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32)

수금할 시간

***

가주전에서 산서(山西) 진출에 관한 보고를 읽던 진원우는 급하게 들어온 총관으로 인해 업무를 멈춰야 했다.

“가주님! 셋째 공자님이···.”

“셋째가 왜.”

“막내 공자께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 합니다.”

“···막내에게 맞아?”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호충에게 맞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하옵니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건 총관이 직접 보았는가.”

“셋째 마님의 처소에서 전달 받았습니다.”

“······.”

과장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셋째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진가장에서 중부전장의 자금을 융통한 것이 얼마인데···.’

진가장이 산서(山西)로 진출하며 부족한 자금은 모두 중부전장에서 융통했다. 셋째 아내인 방자연은 중부전장의 금지옥엽이었기에 장인에게 돈을 빌린 셈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셋째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나와 같이 가지.”

“예. 가주님.”

진원우는 셋째 아내의 전각에서 기절해 누워있는 아들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셋째 아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놈이 내 아들을 어찌 했는지 보십시오! 가주. 당장 그 놈을 잡아들여야 합니다!”

“···셋째가 어찌하여 이리 되었는가.”

“어찌되긴 뭘 어찌됩니까! 그 어미 없는 놈이 내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진원우는 시립한 무사들 중에 안절부절 불안에 떠는 무사를 보았다.

“너는 셋째의 지도 무사로 알고 있다. 네가 지켜보았느냐.”

“예. 가주님. 제가 다 지켜보았습니다.”

“지켜보았다? 셋째가 이 꼴이 되는 동안 넌 뭘 하고?”

“···삼 공자님께서 막내 공자께 검술을 지도하겠다고 하시었습니다.”

“셋째의 상흔은 목검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바른대로 고하라!!”

진원우의 기세가 일어나자 무사는 더욱 몸을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큽. 삼 공자께서 목검을 드시었고, 막내 공자는 맨손으로 대련했나이다.”

“···허. 목검에 맨손으로?”

“가주! 이 무사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어요! 녀석은 분명 나쁜 짓을 해서 우리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에요!”

“당신의 분이 풀리게 해줄 터이니 잠시만 기다리시게. 하지만 상황부터 알아보세.”

“흥!”

진원우는 지도 무사를 노려보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정녕 막내 혼자였는가?”

“···그, 그러하옵니다.”

“녀석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공을 익혔더냐?”

“······.”

무사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서 대답하지 못해!!”

“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먹질과 발길질이었습니다. 빠르지도 않았고, 신묘한 무공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셋째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너는 이를 믿을 수 있겠느냐?”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지켜봤습니다. 막내 공자는 그 어떤 무공도 익히지 못한 상태입니다.”

“······.”

진원우는 지도 무사가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이 혼자서 무공을 익힌다고 한지 겨우 반년 남짓이다.’

진가장 내의 일을 가주가 모르겠는가.

진원우는 호충이 자신의 거처에서 목인장을 두드리며 체술을 익히고 있는 것을 보고 받았었다. 그래봤자 무공도 뭣도 아닌 운동에 불과하다 생각했었다. 직접 지켜본 호위 무사의 생각도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십년 이상 무공을 익힌 셋째를 때려눕혀? 그것도 셋째는 목검을 들고 있었고 녀석은 맨손이었는데?’

진원우는 호충에게 무(武)의 재능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그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다보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그때 밖에서 부총관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가주님. 수문 무사들이 막내 공자에게 맞았다며 소란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자신이 밖으로 나가는데 인사하지 않았다며 폭행했다 합니다.”

“수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맞고만 있었단 말인가! 녀석이 무기를 들었는가?”

“···하나는 부지불식간에 발에 채였고, 하나는 검을 들었으나, 주먹에 맞았다 합니다.”

“······.”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이렇다 할 무공이 아닌 손과 발만으로 무인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어제 총관의 무사가 당한 것은 우연이라 생각했거늘···.’

