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액
***
호충은 진가장에 돌아가서 가주전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이 안 간단 말이지.’
핏줄은 땡긴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번에 태자의 얼굴을 보고 진원우가 아비가 아닐 거라는 의심이 자꾸만 커지고 있었다.
“가주님께 문안도 드리지 않으신다고요?”
“어차피 나한테 관심도 없는 사람인데 인사는 해서 뭐해?”
호충은 진가장에 돌아왔지만, 그냥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도 돌아왔다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한 겨울에 집을 비우고 세상을 떠돌다가 이제야 돌아오셨는데···.”
“어차피 궁금해 하지도 않을 거야. 영감은 가서 총관에게 내가 돌아왔다는 말이나 전해줘.”
“······.”
“영감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어차피 이 집에서 난 그 정도 위치야.”
“공자님이 가진 무공을 드러내면···.”
“누구 잡을 일 있어? 내 무공이 드러나면 진가장은 그날로 멸문인데?”
“!!”
“입이나 조심해. 내가 영감이나 흑패에 모든 것을 보이지, 여기선 어림도 없어. 진가장엔 아무것도 알리지 않을 거야.”
“도련님···.”
“나이도 이제 성인이야. 화산에 가면서 짐을 뺄 생각이야. 그러니까 영감도 진가장에 미련 갖지 마.”
호충은 이번 화산행이 자신이 화산으로 내쳐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가장의 누구도 자신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저는 오직 도련님뿐입니다.”
“나도 그래. 영감만 같이 가면 나도 여기에 미련 없어.”
진가장 안에서 호충이 아끼는 인물은 송 영감이 전부였다.
“사마 총관에게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입을 무겁게 하지요.”
“그래도 오는 길에 태자 전하를 만난 사실은 알려줘.”
“네? 그건 발설하면 안 된다고···.”
“괜히 내가 숨겼다는 것을 나중에 알면 문제만 될 거야. 첫째 형님은 나중에라도 알 수 있으니 지금 얘기해야 해.”
“예. 도련님. 그럼 사마 총관에게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중간에 만난 놈들은 산채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었다. 알았지?”
“예. 도련님. 물론입지요.”
송 영감이 총관에게 간 동안 호충은 거처에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
송 영감은 총관을 만나기 위해 총관이 일하는 전각을 찾았다.
“무사님. 안에 기별을 부탁드립니다요.”
“···총관님을 뵈러 왔는가?”
“예. 사 공자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허. 언제부터 총관님이 사 공자의 말을 전해 들었지?”
“······.”
송 영감은 호충이 괜히 이곳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지금의 처우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진가장에선 도련님의 자리를 기대할 수 없겠구나. 도련님이 진가장에 무공을 전하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하다.’
“사 공자께 가서 직접 오시라 전해라.”
“난 뵈어야겠소. 총관께 가서 내가 왔음을 전해주시오.”
“허. 지금 네가 내게 명령하는가!”
고작 총관의 집무실을 지키는 무사일 뿐이지만,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그대가 무사할 것 같소?”
“무사하지 않으면?”
“좋소. 돌아가리다. 날 원망치 마시오.”
“하! 이제 종복 따위가 날 무시해?”
.
.
.
이후 송 영감은 호충의 거처로 돌아왔고, 호충은 송 영감의 얼굴을 보자마자 꼭지가 돌았다.
“···총관 놈의 짓이냐?”
“···아닙니다. 총관은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입구에 있던 무사에게 맞았습니다.”
송 영감의 얼굴 한쪽에 빨간 손바닥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사의 이름은.”
“백천우라 합니다.”
“같이 가자.”
“예. 도련님.”
호충은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자꾸만 속에서 열불이 났다.
‘가봤자 무시나 당하리라 여기고 송 영감을 보낸 내 잘못이 크다. 하지만 나를 대신한 종복에게 손찌검을 해?’
호충의 발걸음은 금방 총관의 전각에 도착했다.
“진즉에 데려왔으면 좋았···.”
호충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무사의 앞까지 갔다.
