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동(靜中動)
***
호충과 송 영감이 연안(延安)에 이른 것은 금방이었다. 산길을 이용했지만, 마음껏 경공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이제 하루쯤 쉬면서 기다리면 되겠어.”
적당한 객잔을 잡고 식사를 끝낸 호충은 영감을 남겨 놓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섰다.
“수련 때문에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야 해. 늦을 테니 영감은 여기서 쉬고 있어.”
“오늘 먼 길을 달려 고단하실 터인데···.”
“영감이 너무 가벼워서 피곤하지도 않아.”
“···수련은 적당히 하시고 돌아오십시오.”
수련에 적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호충이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아직까지 자신과 비등한 수준의 무인을 만나지 못했지만, 언제든 은거 고수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황궁과 무림 그리고 마교.’
세 단체에 모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영감. 먼저 자고 있어.”
“예. 도련님.”
‘말만 저리하고 또 날 기다리겠지.’
호충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을 나섰고, 인적이 드문 산으로 향했다.
약초꾼이나 사냥꾼의 흔적을 피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툭.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검갑으로 치우며 나아가길 한참.
한적한 구릉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충은 바닥에 검갑을 내려놓고 정좌했다.
‘오랜만에 심상 대련이군.’
진가장에 돌아간 다음엔 할 일이 많아 심상 대련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살살 좀 합시다. 스승님.’
이번 호충의 심상에 등장한 스승님은 첫째 스승인 송재호였다.
호충은 스승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 오늘도 뒈지겠구나.’
몸 밖으로 검은 기운을 줄기줄기 풍기는 송재호가 오늘 어떤 무공을 사용할지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공(魔空)이야.’
마교(魔教)의 마공(魔空)을 사용하는 송재호는 대적하기 쉽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휘익.
신형을 늘어트리며 빠르게 쏘아져 다가오는 송재호의 손바닥은 검은 기운이 가득했다.
‘명왕장(冥王掌)!’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마교의 장법이었다. 호충은 급하게 피하려다가 장법의 궤도를 살피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휘익.
덕분에 바로 이어지는 연환기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만약 명왕장에 놀라 과도한 움직임을 보였더라면 천패각(天覇脚)에 맞아 기동력을 잃었을 것이다.
‘예전의 내가 아니오. 사부!’
자만은 금물이었다. 송재호의 공세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타닥. 휘익.
호충은 자신의 손에 내공을 집중하여 거력이 담긴 명왕장을 치워내야 했고, 날카롭게 스치는 발길질을 피해 공세를 전환하려 애썼다.
짧은 시간 내에 수십 합의 공격이 이뤄지고 있었고 또 상쇄되고 있었다.
‘기회를 잡아야 해.’
공세 속에서 호충은 스승의 눈을 보며 다음 수를 읽으려 노력했다.
‘······.’
‘뭐냐. 다음은 뭐냐!’
그때 송재호의 손 하나가 뒤로 감쳐졌고, 호충은 눈을 반짝였다.
‘침공파(針空破).’
바늘과 같은 작은 기운을 뭉쳐 날리는 수법이었는데, 호충은 이 작고 빠른 기운을 피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재호의 손이 앞으로 뻗어 나옴과 동시에 호충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장군이오!’
호충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비수 두 개를 날렸다. 하나는 날아올 침공파(針空破)를 향해서였고, 남은 하나는 스승을 노린 것이다.
파삭. 파삭. 슈욱.
‘제기랄. 내가 외통수라니···.’
호충은 송재호의 손에서 발출된 세 개의 침공파(針空破)를 보고 있었다.
두 개의 침공파는 호충이 날린 비도와 함께 사라졌지만, 남은 하나가 자신의 이마에 도달해 있었다.
퍼억.
호충은 머리가 터지는 아찔한 감각과 함께 심상 수련에서 빠져나왔다.
턱.
호충은 옆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팔로 지탱하며 들끓는 내기를 진정시켰다.
“하여간 능구렁이···. 거기서 멍군을 날리십니까? 애초에 계획이 있으셨던 거죠? 내가 속았네. 속았어!”
한참 정좌하여 내기를 진정시켰고 이후엔 경혼무흔(驚魂無痕)을 수련했다.
내공심법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검(劍), 도(刀), 권(拳), 각(脚), 퇴(腿), 조(爪)의 활용법을 수련하는 것이다.
그 중에 호충이 선택한 것은 검(劍)이다.
호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고, 또한 천천히 검식을 따라갔다.
도무지 검식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느릿한 검식이었다.
뚝뚝.
