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1
***
“···거 고마운 사람이네.”
“예?”
“덕분에 내가 영감과 할멈을 만났잖아.”
“허허. 그래서 작은 봇짐만 들고 거리로 나섰는데, 마님께서 황망히 서있는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저희 사정을 딱히 여기시고는 앞으로 자신의 종복이 되라 하셨지요. 관인의 적에 올라있는 저희였는데, 그 일까지 일사천리로 해결하셨지요.”
‘관부 일을 쉽게 처리해?’
여성이 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충은 그 방법을 추측할 수 없었다. 모친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길을 떠나 이곳 자장까지 왔고, 마님과 진가장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과의 차이는?”
영감은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하고 답을 하지 못했다.
“······.”
“진가장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태어났을 거야. 그렇지?”
“···아, 아마도 마님과 가주님은 전에도 인연을 맺고 계셨을 것이옵니다.”
“둘 사이의 일은 모른다 이거야? 하지만 난 진가장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태어났고, 영감과 할멈을 만나기 전에도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날을 따져보면···. 도련님 말씀이 옳습니다.”
“흐음.”
‘내가 진원우의 아들이 아닌 것은 이걸로 확실해졌어.’
이미 진원우의 태도로 짐작했던 일이다. 오늘의 대화는 그에 대한 확인일 뿐이었다.
‘진원우는 어머니의 미모에 혹해서 진가장으로 들였을 거야. 둘째 호중을 보면 호색한 기질도 있는 것 같고···.’
이제 누가 어머니를 살해했는지가 남았다.
‘당시 진원우에겐 이미 세 명의 부인이 있었고, 그 셋은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하지.’
서로를 싫어하는 것도 그렇지만, 어미도 없는 호충에게 보이는 적개심을 보면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향해 보였을 적개심도 짐작할 수 있었다.
‘셋의 미모를 다 더해봤자 어머니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충분히 죽이고 싶었을 거야.’
여자들의 질투심은 기이할 정도로 극한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음을 알고 있었다.
‘용의자는 셋. 그리고 호색한 진원우까지 더하면 넷.’
진원우는 당시에도 진가장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대공자의 위치에 있었다. 혹여 세 명의 대부인 중 하나가 어머니를 살해했다면 그 사실을 파악했을 것이기에 공범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지아비를 기다린다는 선택지를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진원우를 선택했다고 가정하면···.’
진원우가 어머니를 무슨 말로 꼬여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머니는 진원우와 합방하는 일이 없었다. 몸만 진가장에 들어왔지 진원우와 남처럼 지낸 것이다.
‘세 부인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으니 쉽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종복들을 멀리 보내고 외출까지 시킨다면?’
호충은 진양의를 동원하여 당시의 사건을 추측하고 있었다.
‘합방을 거절하는 어미에게 살수를 날릴 수도 있는 녀석이다.’
호충이 생각하는 진원우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의 자식들을 보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고 무공도 뛰어나지만, 냉혹한 마음을 가진 첫째 호현.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막내 동생을 죽이라 사주한 둘째 호중.
자존심이 강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호성과 호란.
각자 어미의 핏줄도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가주 진원우의 성정도 이와 다르지 않음이다.
“영감 덕분에 속이 후련하네.”
“···도련님.”
“덕분에 진가장을 떠나는 발걸음이 더 가벼워졌어.”
“짐을 챙겨놓겠습니다.”
“영감은 오늘 짐을 챙겨서 흑패 본거지로 가. 집에는 돌아오지 말고.”
“예?”
“내일 가주께 보고하고 어머니 묘에 갔다가 바로 화산으로 향할 거야. 영감이 남을 필요 없어.”
“······.”
“그 무사와는 문제 안 일으키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약조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 짐도 얼마 안 되니까 수레에 올려서 한 번에 가면 되겠다.”
“···정말 떠난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몰라도 영감이 여기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야.”
“여비를 받아놔야겠군요.”
“여비는 신경 쓰지 마. 오늘 총관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앞으로 한 푼도 안준다고 하잖아.”
“그럼 태자저하께 받은 주머니라도 돌려받아야지요.”
“아차. 그걸 그냥 주고 왔네. 알았어. 그건 내일 받아가지.”
“그럼 저는 짐을 정리하겠습니다.”
호충은 짐을 챙기는 영감을 보며 내일의 일을 계획했다.
‘내일은 참 재미있는 날이 되겠구나.’
호충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다음날 호충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우으으으아아아. 상쾌한 아침이네.”
