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공(歡喜功)
***
드르륵.
보물창고에는 금원보가 나란히 줄을 맞춰 서있었고, 금자와 은자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또한 족자가 돌돌 말려 가득 채워져 있었고, 옥으로 조각한 불상과 금두꺼비와 금송아지도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
사중환이 깜짝 놀라서 호충을 돌아봤다.
“큭. 하여간 이 새끼들은 당장 뒈질 걸 모르고 이렇게 모아둔다니까.”
“···어찌 하올까요.”
비연의 말에 호충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금원보와 금자만 챙기자. 나머지는 흑패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될 것이다.”
“예. 대형.”
호충은 비연이 건넨 천으로 피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직 소란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정리가 된 듯이 보였다. 여기저기 기절해 널려있던 놈들이 치워져 있었고, 죽은 두 놈도 보이지 않았다.
양소가 호충을 보고 얼른 다가와 말했다.
“영업장까지 접수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패주.”
“알아. 빨리 정리해야 잡음을 최소화 할 수 있지.”
영업장에서 일하는 놈들은 이곳의 사정을 아직 모를 터이니 반발이 있을 수 있었다.
“사중환.”
“예. 대형.”
“위지승과 함께 가서 영업장 접수를 도와라. 옥비연 너도 마찬가지야.”
“예. 대형.”
“허허. 두 분이 지원해주시면 수월하겠습니다.”
“양소. 이 둘은 수하이기 전에 내 의제다. 혹여 이 둘이 상한다면 연안에서 흑패의 씨를 말릴 것이니 알아서 해라.”
방금 허창 흑패의 수뇌부 둘을 죽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
양소는 창백하게 질려버렸지만, 사중환과 옥비연은 뭉클한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대형···.”
“아···.”
“가서 뒈지지 말고 잘하란 소리다. 칼에는 눈이 없어. 큼.”
호충은 자리를 뜨려고 걸음을 서둘렀다.
“바로 정리하고 따르겠습니다. 대형.”
“늦지 않도록 돌아가겠습니다.”
“천천히 와. 급하게 움직이면 다된 일도 망치는 법이다. 객잔은 감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잡으라 하였으니 그리로 오면 될 것이다.”
“옙!”
***
호충은 연안에서 감천으로 향하는 방향에 세워진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이 몇 있었지만, 마차 바퀴가 자국이 향한 객잔은 하나였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서옵셔! 식사만 하십니까?”
“안에 일행이 있소.”
호충은 안으로 들어가 객잔에 앉아 있는 송 영감과 화진을 만날 수 있었다.
“가가. 괜찮으신 거죠?”
“도련님.”
“별일 없었어. 다들 고만고만하더라고.”
“사중환과 옥비연은 두고 오셨습니까.”
“잡일이 남아서 맡겨 놓고 왔어. 아마 다 끝내고 오려면 밤이 되어야 할 거야.”
.
.
.
그 시각 의욕 충만한 둘은 연수흑패와 함께 영업장을 하나씩 돌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 있었다. 패주가 아닌 흑패의 조직원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빠각.
“와라!”
옥비연의 손으로 돌아간 나뭇가지가 다시금 몽둥이로 일하고 있었고.
퍼벅. 퍽.
사중환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나뭇가지도 힘차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비연! 싹 때려잡아!”
“예! 형님!”
방금까지 봤던 호충의 무위가 뇌리에 남아 있어 남자의 웅심을 들끓어 오르게 했다.
.
.
.
호충의 예상대로 둘은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사중환이 호충 앞에 나섰다.
“대형. 명하신 바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둘은 허천흑패의 영업장을 다 돌고 뒷처리를 위지승과 양소에게 맡긴 다음 돌아왔다.
“대체 얼마나 맞았냐?”
둘은 그리 깔끔한 복색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뒹굴었는지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입가에도 핏자국이 보이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별로 안 맞았습니다.”
“으이그.”
호충과 같은 무시무시한 무위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몸은 마음과 달랐다.
서로 때리고 맞으면서 힘겹게 허천흑패의 조직원들을 상대한 둘이다.
“위지승하고 양소는 뭘 했어? 내가 분명 너희가 상하면 연안에서 흑패의 씨를 말리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녀석들 덕분에 이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위지승이 그나마 힘을 썼고···.”
“양소는 몸으로 막았지요.”
“···아무래도 너희는 좀 더 굴러야겠다.”
“넵! 구르고 싶습니다.”
“저희를 단련시켜 주십시오.”
호충의 무위는 이들이 꿈에 그리던 모습이었다. 호충과 같이 수십을 상대할 무공을 어서 빨리 익히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눈빛은 살아있네.’
