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재검법(三才劍法)
***
“오늘 올라와 보니 할만 했습니다. 부족한 체력도 기를 겸 나쁘지 않지요.”
“할만 해? 화산을 오르는 것이?”
화산의 제자들도 항상 힘겨워하는 화산 등반이다.
자신도 할만 한 때는 없었다.
“예. 내려갈 체력도 충분합니다.”
“자, 잠시만 자네의 다리를 확인하겠네.”
현인은 허락도 받지 않고 호충의 허벅다리에 손을 가져갔다.
“!!”
‘강인하고 단단한 다리···. 엄청나게 단련된 다리야.’
“대체 어찌하여 이렇게···. 정말 아무것도 익히지 않았는가?”
“사실······.”
‘사실? 무언가 익히는 했구나!’
“진가장에서 목인장을 세워두고 두드린 적은 있습니다. 마보도 자주 했지요.”
“···그게 전부인가?”
“예.”
“안 한 것과 다를 바 없었군.”
자꾸만 무언가 익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럼 내일 다시 화산으로 올라와 뵙겠습니다.”
잠시 머리를 굴린 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연무장의 지도 스승이 현진이었지···.’‘
“좋다. 조심히 하산하고 내일 꼭 다시 올라와야 한다.”
“예. 도장. 틀림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화산에 오르는 것은 가문의 명입니다.”
“···그래. 그랬지.”
현진은 호충이 진가장의 명이 있는 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조바심을 내건 말건 이렇게 될 일이었다.
현인은 화산의 입구까지 호충을 배웅하고 일대 제자들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서 삼대 제자들이 눈이 빠지도록 사숙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현진! 현진 있는가?”
“현인.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나를 찾나.”
날카로운 인상의 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좀 보세. 내가 긴히 할 얘기가 있네.”
“자네는 지금 연무장에서 삼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릴 시간이 아닌가?”
“아. 그랬지···. 지금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우선 내 얘기부터 좀 듣게.”
“우리 대화산의 귀여운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화진은 평소 삼대 제자들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여 왔지만, 누구보다 화산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삼대 제자들을 사랑하는 사숙조였다.
“오늘 진가장에서 진 가주의 아들이 도착했네.”
“진가장은 잘 알지. 향화객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화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닌가. 진가장의 아들이 화산에 온다는 얘기도 들었지. 그런데 녀석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가?”
“문제라면 문제겠지.”
“···큰 문제라도 생겼는가? 다치기라도 했어? 어쩌다가 그랬단 말인가!”
화산에 도움이 되는 진가장의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곧 화산의 수입 감소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다치지 않았네. 그저 내가 검술 시범을 보여줬고, 진 공자에게 따라하라고 했을 뿐이네.”
“혹시···. 삼대 제자들 앞에서 말인가? 연무장에서?”
“그렇네.”
“이 친구야! 무공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진 공자가 얼마나 무안했을 것인가! 검은 잡아보지도 못했다는데 검술을 따라하라 하면 어쩌자는 건가!”
“그게···.”
현진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현인을 몰아세웠다.
“아이고. 분명 녀석이 부끄러워서 다시는 화산에 오지 않겠다고 한 게야.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진가장에서 지원해준 자금이 한두 푼도 아닌데···. 자네는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이 사람아 내 얘기 좀 듣고 화를 내게.”
“푸후.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는가. 해보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일이라 현인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흐흣. 진 공자는 정말 멋지게 내 검을 따라했네.”
“···처음이 아니던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나 보군.”
“아닐세. 처음이 맞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백지였네. 무공은 맛도 못 본 녀석이야.”
“처음인데 잘했다? 자네는 무슨 검술을 시연했는가.”
“개화검.”
“아. 개화검이라면 따라할 수도 있는 일이지. 자네가 생각 없이 검술을 보였을 리 없는데···. 내가 크게 착각했네. 허허허.”
“괜찮네. 진짜 할 얘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말일세.”
“개화검을 처음부터 멋지게 따라했다 하지 않았는가. 다른 일이 또 있는가?”
“또 있지. 있고 말고. 허허허.”
“···답답하게 하지 말고 어서 자네 머리에 든 것이나 풀어놓게.”
“진 공자는 내가 개화검을 보여주자마자 이렇게 말 하더군.”
[정말 대단한 검을 보았습니다.]
현인은 지금도 호충의 말을 떠올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개화검을 보고? 하긴 무공을 모른다면 개화검이 그리 보일 수도 있음이지.”
“자네도 개화검을 개검이라 무시하나?”
“개검까지는 아니지만···. 솔직히 아이들에게 검법을 맛보여주는 것 외에 쓸모도 없지 않은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없는 개화검법의 현주소였다.
“에잉. 어쨌든 진 공자는 개화검을 따라한다는 것도 황송해 하더군. 그리고 공손히 목검을 받아 개화검의 검식을 따르기 시작했지. 지금도 진 공자의 개화검이 눈에 아련히 떠오르는군.”
“아련하기는···. 그래봤자 개화검을···.”
