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32)

떠날 시간

***

호충은 영감과 일행을 보내고 홀로 산에 오르고 있었다. 멀리 진가장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진가장 소유의 선산으로 진씨 세가의 조상들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호충이 찾는 어머니의 묘소는 반대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진가장이 보이지도 않는 으슥한 곳에 묘소를 만들어 놓다니.’

조상들의 묘는 바로 진가장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잘 꾸며두었지만, 어머니의 묘소는 얕은 봉분에 주변은 나무로 우거져 있었고 비석조차 없었다.

우거진 나무가 볕을 가려 낮인데도 묘소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

호충은 묘소에서 정성껏 절을 올렸다.

‘당신은 이미 아들과 만났을 것이오.’

호충이 몸을 차지했으니 전에 있던 녀석은 분명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자는 저승에서 해후했을 것이다.

깊이 절을 올리고 일어난 호충은 유골이 묻힌 봉분에 검을 겨눴다.

‘이제 양지바른 곳으로 다시 옮겨드리겠습니다.’

슈각.

호충의 검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고, 흙이 둥글게 뽑혀 나오며 봉분 아래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호충은 그 안에서 유골 단지를 찾아 꺼냈고, 다시 구멍을 매워 흔적을 지웠다.

단지를 챙긴 호충은 산속의 오두막을 향했다.

유골 단지를 매장하기 위해서였지만, 진가장에서 가져온 패물과 금자를 숨기기 위함도 있었다. 동굴과 오두막 사이에 묻어둔 철궤를 꺼낸 호충은 금비녀를 비롯한 패물과 금원보를 차곡차곡 넣어 다시 꼼꼼하게 묻었다. 호충의 품에 남은 것은 일부의 금자가 전부였다.

오두막 밖으로 나온 호충은 볕이 잘 들어오는 마당에 작게 굴을 파고 유골 단지를 묻었다. 그리고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절을 올렸다.

“나중에 좋은 곳으로 옮기겠습니다. 우선은 여기 계십시오.”

이후의 말은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당신이 낳은 이 몸을 이제 제가 쓰고 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호충은 은형술을 발휘해 모습을 감추고 경공을 극성으로 발휘했다.

파앙.

***

가주 직속의 진천(眞天)대 대주인 황종현은 대원 다섯을 이끌고 말을 타는 중이었다.

두두두.

“이랴!”

‘이제 십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구나!’

시비를 걸어도 넘어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 했지만, 녀석은 사고를 치며 자신에게 기회를 안겨줬다.

‘오늘 당장 너를 요절 낼 것이다.’

“주변은 철저히 확인하고 지나야 한다! 그 녀석이 보이거든 바로 신호하라.”

“예! 대주!”

진가장에서 나오자마자 자장을 훑고 나온 길이다. 인마(人馬)는 서안(西安)으로 가는 길목을 달리고 있었다.

“녀석은 화산(華山)에 간다 했으니 가는 길은 외길이다.”

황종현은 분명 얼마 가지 않아 호충을 만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호충은 신법으로 황종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자장에서 조금 더 벗어난 다음 처리해야겠군.’

이들이 추적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자장에서부터 뒤를 따라왔다.

호충의 손엔 작은 조약돌이 여러 개 들려 있었다.

‘그래야 돌아가는 길이 멀지 않겠는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쫓던 이들이 죽어서 돌아간다면 일은 복잡해지고 또한 더 많은 무인이 동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충은 진천(眞天)대의 뒤를 한참이나 더 따르다가 살기(殺氣)를 집중해 가장 앞선 말에게 쏘아 보냈다.

히이이잉.

“헙! 이 녀석이 왜 이래!”

멀쩡히 달리던 말이 급히 멈추며 다리를 들어 올렸고, 뒤 따르던 말들도 급하게 멈춰야 했다.

“대주! 무슨 일이십니까!”

“이 녀석이 말을 듣지 않아! 진정해라 이놈아!”

