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32)

자장 복귀

***

“게다가 저희가 병장기를 휴대하는 터라 산적으로 몰릴 판이었지만, 마침 시체가 한 구 있고, 수급도 있어서 말을 지어내고 있었습니다요.”

“나도 멀리서 네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 했다. 네 덕분에 산채 식구들이 살았구나.”

“아닙니다요. 공자님이 돕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꼼짝없이 목이 잘렸을 테지요.”

“헌데 녹림으로 가면서 어찌 이렇게 대놓고 무장을 했느냐. 오늘처럼 관인이라도 만나면 너희 모두가 죽지 않겠느냐.”

“보통 이쪽은 관인이 다니는 길이 아닙니다요. 그리고 한 번씩 토벌대가 오는 시기가 되면 저희도 미리 연락을 받아 숨어 있으니 걸릴 일도 없었습쇼.”

“···너희도 참 열심히 산다.”

관에도 녀석들의 정보원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면 꼼짝없이 이렇게 걸려드는 것이다.

“녹림과 연줄이 없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녹림? 녹림에서 관과 내통하고 있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괜히 녹림이 지금까지 토벌되지 않고 남아 있겠습니까요.”

“······.”

무림 방파는 상승 무공을 익히다 걸려서 걸핏하면 멸문을 당했는데, 오히려 토벌의 대상인 녹림은 산에 숨어 관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녹림왕의 수완이 제법이군.”

“그래서 산채들은 녹림에 잘 보이려고 합니다요. 중원에 있는 모든 산채의 지주라고 할 수 있지요.”

‘나중에 녹림왕과 만날 날이 오겠지.’

호충은 녹림과의 인연이 훗날 이어질 것이라 짐작했다. 흑패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녹림은 물론이고 수로채와도 연을 만들어두어야 할 것이다.

‘녹림과 수로채 뿐이 아니라 무림의 모든 세력과 연이 생길 것이다.’

중원의 모든 흑패와 도박장, 기루를 접수하면 무림 세력과의 접촉은 피할 수 없었다.

“너희가 별일 없는지 살피러 왔다. 이제 편히 녹림의 본거지로 가거라.”

“녹림의 본거지는 저희도 사실 모릅니다요. 그저 접선지를 알고 그리로 가는 것이지요.”

‘녹림의 행사가 생각보다 더 철저하군.’

이제 오춘석을 볼 일은 없다 생각하고 묻어둔 짐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알았다. 이제 나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공자님.”

“응?”

춘석은 아까 관인에게 받았던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이. 그냥 인사하면 끝인 것을.”

“어차피 저희는 노자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되도록 관도를 멀리하고 산을 탈 것이니, 별로 쓸 일도 없지요. 저희 예를 받아주십시오. 공자님.”

“······.”

“오늘로 벌써 세 번째 만남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오늘은 저희 목숨까지 구해주셨지요. 저희 목숨 값이라 여기고 받아주십시오.”

“오 채주가 산채를 잘 꾸려가겠어.”

“허허허. 오늘처럼 운이 좋다면 녹림의 중요 산채 중 하나가 될 지도 모르지요.”

“좋네. 우선은 받아두지. 나중에 다시 만난다면 그때 내가 이 노자로 술을 사기로 하세.”

“감사합니다요. 공자님.”

“무운을 비네.”

“예. 공자님. 가시는 길 평안하십시오.”

호충은 천천히 고개를 넘었고, 산적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공을 발휘했다.

파앗.

***

호충은 대충 흙을 털어낸 짐을 챙겨 영감과 왕호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별일 없었지?”

“토끼를 잡았는데, 날붙이가 없어서 난감하던 차였습니다. 하하하.”

왕호의 손에는 토끼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

“맨손으로 재주도 좋구나.”

“그간 그렇게 굴렀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호충은 가져온 짐을 수레에 다시 올리고 단검 하나를 꺼내 왕호에게 던졌다.

왕호는 단검을 받아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나뭇가지에 꽂아 불에 올렸다.

“나는 주변에 굴이 있는지 찾아보겠다. 아무래도 오늘은 산중에서 자야할 듯하다.”

“예. 형님. 얼른 다녀오십시오.”

호충은 주변을 살피고 다시 경공을 발휘해 노숙할 장소를 찾으러 떠났다.

***

태자는 돌려보낸 두 일행을 감시하고 돌아온 황궁 호위무사에게 보고를 들었다.

“전하. 진씨 가문 일행은 태자 전하를 알현하고 귀인을 만났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전하. 마을의 인물들은 황궁에서 노자를 받아봤다며 평생의 즐거움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정녕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허나 마을의 녀석들은 저희가 봐도 분명 산적패의 행색이었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우락부락한 몸에 저마다 얼굴에 흉터가 있었사옵니다.”

모용희는 다시 지나간 일이 문제가 되기 전에 나섰다.