하지만 호충의 얼굴은 금방 땀으로 젖어 땀방울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경혼무흔(驚魂無痕)에 포함된 무공들의 특징이었다. 고요한 움직임 가운데에서 수많은 변화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검식에 쏟아 부어야할 공력이 막대했고, 심력 또한 최대한으로 집중해야 했다.
푸욱.
어쩌다 내딛는 발은 땅으로 깊이 파고들며 족적을 만들었고.
으득.
온 몸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 이가 부서지도록 턱을 다물어야 했다.
‘이 힘이 다 빠져야 하는데···.’
경혼무흔의 검을 대성하면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오의에 달하면 정중동(靜中動)의 묘리를 내포하면서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 한참 멀었다.’
아무렇게나 힘을 뺀다고 빠지는 힘이 아니었다.
정중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검식을 펼칠 수 있으려면 지금의 과정을 온전히 거쳐야 했다. 지금은 황궁의 비고에서처럼 빠른 습득이 불가능한 단계였다.
호충은 조금이라도 검이 빨라질 것 같으면 더욱 공력을 집중해 붙잡았다.
심력이 모자라면 진양의(眞兩意)를 동원해 추가로 정신을 집중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호충의 공력과 심력이 바닥날 때쯤이었다.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지 검이 자신을 휘두르는 지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을 잊어버렸고, 심상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무의식에 빠져 공허한 눈으로 검을 휘두르던 호충의 검은 자연스럽게 좌측 공간을 넘어서 오른쪽에 나타났다. 검은 멈춘 듯 보였지만,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후에도 전후좌우를 번뜩이며 모습을 보이던 검은 다시 호충의 가슴 중앙으로 돌아왔다. 무의식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호충은 자신이 펼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경혼무흔(驚魂無痕)의 검(劍).’
털썩.
진이 빠진 호충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마지막엔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
잠깐이지만 정중동의 달콤한 맛을 볼 수 있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잖아!”
화경(化境)에 올라서야 진정한 무공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 호충이다.
호충은 경혼무흔(驚魂無痕)의 심법으로 다시 내기를 가다듬으며 의욕을 불태웠다.
“또 해보자. 이번엔 확실하게···.”
감각을 놓치기 전에 다시 검을 연마하려던 호충은 시위가 너무 어두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검은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초승달이 미소 짓고 있었다.
“···영감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겠어.”
잔뜩 힘이 들어갔던 팔에 늘어지며 검첨이 바닥을 향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앞으로 평생 연마해야할 무공이야. 조금 돌아가도 괜찮아.”
진한 아쉬움을 달래며 얼른 검갑에 검을 수납하고 몸을 돌렸다.
호충이 떠난 자리엔 깊은 족적만이 남아 있었다.
***
다음날 호충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옷을 갖춰 입었다. 면경으로 얼굴도 살피고 옷은 말끔한지 다시 확인했다.
“좋아. 이제 슬슬 마중 나가 볼까?”
“저는 객잔에서 기다립지요.”
“같이 가고 싶긴 한데, 오늘은 어쩔 수 없겠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조금 많이 움직여야 하거든.”
“다녀오십시오. 저는 밖에 나가지 않고 안에서 도련님만 기다리겠습니다.”
호충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어제 늦게 잠들어서 피곤할 테니 낮잠이라도 자고 있어.”
“그러면 되겠습니다. 허허. 이러다가 게을러질까 걱정입니다.”
“평생 고생했으니 이제 좀 게을러져도 돼.”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큰일 나는 법입니다요.”
“시간 날 때마다 내가 알려준 숨쉬기는 계속해. 알았지?”
호충은 송 영감이 익힐 수 있는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일러줬다. 황공의 비고에서 젊음을 되찾아주는 주안술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겉모습만을 그럴싸하게 바꾸는 무공이었기에 진정한 의미의 주안술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흔(無痕)에서 나온 내공심법만을 송 영감에게 일러주었고, 어제 잠들기 전에 직접 진기도인까지 도우며 심법을 알려줬다.
“제가 함부로 익혀도 될지···.”
“그래서 다른 것도 같이 익히라고 했잖아. 내가 가르쳐준 내공심법(內功心法)을 한 시진동안 연마했으면, 잠룡진(潛龍陣)을 두 시진 동안 익혀야 해. 그럼 외부에 전혀 드러나지 않아. 잠룡진(潛龍陣)을 완전히 익히면 그때부터는 내공심법만 집중하면 될 거야.”
“···누가 알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오라 저 같은 것이 익혀도 될지가 걱정입니다.”