호충은 두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것으로 만족했다.
“이거나 받아.”
툭. 툭.
호충은 탁자에 주머니를 올려놨다.
“아까 챙긴 거에서 좀 뺐다.”
“헙!”
“우아!”
주머니엔 금원보가 두 개씩 들어 있었다.
“내일 가서 애들 술과 고기 좀 먹이면서 흡수한 조직을 다져야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중환은 주머니를 챙기며 위지승과 양소의 말을 전했다.
“아까 연수흑패의 둘이 대형이 진가장에서 오셨음을 알아챘습니다.”
“엉? 녀석들이 날 알아봤어?”
“······어쩌다가 그리되었습니다. 자장에 진가장이 있지 않습니까.”
차마 자신들로 인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알릴 일이긴 했으니······.”
다른 조직원은 몰라도 흑패의 수뇌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녀석들은 내일 따로 만나야겠군.’
호충은 고생하고 둘을 얼른 객잔의 숙소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호충의 발걸음은 객잔 별실로 향했다. 전에 화진과 약속한 대로 따로 방을 잡은 것이다.
“흠흠.”
호충은 헛기침을 한 다음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연인과의 만남이었다.
“···진 가가.”
“밖이 아니라 아쉽진 않지? 밖에선 다음에 날이 풀리면 시도해보도록 하지.”
“무, 무슨 말씀이세욧!”
호충은 얼굴을 붉힌 화진을 끌어안았고, 화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겨왔다.
.
.
.
뜨거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 호충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화진이도 수련을 시작해야지?”
“언제 말씀하시나 했어요.”
명경수(明經手)가 외모를 아름답게 해주고 젊음을 유지시켜준다고 했기에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으면 어쩌나. 무공은 본래 강해지려고 배우는 것이지, 예뻐지려고 배우는 것이 아냐.”
“물론이죠. 저는 상관없어요.”
“그럼···. 다른 것부터 시작하지.”
“가가!”
“하하하. 명경수(明經手)든 운경보(雲輕步)든 내공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잖아. 시작은 내공심법이야.”
“쳇. 진즉에 그리 말씀하셔야죠.”
호충은 송 영감에게 했던 것처럼 화진의 진기도인을 도우며 내공심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전에 방중술(房中術)부터 시작할까? 어차피 기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니 미리 배워야지.”
“그, 그런 무공도 있어요?”
“환희공(歡喜功)은 정말 대단한 무공이야. 잘하면 내공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걸?”
“명경수(明經手)도 빨리 익힐 수 있겠네요?”
“화진이 머리엔 오직 명경수밖에 없구나. 하하하.”
“아니라고욧!”
***
호충은 일찍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화진에게 약속한 마차를 마련해야 했고, 어제 접수한 두 개의 흑패를 정상화시켜야 했다.
“식사 마쳤으면 가자.”
“예. 대형.”
“준비 되었습니다.”
호충은 사중환과 옥비연을 양쪽에 두고 연수흑패의 본거지로 향했다.
화진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어나 나가는 호충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고, 송 영감은 그런 화진에게 말을 붙였다.
“뒷모습도 참 믿음직합니다. 그려.”
“맞아요. 어르신. 어찌나 듬직한지···.”
“빨리 날을 잡아야 할 터인데···.”
“그럼요. 날을 빨리···. 어, 어르신 너무 급하셔요.”
저도 모르게 긍정하던 화진은 화들짝 놀랐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 스물여섯이 된 화진에게 혼인은 정말 화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명경수(明經手)에 집착하는 것이다.
“마음은 있으신 거지요?”
“···어르신. 저는 기루의 기녀에 불과합니다. 가가는 진가장의···.”
무엇보다 호충이 진가장의 직계라는 점이 가장 걱정이었다. 호충이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가장의 누구도 도련님께 명령할 수 없습니다. 도련님께서 결정하셨다면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송 영감은 이미 진가장에 미련을 두지 않는 호충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르신 말씀대로만 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앞으로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씨.”
“편히 대해주시어요. 어르신.”
“허허허.”
송 영감은 내공이 들어찼기 때문인지 화진의 말을 전보다 편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
호충은 위지승과 양소를 앞에 두고 자신이 진가장의 막내임을 알렸다.
“그럼 진가장이 흑패를···.”
“그건 아니야. 진가장의 가주를 비롯한 누구도 내가 흑패를 규합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차피 나는 진가장의 막내에 불과하기에 앞으로도 진가장에서 얻을 것은 없다.”
사중환과 옥비연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다.