오늘이 너무 기대되어 늦은 밤까지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새벽녘에 누워 한시진도 잠들지 않고 일어났지만, 몸은 더없이 가뿐했다.
“그럼 진원우 새끼한테 먼저 가볼까?”
아비가 아닌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남이었다.
호충은 텅 빈 방에 외롭게 걸려있는 자신의 의복을 걸치고 밖을 나섰다.
날이 우중충한 것이 곧 눈이 내릴 것 같았다.
“날씨도 참 좋네.”
우중충한 날씨도 진가장을 떠난다 생각하니 좋게만 느껴졌다.
호충의 상쾌한 기분은 딱 가주전 앞까지만 이었다.
“기다리시지요.”
“어.”
“······.”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저도 가만히 있었다.
“뭐해? 들어가서 막내 공자가 왔다고 전해야지.”
“···오신다는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일이 끝나시면 보고드릴 터이니 돌아가서 기다리시지요.”
“큭.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가주전의 무사는 어제 총관의 동급 무사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들었을 것이다.
무사들이 호충에게 그에 대한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가주님 안 봐도 괜찮아. 나중에도 말 할 것 없어.”
“······.”
“대신 책임은 네가 지는 거다. 알았지?”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다. 저는 어제의 무사와 다릅니다.”
호충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래? 은(銀)급 무사님이셨어?”
“금(金)급입니다.”
동(銅)급 무사는 보통 이류에 올라선 무사들이었고, 은(銀)급 무사는 이류 끝자락에 걸쳐있었다. 금(金)급 무사의 경우 완연하게 일류에 올라서야 가능한 등급이었다. 호충은 눈앞의 무사가 가진 무공이 이류와 일류 사이에 존재함을 알아보고 있었다.
“흐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연줄로 올라갔나? 손바닥 지문은 남아 있냐? 싹싹 비비느라 닳아 없어졌겠는데?”
“···제게 시비를 걸고 싶으십니까?”
“건다면?”
“제게도 검을 뽑으라 하시지요.”
“어제 그 새끼 쥐어 팼다가 내 활동비가 싹 사라졌거든? 널 패도 이제 잃을 게 없어.”
“그럼 더욱 잘 됐군요. 검을 뽑아도 되겠습니까?”
호충은 무사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어제 그 놈이랑 사귀냐?”
“이익!”
“어제 애인의 일은 미안하게 됐어. 내가 큰맘 먹고 사과할게.”
“······.”
검병(劍炳)에 손을 올린 녀석의 손이 화를 참아내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진가장의 무사를···. 모욕하지 마시오.”
호충은 녀석의 잔뜩 깔아진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진가장의 직계인···. 나는···. 얼마든지 모욕해도 좋다. 크흐흐.”
녀석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빼들었다.
챙.
그때 호충이 크게 소리쳤다.
“가주님! 막내아들이 아침 문안인사 왔습니다아아아!!”
무사는 깜짝 놀라서 검을 회수했다.
“큭. 왜 더 해보지.”
“비겁···.”
“오늘만 날이 아니잖냐. 좋은날 왜 피를 보게 하려고 그래.”
“······.”
부들부들 떨며 화를 참아내는 모습에 호충은 한 마디 더 보탰다.
“밖으로 나오면 내가 상대해 줄게. 알았지?”
“···그게 언제요.”
“한 십 년만 기다려. 그때는 나도 대충 금(金)급에 도달할 것 같으니까.”
“허!”
“넌 절정을 넘어서 골방에 틀어박혀야 하려나? 아니지. 연줄로 무공이 올라가진 않으니 넌 그때쯤에나 일류일 수도 있겠어.”
“이익!!”
녀석의 화가 다시 폭발하기 전에 여동이 나와 말했다.
“사 공자님. 가주님께서 들라하십니다.”
“어. 가지.”
호충은 얄밉게 손을 흔들며 여동을 따라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불초소생이 가주님께 아침 문안인사를 올립니다.”
호충의 얼굴은 어제와 달리 환히 미소를 보이고고 있었다.
“···오냐.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어제 보여드린 증거품을 회수하기 위함입니다. 태자저하의 주머니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돌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진원우는 멀뚱히 호충을 보고 있었다.
“·········.”
“총관에게 활동비를 제한 받은 터라 화산으로 가는 여비도 부족합니다. 그 돈이라도 있어야 화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문안은 화산으로 가기 전 마지막 인사이기도 하지요.”