“산적이 내려올 정도로 산과 가까운 마을이라면 산짐승과도 자주 마주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험한 산을 오르내려야 했을 터이니 나뭇가지와 돌부리에 상처가 생겼을 것이옵니다. 먼 마을에는 관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니,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겠지요. 그들이 병장기를 휴대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사옵니다.”

“역시 희의 생각은 참으로 깊구나.”

“망극하옵니다. 전하.”

“모용가의 인척 덕분에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그 아이가 관인들의 창날을 앞에 두고 얼마나 겁을 먹었겠느냐. 그런데도 녀석은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증언하였다. 실로 의기가 충만한 아이였다. 하사품을 내릴 터이니 희가 진씨 가문의 아이에게 전하라.”

“예. 전하. 전하의 하해와 같은 덕이 만방에 알려질 것이옵니다.”

태자는 관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본심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목이 잘리는 놈들을 볼 줄 알았더니 아쉽게 됐군.”

아비에게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지만, 태자의 몇 없는 취미생활이 바로 인간의 목을 자르는 일이었다. 태자는 가끔 살기가 충천하는 때가 있었고, 이때는 어떻게 해서든 피를 봐야만 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람을 하다보면 황실에 예를 벗어나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옵니다.”

“그럼 다음엔 희가 나서지 않는 것인가?”

“그래도 인척이라 하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다음엔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그대는 언제나 나의 뜻을 반기니 내 어찌 어여쁘게 여기지 않겠는가.”

“······.”

태자의 손은 모용희의 몸을 더듬고 있었고, 모용희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거친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차를 멈추고 모두 십장 밖으로 물러서라.”

“예. 전하.”

자주 있었던 일이었는지, 관인들과 궁녀들은 빠르게 물러섰다.

이후 마차 안에선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드디어 자장에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허허허.”

“천수보다 조금 크네요.”

“그래도 고향이라 그런가? 쪼오금 반갑네.”

호충 일행은 자장에 도착해 진가장이 아니라 먼저 흑패의 본거지로 향했다. 그 전에 송 영감은 객잔에 잠시 남겨둔 채였다.

“사중환.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크흐흐.”

“무탈하게 다녀오셨습니까. 공자님. 그런데···. 언제 이렇게 크셨답니까.”

훅 자란 호충의 신장 덕분에 올려다보는 사중환이다.

“밖에서 고생했더니 이리 되더라. 그보다 자장엔 별일 없었나?”

“별일이라면 있었습니다.”

“응? 뭐지?”

“진가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흑패의 일이 아니면 신경 쓰지 마. 진가장이야 항상 바쁘지.”

“하지만 진가장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산서(山西)로 진출하려는 모양입니다.”

“산서? 거긴 무림 방파나 세가가 없긴 하지만, 함부로 움직이면 견제가 있을 터인데···.”

“진가장이 의미 없이 움직이진 않겠지요. 이미 계산이 섰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정무맹과 협의맹이 회합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뭔가 얘기가 오간 모양이군.’

호충도 두 무림맹의 회합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진가장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협의맹이 이번 회합에서 상당한 우위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진가주는 능구렁이처럼 이익만 취했을 것이고, 실질적으론 협의맹 맹주인 당세천이 앞장섰을 것이다.’

호충은 정무맹과 협의맹 회합에 가지 않았음에도 대강의 흐름을 추측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우리 흑패도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준비가 되어야 해.”

“예. 공자님. 헌데···. 같이 온 이 분은 누구 십니까?”

왕호는 호충에게 바짝 붙어서 고개를 바짝 들고 있었다.

“이쪽은 천수 흑패의 패주인 왕호다.”

“!”

“왕호. 이쪽은 자장 흑패를 맡고 있는 사중환이다. 서로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라.”

“······.”

“······.”

둘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무공 수위를 탐색했다.

흑패의 정점에 선 두 남자가 만났으니 필연적인 일이었다. 잠시 번뜩이는 시선을 교환한 둘은 서로가 잘났다며 자신을 드러냈다.

“자장 흑패 사중환이오. 진 공자님의 오른팔이지.”

“왕호요. 나는 대형의 의제요.”

왕호의 말에 사중환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

“크흐흐. 오른팔보다는 왼팔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겠소?”

호충의 의제라는 허울은 사중환을 깔아뭉개고도 남았다.

하지만 호충은 왕호의 거들먹거림을 두고 보지 않았다. 사중환 또한 앞으로 흑패에서 요직을 차지할 인물이었다.

“왕호. 사중환과 형제의 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중환을 의제로 여기고 있다. 게다가 사중환을 먼저 만났으니 네가 더 잘났다고 생각할 것 없어.”

사중환은 호충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공자님! 저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항상 마음속으로 공자님을 주군으로 여기고 있었나이다!”

“대형!”

