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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59/232)

대화산(大華山) 입문(入門)

***

호충은 우선 화산파 근처의 비어있는 가옥을 찾아 매입하고 살림을 마련했다. 급하게 구하느라 웃돈을 주어야 했지만, 지금까지 흑패를 정리하며 생긴 부수입이 가득한 호충에겐 부담이 아니었다. 가옥에서 송 영감과 하루를 더 머물고 나서야 화산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 일러준 검법은 뒤뜰에서 밤에만 익히도록 해. 낮에는 내공심법만 수련하고.”

송 영감의 손엔 전에 연안에서 얻은 검갑이 들려 있었다.

호충이 영감에게 일러준 검법은 황궁의 비고에서도 소외된 검보였다.

‘하지만 절대로 약한 검법이 아니지.’

사실 이 검보는 마교의 서고에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마교의 색채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검보가 입수된 경로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마교의 한 가문에서 전해지던 검보가 황궁으로 입수되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마교의 연씨 일가의 장손이 황궁 무인에게 사로잡혔고 그의 품에서 나온 검보였다.

‘마교의 무공이 아니었을 거야. 분명 마교 놈들이 누군가에게 빼앗은 무공일 터.’

사실 이 검법은 과거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이가 새로이 창안한 검법이었지만, 호충도 황궁도 정확한 기원을 알지 못했다.

‘유유히 흐르는 검식은 패도를 추구하는 마교의 무공과 결을 달리하지.’

결을 달리하는 정도가 아니다. 워낙 정파의 색채가 강해 마교에 전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만 전할 정도였다. 덕분에 호충도 정파의 무공이 마교에 전해졌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혹여 남들이 본다 해도 정파의 무공이라 생각할 것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워낙에 높은 수준의 무학이다 보니 황궁을 걱정할 뿐이었다.

“쉬우니까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초반부가 얼마나 쉬운지 기초 검법으로 익혀도 될 정도였다. 물론 이후의 후반부가 극악한 수준의 깨달음과 깊은 내공을 갖춰야 했기에 대성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나무는 아끼지 말고 팍팍 때워. 봄이라지만 아직 찬바람이 불어.”

호충의 잔소리가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별걸 다 걱정하십니다.”

“혹시 내가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자.”

송 영감은 한 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호충의 잔소리를 알기에 얼른 화산으로 오르라고 성화였다.

“도련님. 이제 화산에 오르셔야 하지 않을지···. 이러다 늦습니다.”

“근방에 객잔 있으니까 맛있는 것도 사먹고. 돈 아끼지 마. 우리 돈 많아.”

“······.”

“알았어. 잔소리가 너무 길긴 했지. 다녀올게.”

호충은 송 영감을 남겨 놓고 화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

화산에 오르며 기암괴석의 절경을 마주한 호충은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역시. 이런 곳이라면 뭐라도 있어야지.”

무당과 더불어 도문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화산파가 괜히 이곳에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도 검의 형상으로 보였다.

“크흐. 여기서 수련하면 절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길러지겠구나.”

화산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험난했지만, 화경(化境)의 무인에겐 험난하지 않았다.

“···대체 향화객(香火客)은 어찌 받는 거야?”

자신은 상관없지만, 도관에 향을 올리러 오는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화산에 올라오다가 길을 틀어 무릉도원으로 날아오를 판이었다. 산에 올라가다 죽겠다는 뜻이다.

‘향화객도 무공을 익혀야 여길 오를 수 있겠어.’

그 정도로 가파른 절벽이 시시때때로 나타났다. 게다가 높기는 얼마나 높은지 자신이 아니면 중간에 몇 번은 쉬어가야 할 정도였다.

“웃차.”

호충의 가벼운 발걸음이 절벽을 딛고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머지않아 화산의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충은 산 중에 세워진 거대한 현판과 멋진 기와장식의 대문을 보니 자신이 화산에 도착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화산파(大華山派).

‘대(大)는 얼어 죽을 대(大)야.’

