눈짓에 아직 입을 열 때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호충의 기감에 한 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황궁 무사 하나가 남아 이곳을 주시하며 마지막까지 의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썩을 놈들. 하여튼 황궁의 의심은 끝이 없구나.’
호충은 한참이나 길을 걸은 뒤에야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갔다. 잠시 멈추고 쉬자.”
“···지금까지 감시했단 말입니까?”
“그래. 녀석이 감시를 풀고 떠난 지 이제 일다경이 지났다.”
“심장이 떨려 혼났습니다.”
“여기서 더 기다렸다가 묻어놓은 물건을 찾아오겠다.”
“···대형께서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무공을 숨기는 것 말이냐?”
“예. 황궁의 무사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다니요.”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하면 너도 이렇게 될 것이다. 황궁은 걱정할 필요가 없음이야.”
“흐흐. 역시 제 형님이십니다.”
“잠시 아까 그 산적패에게 다녀오겠다.”
“···진짜 산적이었습니까?”
왕호는 호충의 말이 사실인줄로만 알았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아까 춘석이라는 놈이 새로 천산채의 채주로 세웠다는 녀석이었다.”
“허. 눈도 깜짝하지 않으시고 거짓을···.”
“그럼 녀석들이 다 목이 잘릴 판이지 않느냐. 다행히 서로 신호가 맞아 들키지 않았다.”
“다음엔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무공을 사용할 수가 없는데 어찌 미리 말해주겠느냐.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있거든 눈치껏 행동해라.”
“어쩔 수 없지요. 뭐.”
“불이라도 피워놓고 있어.”
“다녀오십시오. 대형.”
“영감도 놀랐을 테니 불 좀 쬐고 있어.”
“예. 도련님.”
***
호충은 오춘석과 산적패가 떠난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해 근처에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탐색했다.
자신들을 지켜보던 녀석은 돌아갔지만, 산적패를 지킬 녀석은 아직 그대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없구나. 녀석도 갔어.’
호충은 불쑥 춘석 앞으로 나섰다.
“고, 공자님.”
“너희를 감시하던 눈은 사라졌으니 이제 마음 놔도 된다.”
“후아.”
잔뜩 긴장했던 놈들이 호충의 말을 듣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희는 어쩌다가 태자 전하의 일행을 만난 것이냐.”
“그 일이 있고나서 산채를 정비한 다음 떠난 참이었습니다. 시체까지 챙겨 가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는데, 휘황찬란한 마차와 관인들이 갑자기 나타났지요.”
‘태자의 유람 길에 마주치다니 녀석들은 운이 없구나.’
지독하게도 운이 없는 놈들이다. 황궁의 태자와 만난 것도 그렇지만, 자신을 세 번이나 마주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날 만났으니 그나마 살았지···.’
아니면 꼼짝 없이 목이 잘렸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