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곡(江山曲)과 환희공(歡喜功)
***
“찾아라!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놀란 말들을 수습해 길을 거꾸로 달려온 황종현은 진천대와 수색에 돌입했지만, 애초에 산으로 간적이 없는 호충을 어찌 찾겠는가. 이들은 늦은 시각까지 수색을 이어가다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진가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종현은 가주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기에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뭐라? 도둑?”
하지만 황종현은 자신의 실패보다 더 심각한 일이 터졌음을 알 수 있었다. 진가장에서 도둑이 다녀갔다는 소식이었다.
“예. 대주. 총관이 관리하는 운영자금에 누군가 손을 댄 모양입니다.”
“허! 감히 진가장에서 도둑질을 하는 놈이 있단 말이냐!”
아직 가주의 주머니까지 털렸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사마 총관님은 다 훔쳐가지 못하고 일부만 빼간 것을 보아 외부의 인물보다 내부가 의심된다고 합니다.”
“내부라···. 막내 공자일 가능성은?”
“···막내 공자가 떠난 다음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막내 공자는 아닙니다. 공자는 가문의 운영자금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를 것이옵니다.”
“쳇.”
넷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은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총관은 당장 도둑을 잡으라고 성화입니다.”
“사마 총관님께 가자. 공자를 찾지 못한 것을 보고한 다음, 도둑을 잡을 것이다.”
“예!”
그 시간 도둑은 자장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호충은 화진의 방에 도착해 축골과 역용을 풀고 걸음을 옮겼다.
저벅.
갑자기 들린 걸음 소리에 놀란 화진이 뒤를 돌아봤다.
“누구냐!”
“어허. 이젠 서방도 못 알아보느냐.”
“고, 공자님? 얼굴이···.”
“외유가 길어져 고생이 좀 심했다.”
화진은 얼른 다가와 호충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리게만 보이던 호충이 늠름한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갑자기 이리 나이 드시다니···.”
“네겐 좋은 일이 아닐까? 이제 어린놈과 만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 고생했다고 이렇게까지 바뀔 일이 아니었다. 화진은 호충에게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몇 달 고생했다고 이리 되실 리가 없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큭. 사실 너와 나이를 맞추려고 나이가 드는 약초를 찾아 먹었다.”
“아. 어찌하여!”
“정말 찾기 힘들더구나. 그래도 효과는 아주 좋았지. 이제 너와 같은 연배로 보이지 않느냐?”
호충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화진은 크게 감격한 표정이었다.
혹독한 겨울 여행조차 자신을 위해 떠났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해가 지나 스물여섯이 된 화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암울했는지 모른다.
“흐흑. 어딜 가시나 했더니···. 흐흑. 저는 그것도 모르고 원망만 했사와요.”
“나도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공자님.”
호충은 품에 안겨오는 화진을 더욱 세게 껴안았다.
“네가 어찌나 그립던지···.”
어찌나 그리웠으면 천수에서도 기루를 찾지 않았겠는가.
“온 세상이 하얗게 반짝여도 네가 없는 곳에선 아무런 감흥도 없더구나.”
고원의 눈 내린 풍경에 크게 감격했던 이의 말이었다.
“아아. 다시는 저를 떠나지 마시와요.”
“조용한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빛이 빛났지만 나는 너의 반짝이는 눈빛만 기억났다.”
동굴에 들어가 있느라 별빛은 보지도 못했다.
화진의 눈에 고인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몸은 너와 떨어져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엔 언제나 네가 있었다. 메마른 내 입술에 너의 숨결에 닿기를 바라고, 잠든 나를 깨우는 너의 손길이 닿기를 바랐다. 네가 꿈에 나오는 날엔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꿈에서라도 네가 함께 하기를 바랐으니까···.”
“공자님! 저 여기 있사와요!”
‘오늘따라 썰이 죽이는구나. 역시 한국의 대중문화는 어디서나 먹혀.’
한국 가수의 노래가사에서 부분 부분을 가져와 짜깁기한 말이었다.
밀착한 두 남녀는 떨어질 줄은 몰랐고, 호충은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날따라 화진은 더욱 정성껏 호충의 몸을 탐했고, 호충도 그에 호응하여 뜨거운 시간을 선사했다.
.
.
.
열락(悅樂)을 지나 고요가 찾아왔고, 침상엔 낮은 숨소리만 남았다.
“자느냐?”
“···아뇨.”
혹시 잠들었나 싶어 물었지만, 화진은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또 어디 가실까봐 잠에 들 수가 없어요.”
“···그 얘길 들으니 내가 말을 꺼낼 수가 없구나.”
화진은 벌떡 허리를 세웠다. 그 바람에 이불이 내려가며 헐벗은 상체를 드러냈지만, 화진은 방금의 말이 더욱 중요했다. 꺼내기 힘든 말은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떠나시나요?”
“······.”
침묵은 긍정이었다.
“가지 마셔요. 여기 계셔요.”
“진가장의 일이다.”
진가장의 일이라는 말에 화진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흐흑.”
“···그럼 나와 함께하겠느냐?”
눈물로 얼룩진 화진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나는 가주의 명에 따라 화음(華陰)으로 가야한다. 가는 길만 천리길이지. 나와 함께할 수 있겠느냐?”
말이 천리길이지 실제로 가자면 천리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화용루는 어쩌고요.”
“기루야 대리인을 세워두면 되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내가 바로 자장 흑패의 숨겨진 패주다. 네가 없어도 화용루가 망할 일은 없다.”
화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가겠어요!”
“그래. 너도 가자.”
“언제 가시죠?”
“내일.”
“!”
화진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당장 준비해야 내일 함께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호충은 그런 화진의 팔을 붙잡아 다시 침상으로 끌어들였다.