한낱 종복에 불과한 자신이 감히 무림인들이 익히는 내공심법을 받아도 되는지 싶은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밖에서 송 영감은 내 할아버지야. 난 진가장의 놈들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직 송 영감뿐이야.”
“···도련님.”
“송 영감도 진원우가 내 아비가 아니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잖아.”
“······.”
차마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 입을 다무는 송 영감이다.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도 무공을 배웠어. 내 할아버지가 배우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알겠습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익힐 터이니 그런 말씀은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다녀와서 열심히 했는지 검사할 거야.”
“도련님이 겁나서라도 해야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호충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객잔을 나섰다.
‘···도련님의 아버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진씨 세가의 아들이 아니라도 호충을 피붙이만큼 아끼는 송 영감이다.
***
호충은 느긋하게 객잔을 나서서 연안(延安)을 빠져나갔다.
‘사중환이나 옥비연은 알아서 수레를 끌고 올 것이고···.’
기다리기만 해도 될 일이나, 연인이 관도에서 겪을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화진이는 체력이 약해서 내가 도와야해.’
연안(延安)에 도착해도 화음(華陰)까지 달포는 더 걸리는 길이다. 미리부터 힘을 빼버리면 중간에 수련도 할 수 없었다.
호충은 가볍게 자장(子張)으로 향하는 관도를 걷다가 인적이 뜸해진 틈에 풀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가볍게 발을 굴러 나무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파박.
‘오늘도 경신비천(輕身飛天) 수련이군.’
호충의 모든 행위는 무공 수련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해.’
송 영감을 업고 오면서도 계속해서 더 효율적인 경신법을 궁리했다. 경신비천이라는 희대의 경신법이 있었지만, 이것 또한 오현락 스승이 기존의 경신법에 안주하지 않고 발전을 꾀하였기에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스승님들은 내가 기존의 무공에 안주하길 원하지 않으실 거야.’
호충은 스승이 창안한 무공에서 안주할 수 없었다.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심상 수련에서 이길 수 있다.’
심상 수련 속에서 스승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대성한 상태였고, 여기에 서로의 무공과 비고의 무공 비급까지 익힌 절대자로 등장했다. 호충이 스승들과 같이 기존의 무공을 익혀봐야 동등한 경지에 올라 동률을 만들 뿐이다. 스승을 넘어서려면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경신법을 펼치는 호충의 신형은 용천혈(湧泉穴)에서 쏘아져 나가는 내공과 몸을 가벼이 하는 경신비천의 진기도인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호충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경신법의 진기를 관조하면서도 깊은 명상을 이어갔다. 진양의(眞兩意)가 자연스럽게 호충의 명상을 보조하고 있었다.
경신법을 펼치던 호충은 순간 자리에 멈췄다.
“······.”
그리고 어제 무의식 속에 펼쳤던 정중동(靜中動)의 검법을 떠올렸다.
‘어제 경혼무흔의 검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얼른 검갑에서 검을 빼내어 가볍게 휘둘렀다.
휘익. 샤악.
정중동(靜中動)의 검법을 다시 펼치려는 마음이었다.
“···그냥 되면 얼마나 좋겠냐.”
무의식에서 잠깐 맛을 본 검이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재현할 수 없었다. 그저 휘두름과 빠름이 끝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경공을 사용하면···.’
본래 경신법(輕身法)이라는 것은 몸을 가볍게 하여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사용하거나, 보법과 함께 활용하여 반사 신경과 순발력을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내공의 소모가 적고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경신법을 높이 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림인이 아닌 이들은 이러한 무림인의 경공(輕功)을 축지(縮地)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땅을 접으며 이동한다 생각할 정도로 빠르다는 뜻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축지는 아니었다.
‘정말 축지(縮地)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호충이 생각한 경공(輕功)의 발전방향이었다.
정중동(靜中動)의 검이 보여준 모습처럼 경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더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이는 곧 무공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경혼무흔의 검이 후발선지(後發先至)의 검술로 활용되듯이 몸을 움직이는 신법(身法)도 후발선지를 따를 수 있음이다.
‘정중동의 검술만 해도 막을 이가 없을 것인데, 신형까지 그리 움직인다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을까.’
호충은 정중동의 묘리를 경신법(輕身法)에 접목하는 날이 심상 수련의 분기점이 되리라 여겼다.
휘익. 휙. 샤악.
하지만 아무리 지금 검을 휘둘러도 어제의 검은 재현할 수가 없었다.
“아직 멀었지만···.”
얼른 검을 검갑에 넣고 다시 경공을 발휘해 달려 나갔다. 오늘은 화진과 일행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