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32)

명경수(明經手)와 운경보(雲輕步)

***

“무림 방파는 이미 뒷골목에 자리한 흑패를 활용할 생각은 하지 못하거든.”

정무맹과 협의맹은 정파를 표방하는 무림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담당하는 흑패와 기녀들의 행사엔 끼어들지 않으려 한다. 정도 무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도박장과 홍루를 운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미 자리를 잡은 녀석들의 머리를 치고 흡수해 규합하는 일이라 자금이 크게 소요될 것도 없지. 자장 흑패와 천수 흑패를 접수하며 사용한 것도 이 몸뚱이가 전부였다. 오로지 무공의 고하로 주인이 결정되니 내게 얼마나 수월하겠느냐.”

황궁에 의해 무림의 행사가 축소된 지금은 오히려 뒷골목이 예전의 무림과 비슷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뒷골목은 무림과 달리 높은 수준의 무공이 없기에 마음대로 힘을 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무림 세력의 눈치가 아닌 관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라 오히려 관에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힘이 약한 건달패는 언제든지 정리할 수 있다는 관부의 자신감이었다.

황궁의 눈이 이들에게 향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첩. 공자님께서 주신 귀한 무공서를 익히겠습니다.”

“특히 명경수(明經手)는 여인에게 젊음을 유지하게 해주고 또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하더구나. 안 그래도 예쁜 화진의 미모가 더욱 빛나겠어.”

“!!”

“그렇다고 운경보(雲輕步)를 소홀히 하진 말아라. 네가 위험에 빠지면 네 목숨을 구해줄 경신법이다.”

미모와 관련된 무공이라 하니 화진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다, 당장 시작하겠어요!”

“푸흐흐.”

“지금 웃을 일이 아니라고요!”

“이렇게 예쁜 화진이가 얼마나 더 예뻐지려고?”

“아잉. 공자님.”

“내일 일행을 데려오고 이후 화음(華陰)으로 향할 것이다. 너는···.”

“저는 무공이 급해요.”

“마음만 급하다고 무공이 저절로 익혀지겠느냐?”

무공서만 보고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면 오백 년 전 무림엔 고수가 즐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고수라고 할 만한 무림인은 흔치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죠?”

“고수의 가르침을 받아야지.”

“그런 고수가 어디···.”

“눈앞에 두고도 모르느냐? 흑패의 녀석들도 내 가르침을 받아 무공을 익힌다. 너 또한 마찬가지야. 내일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출발하면 될 것이다. 화음까지 가는 길에 적절한 훈련 방법을 일러주마. 하지만 같이 가는 것은 무리다. 네가 자장을 출발한 다음 중간에 합류하겠다. 연안(延安)에서 보는 것이 좋겠다.”

“호호호. 공자님과 함께라면 뭐든 좋아요.”

“자아. 어차피 무공은 내일부터 시작이니 우린 못다 나눈 정을 나눠야지?”

호충은 화진의 손을 침상으로 잡아끌었다.

“어머. 공자님 또?”

“내가 먹은 약이 나이만 먹게 하진 않은 모양이야.”

“그 약이 무슨 약인지는 모르지만···. 실로 대단한 약이라는 건 충분히 알겠사옵니다. 어쩜···. 하흡!”

밤은 길었고, 화진은 초죽음이 될 때까지 호충의 시달림을 견뎌야 했다.

***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호충은 자장에 흩어진 진가장 무사들의 눈을 피해 위로 올라갔다.

일행을 찾기 위함이었다. 호충은 극성으로 경공술을 펼쳐 달려 나갔고, 오래지 않아 길가에서 벗어난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호충이 오지 않아 천천히 간 것이다.

“사중환. 왕호.”

“공자님.”

“대형! 무사하셨습니까!”

“별일 있었겠느냐.”

“그럼 이제 자장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사중환은 나와 함께 화음으로 떠난다. 자장엔 왕호가 남는다.”

“저, 저요? 제가 왜요?”

천수 흑패의 패주가 자장 흑패에 남아 뭘 하라는 것인가. 왕호는 호충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왕호 너는 자장에 남아 할 일이 있다.”

화음으로 향할 일행에 왕호가 빠진 것은 이유가 있었다.