향화객이 도착하면 대(大)자로 뻗어서 대를 붙였나 생각하며 정문을 지키는 화산의 도인에게 다가갔다. 검은 도관(道冠)을 정제한 도인이 아까부터 호충을 보고 있었다.

“젊은이 혼자 오셨소? 쉬운 길이 아니었을 터인데···.”

“예. 도장. 진가장에서 온 진호충이라 합니다.”

“아! 진가장. 진가의 자제가 화산에 온다는 얘긴 들었지.”

“기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도장.”

“연초에 온다고 들었거늘 벌써 봄이 무르익었군. 어째 이리 늦었단 말이오?”

오는 길에 흑패를 때려잡고 오느라 늦었다. 차지한 흑패를 두고 그냥 지나갈 수 없으니, 며칠씩은 머물러야 했고 결국 깊은 봄이 되어서야 화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충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며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 도호를 여쭈어도 실례가 아닐 지요.”

“본도는 접객각의 현수(玄秀)라 한다네.”

호충은 현수 도인의 도호를 듣고 포권하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진가장의 막내 호충이 다시 인사드립니다. 현수(玄秀) 도장을 뵙습니다.”

“허허허. 예의가 바른 청년이로고.”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어서 들어가세. 화산에 오르느라 기운께나 빼지 않았는가.”

“안 그래도 언제 쓰러져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화산의 대문을 넘으면 바로 쓰러져도 되겠습니까?”

“허허허. 농을 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더 세워둬도 됐겠구먼.”

호충은 좋은 인상을 남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서 장문인께 인사를 올려야지요. 객이 주인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허허. 맞는 말이지. 우선 안으로 드시게.”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화산은 과거 옛 전각을 모두 잃었고, 지금의 전각은 새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거 옮기느라 여럿 죽어났겠다.’

그냥 올라와도 힘든 길이다. 무거운 건축자재까지 들고 올라오려면 어지간한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마음과 다른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갔다.

“정말 엄청납니다. 도장. 이 높은 산중에 멋진 전각이 즐비하다니요. 저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허허허. 대 화산의 자랑이지.”

‘자랑이 아니라 만용이겠지.’

적당히 화산 아래에 세웠으면 이 전각을 지을 자금의 반에 반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화산은 과거의 위용을 다시 세우겠다며 향화객의 주머니를 털어 이 전각들을 복원했을 것이다.

‘자랑을 하려면 무공이나 복원하여 자랑할 것이지···.’

이들이 잃은 화산의 무공을 진가장에서 얻지 않았던가.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게. 장문인께 진씨 세가의 공자가 도착했음을 전하겠네.”

손님을 위한 접객당에 앉은 호충은 화산의 제자로 보이는 이가 가져다주는 차를 들이키며 가만히 정좌하고 기다렸다.

‘화산파 장문인의 도호가 청진이라 했지.’

장문인을 만나 나눌 얘기를 생각하는데, 아까 차를 내줬던 화산의 어린 제자가 다가왔다.

“차를 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우. 제가 도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본도는 화산의 삼대 제자 백준(白俊)이라 합니다.”

삼대 제자라는 말에 호충이 반색했다.

“아. 저와 함께 수련하실 삼대 제자셨군요. 저는 진씨 세가에서 온 진호충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백준 도우.”

도명이 있으니 기명 제자였다.

“헌데 연배가 저희와 맞으실지···.”

호충의 나이는 올해 고작 열일곱이었지만, 환골탈태로 훌쩍 나이가 들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게 되었다.

“···제가 약을 잘못 먹는 바람에 이리 되었지요. 올해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저와 동갑이란 말입니까?”

백준은 호충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라서 되묻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나이인가 봅니다.”

“···고약한 약을 드셨나 봅니다.”

아무리 봐도 이십대는 훌쩍 넘어보였기에 하는 말이다.

“실로 고약한 약이었지요. 불과 몇 개월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리되지 뭡니까.”

“어허. 안타까운 일입니다.”

“얼굴은 이렇지만, 같은 나이이니 편히 대해주시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백준 도우.”

“알겠소. 진 공자. 장문인을 뵙고 나오면 내가 삼대 제자들을 소개해 주리다.”