‘적당히 끝내지 않을 것이다.’
“네가 백천우냐?”
“공자. 나는 진가장의 동(銅)급 무사요. 게다가 첫째 공자님의 휘하에 있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내 종복에게 사과해라.”
“풋. 지금 뭐라고 하시었소?”
“네가 나의 종복에게 손찌검을 했다 들었다. 이는 곧 나를 무시한 처사다. 사과해라.”
“못하겠소만.”
“그럼 검을 뽑아라.”
“···지금 나와 뭘 하자는 거요.”
무사는 여전히 태연했고, 오히려 호충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무기가 없어 맞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으니 꺼내라는 것이다. 나는 오늘 네게 예의를 가르치려 한다.”
“하. 이거 오늘 웃기는 소리를 듣는···.”
슈각.
호충의 품에서 뽑힌 회칼이 무사의 앞 머리칼을 자르고 돌아왔다.
잘린 머리칼 끝이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뽑아라.”
“감히···.”
스르릉.
“검에는 눈이 없소.”
“너는 눈이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구나. 네 검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익!”
무사는 검을 들었음에도 우선 주먹을 날렸다. 그래도 가주의 아들이기에 살수를 피한 것이다.
타닥.
호충은 백천우의 주먹을 밖으로 쳐내며 비아냥거렸다.
“아주 춤을 추지 그러나.”
“젠장.”
무사의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녀석은 중심을 되찾자마자 다시 발을 들어 정직한 투로를 그렸다. 호충의 눈에 녀석의 빈틈이 수도 없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진양의를 통해 초고수인 스승들과 접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호충의 손발은 자연스럽게 녀석의 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퍽.
“읍.”
우선 올린 발의 허벅지 안쪽에 뾰족한 주먹을 찔러주고 회수되는 발을 따라 품을 파고들었다.
호충의 양 주먹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연습한 연환권의 준비 자세에 돌입해 있었다.
두두두두두.
“커흑.”
세기 힘든 권이 녀석의 몸에 적중하였지만, 여전히 녀석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녀석의 화를 돋우기 위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이래도 검을 들지 않을 생각이냐?”
“흡!”
그제야 녀석은 검을 들어 진가장 무사들이 익히는 검식을 그려냈다.
핏.
호충의 귓불이 검 끝에 걸려 핏방울이 튀었다. 살기가 넘치는 검이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호충은 무사의 검이 공격을 가할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 피하며 방어했다.
“죽어!!”
“이크.”
‘이쯤이면 되겠다. 보는 눈도 생겼고···.’
총관이 업무를 보는 곳이라 수시로 오가는 사람이 생긴다. 호충은 무사가 검을 들고 공격했다는 것을 증언해줄 증인이 필요했다.
무사의 검에 뒤로 밀리기만 하던 호충은 뒷발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나섰다.
샤각.
머리칼이 잘리며 안으로 파고든 호충은 전사경을 준비했다.
슈욱. 빠각.
“끄아악.”
쨍그랑.
오른쪽 어깨에 작렬한 호충의 권은 무사의 손에 든 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호충의 왼쪽 발은 바닥에서부터 크게 회전하고 있었다.
퍼억.
왼쪽 발등이 녀석의 오른쪽 턱과 어깨에 박히며 녀석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골이 흔들리며 기절한 것이다.
털썩.
호충은 분이 풀리지 않아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공을 차듯이 날려버렸다.
뻐억. 후두득.
녀석의 이빨 몇 개가 하늘로 비산했다.
“이 녀석은 깨면 다시 봐야겠군. 아직 가르침이 부족해.”
벌컥.
밖에서 일어난 소란에 사마충이 뛰쳐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총관의 전각을 지키는 무사가 내게 검을 빼들어 교육 중이었습니다.”
“검을 빼들었단 말입니까? 백 무사가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 노복을 이유 없이 때린 무사입니다. 내가 총관에게 말을 전하라 시켰거늘 구타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호충은 송 영감의 어깨를 잡아 총관의 면전에 들이댔다.