황종현이 탄 말은 절대 앞으로 가지 않겠다는 듯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소란으로 흙먼지가 일어난 틈에 호충의 손에 있던 조약돌이 날아갔다.

타닥. 탁. 탁. 탁.

호충의 내공을 가득 머금은 조약돌이 타격하는 소리는 말들의 발굽소리와 진천(眞天)대의 고함에 묻혀 버렸다.

“워워!”

“엇! 이 녀석도!”

“저희 말들도 이상합니다.”

갑자기 말들이 다리를 절며 움직이지 못했고, 어떤 말들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경기(驚氣)를 일으켰다.

“벌에 쏘인 모양입니다.”

“이 녀석은 다리에 뭐가 박혔는지···.”

“젠장!”

조금 더 가면 녀석의 뒷머리가 보일 것 같았기 때문에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둘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말을 돌봐라.”

“예! 대주!”

뛰어 가서라도 호충을 뒤쫓을 생각이었다.

“······.”

호충은 멀리서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움직였다.

‘끝까지 지랄이군.’

호충은 개울가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다.

“축골공(縮骨功)과 역용술(易容術)은 지금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호충은 몸의 지정된 혈도에 내공을 돌려 체형을 변화시켰고, 곧 얼굴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두둑. 둑.

“젠장. 잘난 내 얼굴이 다 사라졌어. 이래서 쓰기 싫다니까.”

하지만 새로 변화한 얼굴은 더욱 잘난 얼굴이었다. 다만 체형은 조금 작아졌고, 목소리는 중후한 저음으로 바뀌었다. 스물도 되지 못한 호충이 중년인으로 변화한 것이다. 실로 기이한 무공이었다.

호충은 이 기이한 무공을 앞으로 자주 쓰게 될 것 같다고 짐작했다.

‘썩을. 앞으로 내 얼굴로 돌아다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어.’

“검은 진가장의 것이니 사용하지 못하겠군.”

개울 근처의 바위를 들어 밑을 파내고 검을 숨겼다.

“이제 몇 대만 맞자. 대주 새끼야.”

파앙.

호충은 신형을 길게 뽑아내며 황종현과 일행을 뒤쫓았다.

***

“허억. 저기 누가 있습니다.”

황종현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다가 얼른 안력을 집중했다.

진천(眞天) 대원의 말대로 누군가 앞에서 걷고 있었다.

“거기 서라!”

중년인은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 사이 세 사람은 순식간에 앞에 당도했다.

“지금 너희가 나를 불렀느냐?”

“···젠장.”

“도둑을 잡듯이 나를 불러놓고 젠장?”

가까이 도착해서 보니 호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중년의 남자인 데다가 체형도 달랐고 얼굴도 딴판이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너무 빼어난 용모를 갖췄기에 쉬이 잊힐 것 같지 않았다.

황종현은 이 사람이 호충을 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 외에 다른 이를 보지 못했느냐. 바른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가? 정녕 무례하구나.”

“진가장 진천(眞天)대의 대주인 내가 묻고 있지 않는가! 당장 대답하라!”

“풋. 진가장이 언제부터 이리 위세가 높았는지 모르겠구나. 진가장이 요즘 섬서에서 날뛴다고 하더니 내가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황종현은 진가장을 밝혔음에도 당당한 상대를 보고 무림 방파의 소속이 아닌가 싶었다.

“···어디에 누군지 밝혀라.”

“나는 떠돌이 무림인일 뿐이다.”

“감히!”

무림 방파 소속도 아니면서 진가장을 무시한 상대에게 크게 분노한 황종현은 검을 빼들었다.

챙!

“허! 진가장은 다짜고짜 검부터 빼드는 놈들이었구나. 내가 무기를 들고 그대들을 맞이하였는가?”

“섬서에서 진가장을 무시했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으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들이로고···.”

“팔이 잘리고도 그리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지 보자!”