“사중환만이 아니다. 도박장을 맡은 옥비연 녀석도 마찬가지다. 나는 녀석을 크게 신뢰하고 녀석도 동생으로 여긴다. 왕호. 너는 네 대형의 품이 너 하나만 품을 정도로 작았으면 좋겠느냐?”

“···대형의 품은 너무 넓지요.”

“앞으로 더 많은 형제들이 생길 것이다. 우리 흑패는 고작 자장과 천수에 머물지 않고 중원 전부를 집어 삼킬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마음을 넓게 가져라.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동생들이 생길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서로를 견제하면 내홍만 키울 뿐이다.”

“예. 공자님.”

“예. 대형.”

호충은 둘의 신경전을 가볍게 찍어 누르고 앞으로 할 일을 지시했다.

“사중환.”

“예! 공자님.”

“왕호를 보고 이미 짐작했겠지만, 내가 천수 흑패를 접수했다.”

“흐흐. 공자님의 번권은 감히 이겨날 자가 없지요.”

사중환은 직접 맞아봐서 잘 안다.

“천수 흑패에 무공을 익힐 기반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자장 흑패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고절한 무공을 전수할 것이니 지금부터 무공을 익힐 몸을 만들어라. 흑패의 조직원뿐이 아니라 기루의 기녀들과 도박장에서 일하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고절한 무공이라면···. 진가장의 무공입니까?”

왕호도 호충이 가져온 무공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모르기에 호충을 바라봤다.

“진가장의 허접한 무공을 어디에 쓰겠느냐. 내가 앞으로 너희에게 하사할 무공은 황궁에서도 감히 얻지 못할 상승 무공이니라.”

“!!”

호충은 짐에서 무공서를 꺼내기 시작했다.

“강력한 도법인 파산도법(破散刀法)은 직접적인 무력을 담당하는 흑패의 조직원이 익힌다.”

류창에게 익히라 했지만, 앞으로 많은 흑패 조직원이 익혀야할 기본 무공이었다.

“빠르고 은밀한 비도술인 류상비도(柳狀飛刀)는 도박장에서 일하는 조직원이 익힌다. 굳이 나눠서 말했지만, 둘 다 익혀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준이 익힐 류상비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절한 음공(音功)인 강산곡(江山曲)은 기녀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것이다.”

기녀를 위해 준비한 강산곡은 기녀들이 연주할 모든 악기에 대입해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경공술은 모든 흑패 산하의 조직원이 익혀야 하며···.”

“고, 공자님. 이러다가 저희 다 잡혀 들어갑니다.”

사중환도 왕호와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도 탐할 고절한 무공이라면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형을 믿으시오. 형제.”

“······.”

사중환은 왕호가 입에 담은 형제라는 호칭에 잠시 굳었다가 얼굴을 풀며 답했다.

“···제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습니까. 말을 끊어 죄송합니다. 듣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무공과 내공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줄 잠룡진(潛龍陣)이라는 무공은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이다.”

“아! 그것이 바로···.”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림의 최대 세력이 될 것이다.”

“!!”

“!!”

이후 호충은 왕호와 사중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장 진가장에 들렀다가 화산이 있는 화음(華陰)으로 가야했기에 호충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사중환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있었다.

“사중환. 네게 줄 무공은 따로 있다.”

호충은 옥비연과 사중환을 위해 마련한 비급을 꺼냈다.

“화가창법(樺家槍法)은 오래전 멸문한 화가의 가주전용 무공이다. 너는 철필을 사용하니 네게 잘 어울릴 것이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또한 옥비연을 위해 준비한 비급도 꺼냈다.

“또한 옥비연을 위해선 황룡살도(黃龍殺刀)를 준비했고, 이미 왕호에겐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을 내렸다. 너희에게 내린 무공은 너희만을 위해 준비했지만, 이후 우리의 형제들이 늘어나면 그들에게도 이 비급이 허용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온 힘을 다해 익혀야 한다. 나중에 우리와 함께하는 형제가 너희를 뛰어넘으면 너희가 고개를 들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지요!”

“맞습니다.”

호충은 둘에게 공통의 경쟁자를 만들어준 셈이다. 덕분에 둘은 있지도 않은 경쟁자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저희는 공자님과 흑패를 일으킬 핵심입니다. 절대로 자리를 내주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절대로 밀려나지 않을 겁니다.”

“옥비연을 불러서 내가 한 말을 전해라. 나는 바로 진가장에 가봐야 한다.”

“다녀오십시오. 공자님.”

“그럼 저는 그간 공자님께 배운 기초 무공을 사중환 형제에게 전수하겠습니다.”

“앞으로 생길 형제뿐이 아니다. 너희 밑에 있던 우리 조직원들도 치고 올라올 것이다. 자리를 지키려거든 없는 시간을 쪼개어 무공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호충은 당장 화용루로 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어 진가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진아. 내일 보자. 내일 더 예뻐해 주마.’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