“고맙소.”

.

.

.

호충은 잠시 후에 현수 도인의 안내를 받으며 장문인의 처소로 갔다.

호충은 도인처럼 멋들어진 수염을 자랑하는 청진을 보고 포권하며 인사했다.

“진가장의 호충이 대화산의 청진 장문인께 인사 올립니다.”

“잘 오시었소. 진 공자. 오는 길에 별일은 없었소?”

“······.”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는지 모른다. 열두 개의 흑패를 정리하며 생긴 일들을 다 얘기하자면 오늘 하루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관도가 잘 닦여있어 오는 길이 고되진 않았습니다. 그보다 화산에 오르는 길이 고역이었지요.”

“처음 화산에 오르는 향화객들은 며칠은 이곳에 머물며 쉬었다 내려간다오. 그만큼 오르기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지.”

호충은 이래서 높은 곳에 도관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향화객이 공짜로 먹고 자겠어? 그게 다 돈이지. 화산이 돈을 벌어들이려고 수작을 부렸어.’

실제 향화객이 먹고 자는데 들어가는 돈을 따로 받고 있었기에 오해가 아니었다.

“정녕 그러하였사옵니다. 험난한 만큼 산세가 절경이라 화산에 괜히 명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화산은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니 이를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네.”

이후 호충과 청진은 예의상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갔고, 청진이 먼저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미 진가장과 진 공자를 화산에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니 앞으로는 화산에 머물며···.”

호충은 화산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화산 입구에 가옥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화산 입구에? 헛돈을 쓰게 했군. 미리 알려야 했을 터인데···.”

화산으로 오르는 길이 험난하니 매일 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복(老僕)이 있어 제가 없이는 혼자 있을 수 없습니다. 불편하여도 매일 화산으로 오르는 수밖에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네. 화산에서 무공을 연마하자면 진이 빠질 터인데 어찌 산을 다시 내려가겠는가. 하지만 오르는 것부터가 문제로고···.”

“만약 힘에 부치면 노복을 돌려보내고 화산에 머물겠습니다. 장문인께 허락을 구합니다.”

“공자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말리지 않겠네.”

청진 장문인은 내일 당장 화산에서 머물겠다고 할 호충을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저는 화산의 객에 불과하니 삼대 제자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많은 무공을 수련했을 화산의 기재들에 비하여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무공을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허허허. 진가장의 막내 공자가 학문(學文)을 익혔다 들었네. 그래서 이리 예를 차리는 구려.”

예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화산과 선을 긋기 위함이었다. 살을 부대끼며 지내다보면 홀랑 벗겨먹는데 마음이 쓰이지 않겠는가.

“무엇하나 내세울 것이 없으니 예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앞으로는 화산의 무학을 익힐 것이니 내세울 것이 생길 것이네.”

‘화산의 무공을 내세우라고? 미쳤어?’

호충이 익힌 무학은 감히 화산의 무학에 비길 수 없었다.

무림에 존재했던 갖가지 신공을 완벽하게 연성한 금의위 무사들이 새로이 창안한 절세신공.

진양의(眞兩意), 경혼무흔(驚魂無痕), 경신비천(輕身飛天), 환체강림천(換體降臨天)은 화산뿐 아니라 무림 방파 어디의 무학이라도 비길 수 없었다.

“고단하였을 것이니 오늘은 이만 쉬는 것이 좋겠군. 오늘 진 공자는 삼대 제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내일부터 수련에 동참하시게.”

“감사합니다. 장문인. 내일부터 일로정진하여 화산의 무학을 익혀나가겠습니다.”

호충은 밖으로 나와 현수 도장의 안내를 받다가 자신을 기다리던 백준을 만났다.

“아까 보니 둘이 인사를 나누는 것 같던데···.”

“예. 현수 도장. 아까 백준 도우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도우께서 삼대 제자들과 인사를 시켜주겠다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이 줄었군. 준아.”

“예. 각주님.”

“그럼 네가 가서 진 공자를 소개 하여라.”

“예.”

이후 호충은 백준을 대동하고 삼대 제자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연무장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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