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혼무흔(驚魂無痕)
***
마차를 뒤로하고 부리나케 달려 도착한 객잔에서 호충은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영감은 뭘 하고 있으려나?’
호충은 기감을 끌어올려 안의 사정을 살폈다.
‘열심이네?’
호충은 송 영감이 자신이 알려준 내공심법을 연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요한 방에서 작은 내공의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충은 발걸음 소리를 줄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오.’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확연하게 내공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벌써 이 정도까지?’
생각보다 송 영감의 자질이 괜찮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확인할 수는 없었다.
혹여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 호충은 그 자리에 서서 영감이 정좌를 풀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고른 숨소리를 내던 영감은 코로 날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아이쿠. 도련님.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방금. 내공심법은 방해 받으면 큰일이라 일부러 조용히 했어.”
“제가 도련님이 오신 것도 모르고···.”
“그보다 잠깐 팔을 줘보겠어?”
호충은 영감이 내미는 팔을 잡아 내부를 살폈다. 얼마나 내공을 쌓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고작 하루 만에 쌓을 내공이 아닌데···.’
송 영감은 어제 막 진기도인을 배웠고, 오늘에서야 본격적으로 무흔(無痕)의 내공심법을 시작했다. 아무리 무흔(無痕)이 천고의 내공심법이라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흐음.”
‘뭘까. 무엇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자신이 가끔 안마하며 전해줬던 내공을 떠올렸지만, 그래봐야 제대로 내공심법을 익히기 전이라 몸에 남아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호충은 고민을 이어가다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 그때!”
호충은 자신이 영감에게 먹였던 산삼(山蔘)을 떠올렸다.
‘한 겨울에도 순이 시들지 않은 산삼이 흔할까?’
영감은 수령이 족히 오백년은 된 천종산삼이라고 했었다. 손바닥처럼 갈라진 잎사귀는 파릇파릇 생생했고, 뿌리의 모양은 인삼(人蔘)과 비슷했다. 사실 산삼은 인삼과 모양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밭이 아닌 산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긴 잔뿌리를 가져야 했고, 밭의 인삼과 달리 양분을 많이 흡수할 수 없었기에 아주 작은 크기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산삼은 겨울에 잎사귀가 시들어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만약 그것이 영약인 인형설삼(人形雪蔘)이었다면 지금 영감의 내공이 말이 된다.’
인세에 쉽게 나오지 않는 영약이니 아무리 약초를 다뤘던 송 영감이라고 해도 인형설삼을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어. 그래서 이런 현상이···.”
“좋은 일이면 좋겠습니다만···.”
“좋은 일이야. 영감은 걱정할 일이 없어.”
“그래도 일반적이진 않은 모양인데···.”
호충은 걱정 가득한 송 영감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털어놨다.
“전에 천수에서 영감이 먹었던 삼(蔘)의 기운이 몸에 남아있었어. 내공심법을 운용하면서 그 기운이 내공으로 변화해서 지금 단전에 쌓이는 중이야. 삼을 먹고 시일이 오래 지나지 않아 다행이네. 덕분에 많은 기운을 내공으로 바꿀 수 있겠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 영약을 먹게되면 흡수하지 못한 영약의 기운이 몸으로 퍼져 쌓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운을 잃게 된다. 무림인들이 환장하는 영약은 내공심법을 연마해야 내공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송 영감은 이미 영약을 먹고 몇 주가 지난 다음이라 많은 기운을 소실했음에도 상당한 기운을 내공으로 응집하고 있었다. 이후 심법에 박차를 가하면 나머지 기운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삼의 기운이 몸에 남아 있었군요.”
인형설삼은 영약 중에서도 양기가 강하기로 유명한 영약이었다. 한 겨울 음기가 절정에 달해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인형설삼이다. 이는 그만한 양기를 품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양기(陽氣)가 상당한 삼이었어. 추운 겨울에도 영감 몸이 따뜻했잖아.”
송 영감도 삼을 복용한 후 자신의 몸이 달라졌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습지요. 찬바람이 쌩쌩 불어도 시원했습니다.”