앞으로 또 볼일이 있을까 싶은 호충이다.
“···주마.”
진원우는 내준다고 말만하고 가만히 호충을 보고 있었다.
“언제 주려고 하십니까.”
“···태자저하께 받은 금자는 함부로 쓸 수 없다. 총관에게 일러둘 터이니 따로 여비를 받아가라.”
“총관은 안준다고 했기에 가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줄 것이다.”
“그럼 안에 들어있던 금자가 오십 냥이었으니, 백 냥을 청구해도 되겠지요?”
금자 백 냥은 금원보 하나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어찌 계산이 그리 되느냐?”
“황궁에서 나온 금자가 어찌 저잣거리의 금자와 같겠습니까. 족히 세 배는 받아야 하나 선심을 써서 백 냥만 청구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허. 선심?”
“제가 진가장 직계인데 다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비는 따로 받아야겠지요. 중요한 일을 하는데, 돈을 아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일은 무슨···. 근래 진가장에 가용자금이 여유롭지 않다. 괜한 일에 돈을 낭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백 냥만 받아서 가지요.”
“차라리 저하께 받은 주머니를 돌려주마.”
“그건 함부로 못 쓴다하지 않으셨습니까.”
“진가장의 자금을 낭비하는 것보다야 낫다.”
“진가장에 중요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진가장은 산서(山西)에 진출하느라 모든 가용자금을 끌어다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덕분에 호현과 호중까지 산서로 달려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호충에겐 알려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화산에 가서 화산파의 도인들과 안면만 익히면 그만이다.”
“제가 시키는 일은 확실하게 합니다. 맡겨주십시오.”
호충이 할 일은 그저 진가장의 직계를 보냈다는 명목상의 친분과 이후에 이어질 무공의 수급이 전부였다.
“너는 화산파(華山派)에서 전해주는 물건이 있다면 화음(華陰)으로 내려와 진가장에 보내면 된다.”
화음은 화산파의 영역이었지만, 진가장의 표국이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요.”
“어차피 너도 때가 되면 알 것이다. 미리부터 알 필요 없다.”
호충은 예전 호현에게 들었던 말로 이미 진가장의 행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진강이십사검(眞强二十四劍)으로 바꾸자면 화산파(華山派)의 기본 무공이 기반이 되어야겠지. 금력으로 화산의 무공을 사들인다는 생각은 참으로 잘 하시었소.’
호현에게 듣지 못했음에도 정확하게 앞으로의 일을 그려내고 있었다.
“제가 혹시 헛소리를 할 수도 있으니, 가주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이거나 도로 가져가라.”
진원우는 태자가 줬던 금자 주머니를 꺼내 앞으로 던졌다.
툭.
‘가까이 와서 가져가라 하면 될 것을···.’
호충은 자신의 발아래 던져진 주머니를 주워들며 말했다.
“···아껴서 쓰겠습니다. 지금 바로 길을 떠나 화산으로 향하겠습니다.”
호충은 진원우가 꺼내주는 주머니를 받아 조심스럽게 가주전을 나섰다. 호충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주전의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돈이 없다? 없을 리가 있는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꺼내지 않는 돈은 있기 마련이거늘···.’
그리고 밖에 서 있는 무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금(金)급 무사라고 했지?”
“······.”
호충은 대답도 하지 않는 무사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그 놈의 이름이 백천우라고 들었다. 네 이름도 알고 싶구나.”
“여전히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 군.”
예전엔 항상 존대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큭. 예전엔 내가 잠룡(潛龍)을 흉내 냈던 터라···.”
“풉. 잠룡?”
호충은 비웃음을 들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름이나 말해봐. 내가 나중에 널 찾아오려면 이름은 알아야지.”
“나는 진가장의 가주님 직속 진천(眞天)대 소속 금급(金級) 무사 황종현이다. 또한 내가 진천대의 대주다.”
진천대의 대주가 바로 황종현이었다.
“이름 하나 얘기하는데 뭐가 이렇게 길어? 어이. 황씨. 또 보자고.”
호충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고, 황종현은 호충의 뒷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공을 익힌 무인은 걸음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저렇게 불규칙적인 걸음을 보인다는 것은 최소한의 기초도 없다는 뜻이었다.
‘무인의 걸음이 아니다. 어찌 저런 놈에게 얻어터졌단 말이냐!’
황종현은 호충이 아니라 동급 무사인 백천우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새끼는 자리만 털고 일어나면 바로 특훈 확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