“공자님. 그럼 저는···.”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자장 흑패는 어쩌라는 말인가. 호충은 사중환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왕호를 향해 계속 할 일을 설명했다.

“자장 흑패는 네 지도아래 무공을 익힐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미 나와 함께 기초를 만들었고 몇 번이고 설명했으니, 다른 이를 교육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너는 우선 흑조 조장 남강청과 패조 조장 하건림을 교육해라. 녀석들이 익힌 다음 아래로 전파하게 만들고 이후 잘못된 점을 지도하면 된다. 그리고 도박장의 옥비연을 내게 보내라. 녀석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너는 이후에 화음으로 와서 내가 준 무공서를 익혀야 할 것이다. 나와 몇 번 해보면 혼자 익히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 대형! 확실하게 지도하고 화음으로 합류하겠습니다.”

“화음에서 우리가 만날 장소도 정해야겠구나. 도박장이 많지 않을 터이니 화음의 도박장을 찾아라.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예. 그리하지요.”

“···아.”

사중환은 자신을 제외한 조장들이 먼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왕호의 경우 벌써부터 기초를 만들었다지 않은가. 호충은 잔뜩 찌푸린 표정의 사중환을 지그시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왕호의 지도를 받을 수야 없지 않느냐. 사중환 너는 내가 따로 지도해주마. 옥비연도 마찬가지다.”

“아!”

왕호에게 교육을 맡기면 서로 형제라고 해놓고 위아래를 두는 격이었다. 셋은 자신이 직접 지도해야 했다.

“따르겠습니다. 공자님.”

“자장의 흑패가 왕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으니, 너는 왕호와 자장으로 들어가서 일을 정리해라. 나와 영감은 자장을 피해 화음(華陰)으로 갈 것이니 짐이 실린 수레는 사중환 네가 맡아서 가져오는 편이 좋겠다. 우리가 만날 곳은 자장에서 이틀거리에 있는 연안(延安)으로 하자.”

왕호와 사중환을 자장으로 먼저 돌려보낸 호충은 영감과 단 둘이 남았다.

짐은 영감의 등에 있는 작은 봇짐이 전부였다.

“정녕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이야 많았지.”

셋째 호성을 패준 일은 송 영감이 이미 알고 있었고, 돈을 훔친 일이나 이후 진천(眞天)대의 일은 모르고 있었다.

“가주 직속 무력 부대인 진천(眞天)대에서 날 쫓아왔었어. 어제 잘 따돌렸지만, 한동안은 자장이 시끄러울 거야.”

“진천대는 쉬이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 업혀.”

호충은 송 영감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제가 어찌···.”

“내 걸음이 빨라서 영감이 쫓아올 방법이 없어. 우리가 들키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호충은 송 영감을 등에 태워 빠르게 산을 넘을 생각이었다.

“혹시 진가장의 무사들과 마주친다면···.”

“영감은 대충 아프다고 하고 보자기를 뒤집어쓰면 모를 것이고 나는 이렇게 하면 되지.”

호충의 손이 얼굴을 스쳐지나가자 전의 온화한 얼굴이 드러났다. 호충이 익힌 역용술의 신비였다.

“허!”

“역용술이야. 신기하지?”

“저도 도련님을 못 알아보겠습니다요.”

“히히. 그러니 영감은 마음 놓고 내 등에 잘 매달려 있어.”

호충은 머뭇거리는 영감의 손을 잡아당겨 목에 걸치고 가볍게 등에 업었다.

“······.”

영감을 등에 업으니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려서 자신을 업어줬던 영감이다. 셋째 호성에게 맞은 날이었다. 얼굴이 퉁퉁 붓도록 맞아서 흙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넓은 영감의 등이 보였다. 그 등에 업혀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만이 아니다. 호란에게 피 주머니를 받고 기절한 날도 영감 덕분에 집에 들어갔다.

‘호란이 고년을 혼내주지 못하고 그냥 왔네. 나중에 꼭 갚아주고 만다.’

“왜 이렇게 가벼워? 업은 줄도 모르겠어.”

“무거우니 가다가 쉬십시오.”

“이대로 화음까지도 갈 수 있겠다. 간다. 꽉 잡아.”