“서두르지 마라. 어차피 나는 화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따로 출발해도 중간에 만나면 된다.”
잠시이긴 했지만, 호충은 진가장에서 원하는 대로 화산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함께 떠나고 싶어요.”
“같이는 못 간다. 오늘 진가장에서 사고를 치고 나왔거든. 지금 진가장의 무사들이 나를 잡아가려고 눈을 부릅뜨고 찾는 중이다.”
“!”
“별일은 아니야. 셋째 형과 조금 다퉜는데, 내가 진가장에 가진 기반이 없어 죄인 취급을 받고 있을 뿐이니까.”
조금 다퉜다고 하기엔 호성의 상태가 영 심각했고, 실제로 죄인 취급을 받아도 될 만 한 일들도 엄청나게 저지르지 않았던가.
“화음으로 가서 자숙하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지.”
자숙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산적해 있기에 호충을 향한 관심은 자꾸만 멀어질 것이다.
“진가장도 너무하네요. 형제는 다투기도 하는 거죠. 그런 일로 한 사람을 죄인 취급해요?”
“그러게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맞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내가 형을 이기니 일이 이렇게 되는 구나.”
“지금까지는 맞기만 하셨다고요? 하! 우리 공자님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호충은 자기편을 들어주는 화진이 얼마나 예쁘게 보이는지 모른다.
‘너도 영감처럼 내 마음에 들어오는 구나.’
“이번에 진가장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공자님!”
“진가장에선 내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특히 너와 함께할 우리의 미래 말이다.”
“······.”
화진은 호충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남자로 보였다.
“나는 세상에 나가 기반을 잡고 나의 세력을 만들 것이다. 너 또한 내 세력의 일부로 만들 생각이다. 어떠냐. 나와 함께하겠느냐?”
“···제가 공자님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함께하겠어요.”
“······.”
거침없는 답에 호충은 벗어둔 옷에서 책자들을 꺼냈다.
“기루의 기녀들이 익힐 음공(音功)과 밤에 사용할 방중술(房中術)이 기록된 무공서다.”
“!!”
표지에 강산곡(江山曲)과 환희공(歡喜功)이라 적힌 무공서와 잠룡진(潛龍陣)이었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황궁의 감시로 인해 위험을 동반하나 잠룡진(潛龍陣)을 익히면 내공의 흔적을 지워준다. 무림의 누구도 무공을 익힌 기녀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무, 무공서라니···.”
“또한 네가 익혀야할 무공은 따로 있다.”
호충이 마지막에 꺼낸 무공서 두 권에는 명경수(明經手)와 운경보(雲輕步)라 적혀 있었다.
명경수(明經手)는 수(手), 장(掌), 조(操), 지(指)를 아우르는 무공서였고, 공력이 높아지면 금강불괴와 같은 수준의 손과 팔을 얻을 수 있었다. 운경보(雲輕步)는 가벼운 구름과 같은 발걸음이라는 제목처럼 경신법이 수록된 무공서였다. 혹여 화진에게 위험이 생기면 경신법을 통해 도주하여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무공서였다.
“지금 네게 보인 무공서는 상승 무공이라 분류하기엔 무리다.”
“하아. 전 또···.”
말은 항상 끝까지 들어야 한다.
“기녀들이 익힐 음공과 방중술은 상승 무공이라 할 수 있지만, 네게 보인 무공서는 능히 절정을 넘어설 무공서다. 고작 상승 무공이라는 수식어로는 한참 부족하지.”
“······.”
눈을 부릅뜬 화진에게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며 말했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 세력을 만든다 했겠느냐. 흑패에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고절한 무공을 내렸고, 이미 그들은 단련을 시작했다. 나는 너를 기녀들의 정점에 서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니 나를 따르기로 결정하였다면, 이 무공을 밤낮없이 익혀야 할 것이다.”
“도대체 이런 무공서를 어디서···.”
시중에선 절대로 찾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오백년 간 무림은 황궁의 서슬 퍼런 감시아래 상승 무공을 빼앗겨 왔고, 누구도 무공이 높음을 자랑하지 않았다. 덕분에 무림에선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말조차 통용되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런데 호충은 상승 무공을 넘어선 고급 무공서를 수두룩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알고 싶으냐? 나만 아는 비밀이지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아, 아니어요. 말하지 마셔요. 제가 알면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옵니다.”
화진은 지금 주어진 무공을 발설하지 않는 것만으로 벅찬 일이었다. 그 이상을 알아봐야 걱정만 더할 뿐이다.
“내일은 외부로 보낸 일행과 의제를 데려오고···.”
“의제요?”
화진은 호충에게 의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수에 갔다가 흑패 하나를 더 접수했거든. 천수 흑패의 패주였던 녀석인데, 내게 충성을 맹세하여 의제로 삼았다. 왕호라는 녀석이지.”
“!”
“고작 천수 흑패로 놀라느냐? 화음(華陰)으로 가는 중에도 흑패를 접수할 생각이다. 이후 중원 전역의 모든 흑패와 기루를 내 손에 넣을 것이다. 너는 기루를 맡고 나는 흑패를 맡는 계획이지. 어떠냐?”
“말씀대로만 된다면···.”
고절한 무공을 익힌 흑패의 조직원들과 기루의 기녀들이 중원 전역에 뿌리내린다면, 누구보다 쉽게 중원에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림 방파는 하나의 무관을 설립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흑패와 기루를 활용하는 호충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화진은 호충의 심계가 실로 교묘한 구석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중원을 손에 넣으실 겁니다.”
“큭큭. 맞아. 흑패와 기루는 이미 중원에 존재하고 있지. 무림 방파는 자신들의 무관이나 상회를 설립하고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이미 뒷골목에 자리한 흑패를 활용할 생각은 하지 못하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