“호흡법은 조금 일찍 알려줄걸 그랬네.”
“지금도 좋습니다. 알려주신 것을 열심히 익혀서 도련님이 주신 삼의 기운을 다 흡수하겠습니다.”
“흐흐. 그래.”
호충은 자신이 캔 삼으로 영감의 내공이 더욱 크게 불어난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다. 일찍 알려주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헌데 어찌 혼자 오셨습니까. 일행은 찾지 못하셨습니까?”
“아. 찾았지. 마차타고 편하게 오더라고. 그래서 내일 만나기로 했어.”
“사중환과 옥비연이 마차를 빌렸습니까?”
“큭. 화진이와 중간에 만난 모양이야.”
“아!”
“내일 정오에나 도착할 테니 우린 편히 쉬자고.”
“도련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식전이네.”
호충은 고된 수련을 한 둘을 먹이라고만 하고 자신이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때가 한참은 지났습니다.”
“영감도 안 먹은 거 아냐?”
“호흡법에 재미가 붙어서 그만···.”
“흐흐. 좋은 현상이야. 대신 오늘 남은 시간은 무조건 잠룡진을 연마하는 거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우선 객잔으로 가서 요리부터 시키시지요.”
“비싼 요리로 잔뜩 시켜먹자.”
“허허. 도련님 덕분에 제가 호강하겠습니다.”
***
호충이 허기진 배를 채울 때 사중환과 옥비연은 간단하게 식사를 끝내고 마주하고 있었다.
“대형은 어찌 저렇게 자상하게 우리를 대해주시는지···. 형님도 느끼지 않았소?”
“나라고 모르겠느냐. 우리의 의지가 혹여 무뎌질까 왕호의 얘기까지 꺼내시지 않았느냐. 왕호 앞에서도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리가 굳어 산을 내려오지 못하니···.”
살뜰하게 자신들을 챙겨서 산을 내려와 놓고 타박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호도 같았다며 위안하지 않았던가.
“내려와서는 너와 내 다리까지 정성으로 주물러주셨다. 아프다하면 아픈 곳을 피해 주무르셨지.”
둘은 오늘 호충에게 깊이 감명 받고 있었다.
“내려준 무공은 또 어떻습니까. 엄청난 무공을 내려 주시고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기시지 않습니까.”
“남들 같았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잘난 척 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저 같으면 돈이라도 내 놓으라고 했을 겁니다.”
옥비연은 호충을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렸다. 말동으로 인해 시작된 인연이었다. 자신을 해친 흉수를 찾기 위해 배수패에 방문한 호충은 동생들을 먹이라며 거액을 선뜻 내주었고, 흑패를 접수한 다음엔 일터까지 마련해주었다. 지금까지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받은 것은 너무 많았다.
특히 자신을 따르겠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금원보를 맡긴 신뢰는 지금도 가슴을 떨리게 했다.
“이 마음을 다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믿어라. 그리고 대형께서 시키는 대로 고강한 무공을 익혀라. 그것이 대형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이다.”
“예. 형님. 꼭 그리하겠습니다.”
“나도 네게 약속하마. 나도 대형의 명을 가장 앞에 둘 것이다.”
‘나이가 많아 형님이라고 불러왔지만, 이젠 진정으로 형님으로 대하겠습니다. 형님.’
자연스럽게 서열관계가 정립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일어나야겠지요?”
“끄응. 다리가 또 말썽이다.”
“그래도 처음보단 낫습니다. 아까 대형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면 더했을 겁니다.”
“일어나지도 못했겠지.”
“그럼 구보라도 시작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될 것도 다 아시고 그리 말씀하셨을 테니까요.”
“간다. 가.”
옥비연과 사중환은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
양허객잔.
호충은 여러 요리를 시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방으로 돌아와 영감이 잠룡진을 연마하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무공을 수련할 시간이었다.
“쉬고 있어.”
“다녀오십시오. 저는 호흡법을 더 하고 있겠습니다.”
‘제대로 재미가 붙었네.’