“총관님이 날 보는 걸 탐탁지 않아하여 내 일부러 종복을 보냈거늘, 내게 직접 오라 하더이다. 이리 예의가 없는 무사이니 내가 예의를 조금 가르쳤을 뿐이오.”
“내가 언제 공자를 보는 것이 탐탁지 않다 하였소.”
“그야 내가 그리 느꼈으니 그리 말한 것뿐이오.”
“하!”
“그래서 아니란 말이오? 좋소. 아니라고 칩시다. 하지만 내게 검을 뽑아든 저 녀석을 혼내준 것이 잘못이오?”
“······이유가 있었을 것이오.”
“무사는 이유가 있어서 검을 빼들었을 것이고, 나는 이유 없이 무사를 때렸다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 그건···.”
“당장 대답하시오!!”
“!”
호충이 크게 화를 내자 사마충 총관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 녀석이 어디서 뭘 잘못 먹고 돌아왔기에···.’
“총관의 답을 듣고 가주님께 가서 묻겠소. 내게 검을 들이민 무사를 혼내준 것이 문제라면 내 달게 벌을 받으리다.”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겠소. 거처로 돌아가시오.”
하지만 호충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사마 총관. 당신은 말귀를 못 알아듣나?”
“뭣이오!”
“방금 연유도 듣지 못한 총관이 무사를 두둔한 이유를 대라 했다. 같은 질문을 또 해야 하는 가.”
“예의를 지키시오! 아무리 가주님의 아들이라도 내게 이리 대할 수는 없소!”
“그럼 다시 묻지요. 사마 총관님. 연유도 모르면서 백 무사가 옳고 내가 그르다한 이유를 말씀해주시지요.”
“지금 내게 농을 하고 있으시오?”
“큭. 대체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해야 답이 나올지 모르겠군.”
“백 무사는 진가장의 동급 무사로 이유 없이 검을 들지 않도록 교육되어 있소!”
“그럼 나는?”
“사 공자는···.”
“나 또한 진가장의 식솔이다! 헌데 내가 이유 없이 진가장 소속 무사를 해하였겠는가! 어찌하여 가주의 아들인 나는 총관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가!!”
“······.”
오해는 분명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를 알기도 전에 무사의 편을 든 것은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이 호충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해한 흉수를 진가장 무사들이 잡지 못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총관이 나를 무시해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아니다. 나는 예를 다하고 총관의 바쁜 사정까지 생각하여 일부러 걸음하지 않았거늘, 진가장의 무사는 내 종복에게 손찌검을 했고, 사과를 바라는 내게 검을 뽑았다. 또한 총관은 이유도 듣지 않고 무사를 두둔했으며, 여기까지 걸음 하여 횡액을 당한 내게 호통을 쳤다. 내가 대체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가!”
“···더 소란을 피우지 말고 돌아가시오.”
“큭. 총관의 할 말은 그것이 전부요?”
“앞으로 쓰실 일이 없는 활동비는 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총관은 자신이 가진 무기를 보였다.
“큭큭. 그거 말고 또 해보시오. 뭐가 있을지 궁금하군.”
“매 식사를 비롯해 종복의 봉급도 알아서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또 있는가? 내 거처는 그대로 두는 거요?”
“···없소.”
진가장 가주의 아들을 집밖으로 내칠 수야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가주의 허락이 필요했다.
“내가 받은 것이 없으니 얼마나 속이 편한지 모르오. 총관은 뜻대로 하시오. 그리고 첫째 형님께 내가 화산으로 갈 터이니 걱정 말라 전해주시오.”
진가장은 산서로 진출하며 첫째 호현과 둘째 호중을 파견했다. 진가장에 없기에 말을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일은 당연히 해야 할 터.”
“큭큭. 그리고 내가 밖에서 외유하는 길에 누굴 만났는지 아오?”
“그걸 내가 왜 궁금해 해야 한단 말이오?”
“황태자 전하와 곧 전하의 배필이 되실 마마를 뵙고 오는 길이라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