“너희는 앞으로 중원의 모든 흑패를 접수할 선봉장이 될 것이다. 나는 중원에 흑패 천하를 이룰 것이다.”
“!”
“!”
“물론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가능하겠지?”
“후우. 분명···. 가능할 것입니다.”
양소는 어제 직접 본 호충의 무위라면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흑패 천하라니···. 누가 이런 거창한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나 혼자서는 못 한다. 너희가 있어야 가능하지.”
“···저희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위지승은 어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천운이라 여기고 있었다.
“네가 보기에 사중환과 옥비연이 그리 대단한 무위를 갖췄더냐?”
“······.”
사중환의 경우 상당한 무위를 보여줬지만, 옥비연의 경우 자신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내 의제들은 나를 따르기 위해 피가 마르는 무공 수련을 이어갈 것이다. 위지승 네가 나이가 들었다고 걱정할 것 없다.”
“저, 저도 무공을 익힐 수 있사옵니까?”
“너뿐이 아니지. 양소. 너는 어찌하겠느냐.”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좋다. 너희 둘이 익힐 무공을 마련해주마.”
“!”
“!”
기대가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둘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희는 아직 멀었다. 신체 단련이 되지 않으면 무공을 익힐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너희는 몸을 극한으로 단련한 다음에나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천수흑패의 류창과 나준이 기초를 연마하고 있었고, 자장 흑패도 왕호의 지도아래 기초를 연마 중이다. 사중환과 옥비연도 이제야 기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기초가 있어야 좋은 무공을 연성할 수 있는 법이다.”
둘은 당장이라도 무공을 익히고 싶어 했지만, 호충은 이들을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다른 의제들보다 먼저 가르칠 수는 없었다.
“사중환과 옥비연이 돌아와 너희에게 무공을 일러줄 것이다.”
“······.”
“······.”
둘이 돌아보자 사중환과 옥비연이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둘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넌 아냐?’
‘형님이 모르는데 제가 알겠소?’
“그보다···. 너희도 곳간을 열어야지?”
양소가 위지승을 돌아봤고, 위지승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올게 왔구나.’
연수흑패의 패주였던 위지승은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이미 허두진의 금고가 어찌되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소. 내 드려.”
“예. 형님.”
양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부를 가져다 바쳤다.
호충은 장부를 열어 살피며 연수흑패의 수입과 지출을 꼼꼼하게 계산했다.
“···양소. 여기 금액이 빈다? 금자 한 냥이 사라졌네?”
양소가 호충 곁으로 와서 살피고 바로 답했다.
“형님이 가져다 썼습니다.”
“···그럼 여긴.”
“그것도···.”
“여기는 좀 크게 비는데?”
양소의 입이 열릴 때마다 위지승은 눈에서 불을 뿜을 듯이 쳐다봤지만, 양소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답했다.
“그날은 형님 댁에 경사가 있어서···.”
“···그럼 이 날은?”
“·········이유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패주가 가져가겠다면 가져가는 거죠.”
“위지승 위치로.”
착.
위지승이 잔뜩 긴장해서 앞에 섰다.
“어제 허두진과 태사원이 염라대왕을 만나서 네 얘길 많이 했을 거야. 사이좋게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줄까?”
“···살려주십시오.”
“다 어쨌냐? 지금 내가 한 달 치도 다 안 봤는데, 네가 가져간 것만 한참 나왔거든? 일 년 치만 뒤져봐도 상당하겠는데?”
“······.”
“참고로 자장 흑패의 패주였던 녀석은 다리병신으로 끝났어. 너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냐?”
“!!”
사중환과 옥비연이 바람을 잡았다.
“대형. 마한로는 그래도 착실하게 대답을 잘 했으니 그 정도에 그쳤죠.”
“아니죠. 형님. 나중에 손등에 칼도 박히지 않았습니까?”
“아. 손등에 구멍을 뚫어주긴 했었지. 그건 별거 아니니까 무시하자. 침 바르면 낫는다. 손가락을 자른다고 했는데도 녀석이 입을 다물어서 그런 거야.”
“···저, 저는.”
“얘들아 재갈 물려라. 애들 놀라지 않게.”
“옙.”
사중환과 옥비연이 양쪽에서 팔을 잡자 위지승이 대경해서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거든. 어디 네 거짓말이 얼마나 능숙한가 보자. 우선 뒤로 감춘 손부터 내놔봐. 묶어놓고 시작하자.”
“···저, 전장에 맡겨놨습니다.”
보통 흑패의 패주는 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법적인 일에 몸을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전장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일부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아예 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좋아.”
“하아···.”
녀석은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직 호충의 질문은 끝이 아니었다.
“일부는 전장에 넣었다 치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