진천대주 황종현은 안 그래도 호충을 찾지 못해 화가 난 참이라 거침없이 검을 날렸다.

황종현의 검은 상대의 팔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헛!”

상대는 크게 낭패한 모습으로 검을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황종현의 검은 바닥을 구르는 상대를 향해 계속해서 검을 날렸지만, 상대는 쏟아지는 검을 요리조리 피하며 입을 놀렸다.

“정녕 사람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 이로고! 너희는 정녕 무도한 자들이구나!”

“뭣들 하느냐! 녀석을 잡아라!”

무공이 고강해보이지 않았고, 소속도 없었기에 거리낌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예! 대주!””

‘크흐. 이 연기력. 배우가 됐으면 대종상도 노려볼 수 있지 않았을까?’

호충은 속으로 자신의 연기력을 자화자찬하며 세 무인을 맞이했다.

셋의 합동 공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쏟아지는 검격 속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호충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너희가 내게 무례하였지만, 나까지 그럴 수야 없지.”

“······.”

황종현은 상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뭔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다.

‘고수다!’

“하지만 너희의 알량한 자만심은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진가장이 섬서의 법이라도 되는가!”

슈앙.

호충의 주먹이 대기를 밀어내며 진천 대원의 몸으로 날아갔다.

펑.

“쿨럭.”

호충의 권에 맞은 대원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곧바로 다른 쪽 주먹이 검격을 파고들었다.

퍼엉.

또 다른 대원 하나의 앞섶이 크게 펄럭이며 주먹에 공력이 가득 실렸음을 알려줬다.

“크헉.”

이제 남은 것은 진천대주인 황종현 하나였다.

“허!”

언뜻 보기에도 고절한 무리가 담긴 권(拳)이었다.

“나, 나는···.”

“변명하지 마라! 이들을 이끄는 너의 잘못이 가장 크다!”

호충은 경공으로 빠르게 다가가 옆으로 돌아섰고, 황종현의 눈이 옆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연환퇴를 날렸다.

퍼벙.

“커흑.”

멀찍이 날아가며 피를 토하는 황종현을 보며 호충은 속이 후련했다.

‘십년을 어찌 기다리겠느냐.’

십년을 기다리라했지만, 본래부터 십년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수개월 내에 다시 진가장을 찾을 생각이었다.

“어찌 길에서 처음 마주한 무림 동도를 이리 핍박할 수 있는가!”

호충은 진천대원 하나가 바닥에 떨군 검을 집어 들었다.

“내 팔을 자른다 하였느냐? 그럼 내가 너희 팔을 거둬도 불만이 없겠구나!”

황종현은 얼른 무릎을 꿇고 말했다.

“크흑. 저희가 눈이 어두워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주십시오.”

“내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지금 너희 숨이 붙어 있기나 했을 것 같으냐!”

팍.

호충은 팔을 자르지 않겠다는 듯이 검을 땅에 던져 박았다.

“자, 자비하신 처분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희가 내 중원 유람을 제대로 망쳤다! 썩을 진가장. 앞으로 진가장의 깃발이 보면 항상 조심해야겠구나.”

“저희가 공명심에 어두워 무례한 것입니다. 진가장은 예를 아는 곳입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진가장 진천(眞天)대주 황종현이라 하옵니다.”

“내 황 대주의 이름을 기억하지. 나는 파진후라 한다네.”

호충은 경혼무흔(驚魂無痕)의 저자인 파진후(破陣厚) 스승님의 이름을 활용했다.

몸을 돌리려던 호충은 뭔가 기억이 났다는 듯이 다시 돌아섰다.

“황 대주. 아까 내게 묻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예. 파 대협. 진가장의 사 공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간 것이 분명하여 찾고 있었습니다.”

고수로 보이는 상대에게 진가장의 치부를 들출 수 없기에 그저 찾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허. 별일도 아닌 것을···.”