어제부터 따지면 동급 무사 하나에 은급 무사 둘이었고, 셋째까지 더하면 모두 네 명이 당했다. 모두가 호충보다 높은 무공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들이다.

“먼 길을 간다 했으나,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진천(眞天)대주.”

“예. 가주님.”

가주 곁에 서있던 금급 무사 황종현이 기쁘게 답했다.

“가서 녀석을 잡아와라.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들어봐야겠다.”

“한 시진 내로 막내 공자를 가주전에 꿇어앉히겠습니다.”

진원우는 셋째 아내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내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마음 푸시오.”

“가주님만 믿겠어요. 꼭 요절을 내주셔야해요!”

그 시각 호충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

호충은 진가장에서 나가자마자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수금할 시간이로구나.’

호충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흐려지며 은형술(隱形術)이 발휘되었다.

소란한 진가장 수문에서 멀리 떨어진 담벼락 너머에 흐릿한 무언가가 지나갔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호충은 아무렇지도 않게 진가장 내부를 가로질러 가주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주전에서 나오는 진원우와 총관이 보였고, 무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또한 가주의 호위들도 모습을 감추고 가주를 따라가고 있었다.

‘셋째의 일을 보고받은 모양이군.’

가주의 호위가 가주를 따라 셋째의 처소로 가는 모습을 지켜본 호충은 마음 놓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지만, 호충의 눈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 와중에 일류급 호위 하나를 남겼어? 하여간 의심 많은 새끼는 이래서···. 그래봤자 내겐 어림없다.’

높은 내공을 가진 시종이 보였지만, 호충의 은형술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도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듯이 들어가는 호충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진원우 네 놈의 쌈짓돈이 여기 있으렸다.’

호충은 진원우가 금자 주머니를 꺼냈던 서랍을 열어 값나가는 것들을 챙겼다.

‘패물에 금자에···. 많기도 하구나. 큭큭.’

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비녀도 있었고, 금원보도 몇 개나 있었다.

‘여긴 이쯤 하고 이번엔 총관의 집무실을 털어야겠군.’

가주와 함께 떠나는 총관을 보고 총관의 집무실까지 털어먹기로 결정했다.

‘가주의 주머니만 털려했지만,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역시나 비어있는 총관의 집무실에는 산서(山西)로 보낼 운영자금이 상당했다.

‘큭. 오늘 제대로 횡재했구나. 다 털어먹으면 문제가 커질 것이니 적당히 챙겨야겠어.’

진원우가 호충을 잡아오라 명한 시점에 호충은 진가장의 자금을 털어 담벼락을 넘고 있었다.

‘가주와 총관이 여비를 안 주시니 제가 알아서 챙겨야지 어쩌겠습니까. 하하하.’

***

흑패의 본거지에 도착한 호충은 송 영감부터 찾았다.

“이봐. 영감 어디 있어?”

갑자기 호충이 모습을 드러내자 흑패 조직원이 깜짝 놀랐다.

“헙! 언제 오셨습니까. 공자님.”

“어제 노인 하나가 여기로 오지 않았어?”

“아. 철필 형님께서 모시고 계십니다.”

“왕호는.”

“같이 계실 것이옵니다.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빨리 데려와.”

“예! 공자님.”

호충은 여전히 도자기와 패물이 남아있는 안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아직도 다 못 팔았어?”

양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팔리지 못하고 남은 물건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신비인의 족자를 발견했지.’

호충은 여기서 발견한 족자를 기억했다. 족자의 시와 그림 덕분에 동혈의 위에 묻힌 비급과 황금을 발견했고, 또 황궁의 비고까지 알아내지 않았겠는가. 당시의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장보도 보다 대단한 족자였다.

“그럼.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고, 일도 미룰 수 있는 법이지. 괜찮아.”

사중환이 능력이 좋아 깨끗이 정리하고 팔아버렸다면 비급의 냄새도 맡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 사중환과 왕호가 들어왔고, 송 영감이 뒤를 따랐다. 호충은 둘이 인사하기도 전에 지시부터 내렸다.