호충은 영감을 말리지 않았다. 내공심법을 연마하면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피로가 풀리기 때문이다.
“잠룡진이 우선이야. 알지?”
“예. 도련님.”
호충은 어제 봐뒀던 산중 구릉으로 향했다.
‘오늘도 맛 볼 수 있을까?’
어제 느꼈던 아찔한 정중동의 맛이 계속 떠올랐다.
어제 수련하던 구릉 근처에 도착한 호충은 검갑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바로···.’
검병을 잡은 손이 검을 빼어들지 않고 멈췄다.
“젠장. 급하다고 생쌀을 씹어 먹을 생각이야?”
본래 자신의 수련은 심상 대련을 먼저 진행하고 이후 부족한 무공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정중동에 마음이 빼앗긴 바람에 이를 무시하고 무공만 익히려 했음이다. 조급함은 무공을 수련하는데 독이었다.
호충은 검병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자신의 족적이 새겨진 곳에 정좌했다.
‘송 사부. 진양의(眞兩意)는 정말 대단합니다. 내 짧은 생각으론 무공을 제대로 연마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자신의 부족한 지혜와 판단력을 송재호의 진양의가 보완해주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조금 살살 합시다.’
매번 심상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소리였지만, 매번 호충의 기대를 배신하는 심상 수련이다.
호충의 심상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스승이 등장한 것이다.
‘하아. 파 스승님.’
호충이 역용술(易容術)로 활용했던 파진후가 등장했다.
‘오늘은 날 어찌 죽이실 작정이오.’
파진후가 나온 이상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무슨 무공으로 어떻게 죽는 지였다.
파진후는 눈앞까지 검갑을 들어 올렸고, 천천히 검신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 날 위로 보이는 일렁이는 눈빛이 호충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오늘따라 더 멋있습니다. 스승님.’
아무리 아부를 떨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두 손으로 검을 잡아 가슴 앞에 세운 파진후의 자세는 완벽 그 자체였다, 호충은 파진후의 기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그 어느 곳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기수식에 호충은 절로 식은땀이 났다.
‘어제 겨우 맛만 봤는데 이걸 들고 나오시면···.’
하지만 기수식이 완벽하다고 몸이 굳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할 것이다.
호충은 심상 수련에서 정중동을 구경할 수 있음을 위안삼아 발을 굴렀다.
타앗.
샤악.
호충의 검이 파진후의 왼쪽으로 돌아가 비어있는 옆구리를 찔렀지만,
팅.
호충의 검이 옆으로 튕겨지며 오히려 빈틈을 드러냈다.
‘후웃!’
호충은 뒤로 빠르게 물러서며 어제 송재호에게 맞았던 침공파(針空破)를 날렸다.
슉.
소리는 하나였지만, 날아가는 침공파는 셋이다. 배운 대로 써먹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침공파를 맞이하는 사람은 호충이 아니라 파진후라는 점이 달랐다.
파사삭.
세 개의 침공파는 파진후의 근처에서 가볍게 소멸했고, 파진후는 여전히 검을 가슴 앞에 올린 기수식의 모습 그대로였다.
‘검이 보이지도 않아.’
어제 자신이 잠시 맛을 본 정중동의 검은 중간에 모습을 감췄지만, 파진후의 정중동은 아예 공방의 흔적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검을 쳐낸 검도, 침공파를 소멸시킨 검도 보이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으면 드러나게 해야지.’
호충은 다시 앞으로 뛰쳐나갔고, 검을 땅으로 향했다.
파바박.
바닥의 흙을 긁어모아 파진후가 있는 곳으로 던졌고, 곧 파진후 주변은 흙먼지로 가득해졌다.
팅.
호충은 마지막으로 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검으로 날리고 자신도 뒤를 따랐다.
호충의 눈에 흙먼지를 가르며 날아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파사삭.
호충은 돌이 터져나간 반대편으로 몸으로 돌려 공격을 감행했다.
슈욱.
정직한 찌르기.
애초에 변초가 소용없는 스승들이라 기본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상대해야 했다.