파앙.

“허읍!”

호충은 관도를 벗어나 산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가장에선 아직도 소란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

“아직까지 못 잡았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총관님.”

사마 총관은 황종현을 앞에 두고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진가장에 사람이 몇인데 아직까지 도둑 하나를 못 잡아!”

“······.”

“내부부터 찾으라하지 않았는가! 어찌 황 대주는 무사들을 밖으로 돌리는가!”

“······.”

내부의 인물을 의심하자면, 총관의 집무실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가장 첫째로 의심 받아야하나, 사마총관은 시종들은 극구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사들이었다. 진천대가 아닌 다른 무사들이라도 같은 무사로서 이들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도주한 막내 공자도 찾아야 하기에···.”

여전히 호충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 무사들을 자장에 풀어놓았다. 도둑을 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목적은 호충이었다.

“막내 공자는 어차피 화음으로 갔을 것이니 곧 연락이 닿을 것이다. 나이도 어린 막내 공자가 밖에서 뭘 하겠는가!”

“그야 그렇지만···.”

“도둑부터 찾게! 당장!”

“···당시 장원에 머물던 무사들에게 물었지만, 도둑을 봤다는 이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쉽게 실토를 하겠는가. 증좌를 잡아야지! 내부에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무사들부터 닦달해보시게!”

“···무사가 도둑이라 확정짓지 마십시오. 우리 무인들은 진가장에서 일하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진가장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자긍심이 없는 이가 있었던가! 분명 돈이 필요해졌으니 훔쳤겠지! 도박장에 드나드는 무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젠장. 도박장에 드나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당장 무사들부터 장원으로 소집하게. 돈이 밖으로 나가진 못했을 터! 무사들의 숙소를 확인할 것이네!”

“!”

“아니면 그대가 토해내겠는가? 도둑맞은 금자가 자그마치 이천 냥일세!”

“···알겠습니다. 총관님. 무사들을 소집하고 숙소를 확인하겠습니다.”

덕분에 길을 떠나는 화진은 진가장 무사들의 눈을 피해 화음으로 향하는 길에 오를 수 있었고, 사중환은 왕호에게 자장 흑패를 맡기고 수레를 끌고 나설 수 있었다.

진가장의 총관을 포함한 지도부와 무사들 사이에 작은 불화를 이끌어 낸 것은 덤이었다.

***

“철필 대협.”

“화용루의 루주께서 여기 어찌···.”

화진은 마차를 타고 가다가 관도에서 나귀를 끌고 가는 사중환 일행을 마주했다.

이들의 만남은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가니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철필 대협 혼자 가시나요? 공자님의 의제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 그쪽이 그럼···.”

화진은 사중환 곁에 서있는 옥비연을 보고 호충의 의제라 짐작했다.

“아! 이미 공자님께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요.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저도 함께하자 하셨지요.”

“······.”

옥비연은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사중환은 호충이 화진을 어찌 여기는지 알고 있었기에 오늘이 기회라 여겼다.

“사중환이 대형의 부인이 되실 형수께 인사 올립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어머. 형수라니요···.”

“공자님은 저의 대형도 되십니다. 그간 제가 무례한 것이 있다면 모두 잊어주십시오.”

“···흑부 밑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겠어요. 그러니 당시의 일로 마음 쓰지 말아요.”

사중환이 흑부 마한로와 함께 화용루에 방문한 일이 몇 번 있었다. 당시의 흑부는 화용루를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사중환 또한 화용루에서 행패를 부리며 기녀들에게 무례한 모습을 많이 보였었다. 덕분에 사중환은 화용루의 루주인 화진과 호충이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알면서도 화용루에 차마 걸음하지 못했었다. 화진을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편히 대해주십시오. 형수님.”

“호호호. 듣기 나쁘진 않네요. 두 분은 나귀를 두고 마차로 오르세요. 나귀와 수레는 다른 이들이 맡아줄 것입니다.”

화진은 화음에 가기위해 부랴부랴 준비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마차와 마차를 모는 인부들이었다.

“감사합니다. 형수님.”

옥비연은 둘의 대화를 듣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소생은···. 옥비연입니다. 루주.”

“어머!”

화진은 옥비연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