“······대협께선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 공자라면···. 혹시 얼굴이 상당히 잘생기고 신장도 상당히 큰 인물인가?”

“헙! 그렇습니다.”

“자장을 나오며 본 것 같군. 그 외엔 기억나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그럼 앞서 갔습니까?”

“아닐세.”

“!”

분명 앞서나갔다고 생각했다.

“젊고 잘생긴 청년이 자장을 나서고 조금 뒤에 산길을 타려하기에 물었지. 왜 관도를 놔두고 그리로 가느냐고 말이야.”

‘산길?!’

“그가 감숙 방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군. 그래도 관도를 타는 것이 좋지 않겠냐 물었지만, 청년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하는 것이 아니겠냐며 산길로 들어갔네. 그러다 호랑이 밥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싶었지. 옆에 있는 중늙은이야 살만큼 살아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만, 젊은 청년은 정말 안타깝더군.”

‘진호충과 녀석의 늙은 종복이다!’

“그럴 수가!”

분명 화산으로 간다고 여겼거늘 초반부터 산길을 타고 관도를 벗어난 것이다.

“진가장의 귀한 공자라면 얼른 가서 찾는 편이 좋겠어. 미리 알았다면 더 말릴 걸 그랬군.”

“감사합니다. 파 대협. 덕분에 진가장의 공자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서 가보게. 내 권각에 맞은 곳은 오래지 않아 나을 것이네. 피를 토해서 내상이 있을 것 같지만, 그 정도로 내기를 집중하진 않았네.”

“아아. 무례를 호의로 돌려주시다니 진정 대협이십니다.”

“됐네. 난 서안(西安)을 통과해 사천(四川)으로 갈 것이니 진가장의 무사들을 이끌고 오려거든 얼마든지 다시 찾아오시게.”

“아, 아닙니다! 파 대협에게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 저희가 파 대협을 쫓겠습니까.”

“좋네. 그럼 나도 오늘 일을 잊어주지.”

“감사합니다. 파 대협!”

“그럼 내 갈 길이 바쁘니 이만 가겠네. 진가장의 공자를 꼭 찾길 바라네.”

“예! 파 대협!”

호충은 가볍게 몸을 돌렸고 적당한 무공을 드러내며 걸음을 옮겼다.

“대주···. 괜찮으십니까?”

“크윽. 너희는 어떠냐.”

“피를 토하니 오히려 개운해졌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역시 파 대협의 말대로구나.’

황종현은 호충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번쩍 떴다. 뒷모습만으로 고수의 풍모를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파 대협은 절정의 끝을 거닐고 계시는 것 같구나. 오늘 우리가 저승에 문턱을 밟고 돌아왔다 생각하여라.”

오늘 같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는 황종현이다.

“헙. 절정의 끝이라니···.”

‘화경의 경지일 수도 있으나, 그 이상은 내가 알아볼 수 없구나.’

분명한 것은 진가장의 가주보다 고수라는 것이었다.

“녀석이 감숙 방향으로 산길을 타고 있다고 하셨으니 우린 어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가자!”

““예. 대주.””

호충은 셋보다 빨리 돌아와 개울에서 검을 되찾고 있었다.

‘다시 역용해야겠구나.’

파진후 스승의 이름을 사용한 얼굴을 또 사용할 수 없었기에 호충은 온화한 인상의 평범한 얼굴로 다시 바꿨다.

‘길을 되짚어 가면···.’

호충은 진천(眞天)대가 출발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벗어나 자장으로 향했다.

진천(眞天)대가 엉뚱한 곳을 뒤지는 동안 자신은 일행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합류는 하루 쯤 늦어도 된다.’

호충이 자장에 들어와 향한 곳은 한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다시 은형술(隱形術)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흐릿해진 호충의 신형이 화용루의 내실을 파고들었다.

‘오빠가 간다. 화진아!’

호충은 한참이나 만나지 못한 화진과 해후할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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