“너희는 짐 싸서 영감하고 자장을 떠나라.”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지금 가야합니까?”

“가는 척만 할 거야. 너희는 영감을 챙겨서 자장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수문 무사를 때린 것은 넘어갈 수 있지만, 셋째를 밟아준 일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잡기 위해 진가장에 얼마 남지 않은 무사들이 파견될 것이기에 우선 송 영감을 빼내야했다.

“대형.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진가장에서 날 잡으러 올 거야. 방금 집에서 사고치고 나왔거든.”

“······혹시.”

사중환은 호충이 지금까지 보여준 잔인한 면모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누군가를 죽이고 나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진가장에서 살인을 하고 나왔다면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굴 죽인 건 아니니까 잠깐 시야에서 사라지면 다 해결된다. 너희는 북쪽 길을 통해서 산서 방향으로 빠져나가. 진가장의 무사들은 서안(西安)방향에서 날 찾을 테니까.”

“그럼 대형은 어쩌시려고요.”

“나는 느긋하게 어머니 묘소에 들러서 이장(移葬)하고···.”

“이, 이장이라뇨!”

송 영감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머니는 진씨 세가의 선산에 묻힐 분이 아니야. 내가 따로 모실 거야.”

“하지만···.”

“영감은 그렇게만 알아둬.”

“···예. 위치는 꼭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자장에서 잠시 일을 보고 바로 너희를 따라 가겠다. 관도를 통해 가면 내가 금방 따라잡을 수 있으니 지체하지 말고 길을 서둘러.”

“알겠습니다. 공자님.”

“예! 대형.”

지시를 끝낸 호충은 송 영감과 따로 남았다.

“영감은 걱정 말고 녀석들을 따라가.”

“집에서 무슨 사고를 치고 나오셨습니까. 분명 무사를 그냥 두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새끼는 만나지도 못했어. 나오는 길에 호성이 새끼를 만났지 뭐야.”

“셋째 공자님을···.”

“마지막에 무슨 짓을 못하겠어? 거하게 뚜드려 패고 도망쳤지.”

“큽. 잘 하셨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복수하셨군요.”

“···맨날 맞고 들어와서 속상했지?”

영감에 한소리 들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좋아하니 묻는 말이다.

“셋째 공자는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좀 맞아도 됩니다.”

“첫째는?”

“참 삭막한 분이죠. 결코 도련님께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둘째는 얘기 안 해도 괜찮아.”

“···둘째 공자는 도련님과 접점도 없으셨잖습니까.”

“나 예전에 배에 칼 맞은 거 그 새끼가 시켰다? 흑패 접수하면서 알았어.”

“!!”

“흑패에 사주해서 날 죽이려고 했던 놈이야. 그 놈이.”

“어찌 형제에게 살수를···.”

“영감도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았어?”

“······.”

송 영감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도 내부의 일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란이 년이 얼마나 지독하게 날 괴롭혔는지도 알지?”

“도련님을 빼면 진가의 자손들 중에 정상이 없지요.”

“가주의 아내들은 어떻고.”

“그렇지요. 참으로 독한 심성을 가진 분들입니다. 살수가 아니라 더한 일도 하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호충은 송 영감이 진가장에 미련을 갖지 않길 바라고 둘째의 일을 드러내며 말을 주고받은 것이다.

“진가장엔 돌아가지 않을 거야. 화산까지는 갈 생각이지만, 이후의 일은 내 마음이지.”

“···저야 도련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호충은 송 영감이 챙겨 놓은 짐 더미로 가서 예전에 진가장에서 챙겨온 검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까지 권각을 주로 사용했지만, 진가장을 떠나는 지금부터는 달라져야 했다.

“영감도 어서 움직여. 짐은 어차피 수레에 실을 터이니 가볍게 가자고.”

“예. 도련님.”

이미 한번 길을 떠난 경험이 있기에 여행이 걱정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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