호충은 자신의 검신을 막아서는 파진후의 검을 느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늦어졌다.’
공격이 막힐 것은 예상한 바였다. 시간차가 생긴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뒤로 훌쩍 물러선 호충은 주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팅. 팅. 팅.
시간차를 두고 날린 돌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파진후에게 도달하도록 계산되어 있었고, 호충의 손은 앞으로 뻗어 나왔다.
‘침공파(針空破)’
세 개의 돌과 세 개의 침공파가 동시에 파진후를 향했고, 호충은 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은형비도(隱形飛刀) 발(發)!’
여기에 열두 개의 형체가 흐릿한 비도가 더해졌다.
그제야 호충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모든 공격이 파진후에게 도달했을 때 호충의 검도 파진후 앞에 도달해 있었다.
파삭.
‘!’
파진후에게 모든 잡스러운 공격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검식은 단 하나였다.
남은 것은 호충의 검 하나였다.
‘끄윽.’
하지만 사실 남은 것이 아니었다. 호충의 팔은 검과 함께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파진후가 날린 단 하나의 검식에 호충도 함께 양단된 다음이었다.
“푸헉.”
심상 수련에서 빠져나온 호충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속을 게워냈다.
“우웨에엑.”
한참 속을 진정시킨 호충은 비틀거리며 자리를 옮겨 다시 정좌했다.
오늘의 심상 수련을 복기하기 위함이었다.
‘정중동(靜中動)은 잡기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시간차로는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어.’
자신이 어제 맛봤던 정중동의 검은 극히 초반의 일부였을 뿐이다. 진정한 정중동의 검은 더욱 빠르고 날카로웠다. 또한······.
‘어기충검(御氣充劍)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호충은 파진후의 검기에 맞았다. 물 흐르듯 이어진 파진후의 검은 단 한 초식으로 호충이 날린 모든 공격을 파훼하고 호충의 몸까지 양단했다. 처음의 공격범위를 넘어서 날아오는 검기에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깔끔하게 당했다.
“제자는 이제 겨우 맛만 봤는데, 거 너무하신 거 아니오!”
이런다고 파진후가 미안해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떠오른 심상의 파진후는 들어 올린 검에서 빛나는 강기(强氣)를 드러내 보였다.
“하아. 썩을. 검강(劍强)을 쓰지 않았으니 고마워하란 말입니까?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호충도 검을 들어 강기(强氣)를 만들어냈다. 호충도 화경(化境)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효용은 파진후의 것과 한참이나 차이가 있었다. 강기의 크기와 밀집에서 드러나는 차이였다. 확연히 보이는 차이에 호충은 후다닥 강기를 거뒀다.
“···물론 내가 좀 약하긴 하지요. 그래도 다음엔 좀 살살 합시다. 예?”
호충은 심상을 지우고 내기를 가다듬으며 자신의 수련을 이어갔다.
검갑을 내려놓고 두 주먹을 쥐었다. 파진후의 검에 맞아 오늘은 검을 들고 싶지 않았다.
정중동의 검에 대한 조급함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봤자 내가 익혀야할 권각법도 결국 파 스승님의 가르침이네.”
호충은 경혼무흔(驚魂無痕)에 기록된 권각법(拳脚法)을 떠올리며 보법을 밟아 나갔다. 부드럽게 뻗어나간 권(拳)에는 강맹한 기운이 서려 있었고, 공간을 가르는 각(脚)에는 도끼와 같은 묵직함이 있었다.
타닥. 탁.
호충의 신형은 점점 속도를 더했고, 마지막엔 눈으로 쫓기 힘들만큼 빨라졌다. 그리고 점차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어제와 같은 느릿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권이 발출되어 마지막에 도달하기까지 한 세월이었다. 발차기도 다르지 않았다. 들어 올린 발은 공간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리를 들고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호충은 힘겹게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앙다문 턱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중동을 완벽하게 익히고 말리라.’
권각(拳脚)도 검(劍)과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경혼무흔(驚魂無痕)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