“진 공자는 그 자리에서 연달아 여섯 번의 개화검을 펼쳤네.”
“지금 뭐라 했는가? 여섯 번? 그걸 왜 여섯 번이나···.”
“마지막 연환에선 처음과 끝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이어졌다네. 내가 살면서 그렇게 완벽한 개화검은 처음 보았네.”
“완벽하기까지?”
“나도 자네도 그렇게 완벽한 개화검을 펼칠 수는 없을 것이네.”
“하! 자네 얘길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이보게 현진.”
현인은 얼굴을 굳히고 현진을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또 왜 그렇게 부르나?”
“나는 진 공자의 개화검에서 매화를 보았네.”
“!!!!”
“진 공자의 개화검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심상에 매화의 꽃봉오리가 떠오르더군. 파릇파릇한 생의 잉태와 거기서 피어나는 매화 꽃봉오리가 저절로 떠올랐네. 한 번 두 번 식이 연달아 이어질 때마다 꽃봉오리가 하나씩 더해졌지. 내 심상에서 피어난 꽃봉오리가 어서 활짝 피워내고 싶다며 안달이었네.”
현인이 아련한 눈빛을 보이며 하는 말을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매화.”
무려 매화였기 때문이다. 매화는 화산파 모든 도인들의 소망이자 꿈이었다.
“자, 자네 그 말에 농은 없나?”
“이미 장문인께도 같은 말을 하고 나온 길일세. 내가 장문인의 처소에 쳐들어가서 농이나 하고 나왔겠는가?”
“······.”
“진 공자를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거창하게 실패했네. 장문인은 물론이고 진 공자 본인도 가문의 명이 우선이라 하더군. 장문인도 본인도 거절하니 어쩌겠나. 나는 포기해야 했네. 내 고집을 꺾었단 말일세.”
“···자네는 진 공자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하리라 여기는가.”
“나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기재로 여기고 있네. 감히 나 같은 것은 비교도 할 수 없네.”
“!”
“우리 화산의 무공이 온전했다면 녀석을 천하제일인으로 키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진 공자는 여섯 번의 검식을 보였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자신이 단 두 번 검식을 펼쳤다고 하더군.”
“잠깐 두 번? 그런데 여섯 번을 했다?”
“이게 무슨 소리겠는가? 진 공자는 깨달음의 영역에 진입하여 무의식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는 말이네. 그것도 목검을 처음 잡은 날! 처음 접하는 검식을 보고 따라하면서 말이네!”
“미, 미친.”
천년에 한 번 나온다는 기재. 천하제일인.
이제 두 가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같은 광경을 봤다면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미쳤지. 암. 미치고말고. 그런 진 공자를 화산에 붙잡지 못하는 내가 미칠 노릇이네.”
“진 공자는 어디 있는가? 내가 봐야겠네.”
“···방금 하산 했네. 배웅하고 오는 길이네.”
“뭐, 뭐? 하산?”
“사람에 대한 정은 또 얼마나 깊은지 노복을 홀로 두고 왔다며 하산하더군. 이미 장문인의 허락까지 받은 터라 내가 말릴 수도 없었네.”
“그럼? 화산에 다시 안 온단 말인가?”
“내일 다시 입산하겠다고 하더군.”
“거 다행······. 잠깐! 오늘 입산하고 하산하는 것도 기이한데, 내일 또 입산하겠다고? 다리가 강철로 만들어 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현진도 현인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화산에 올랐다면 최소 며칠은 정양해야 다시 내려갈 체력을 비축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이라지 않았던가.
“나도 그것이 궁금하여 진 공자의 허벅다리를 확인했네. 강철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어. 지금까지 단련한 것은 오직 마보(馬步)라고 하더군.”
“···화산에 엄청난 녀석이 들어왔군.”
“문제는 진 공자가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는 점일세.”
“···방법은 찾아 봤는가?”
“아무리 고민해도 없네. 장문인의 둘째 치고라도 녀석의 결정이 너무 확고하네.”
“허허. 이거 고민스럽군.”
“그래서 말인데···. 내일 삼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나도 함께하겠네. 지금도 녀석이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란 말이네.”
“···나도 궁금해 미치겠군.”
“나는 내일 개화검을 다시 보여 달라고 할 참이네. 자네도 개화검을 본다면 나와 같은···.”
현진은 개화검이 아니라 다른 검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인. 만약 다른 검을 보여줘도 그대로 따라할까?”
“그것도 좋은 생각일세. 내일 보여줄 검법은 자네가 선택해보게.”
“난 설화검(雪花劍)을 시연할 생각이네. 그나마 내공 없이도 펼칠 수 있는 검이지 않은가.”
“삼대 제자들이 개화검 이후에 배울 검이면 알맞겠어.”
“내공은 확실히 없다 하였지?”
“애초에 무공을 익힌 적이 없다지 않았는가. 내가 완맥을 잡아 확인했지만 내공은 한 줌도 없었네.”
“그럼 늦었으니 내공심법도 얼른 가르쳐야···.”
“삼대 제자들이 아니라 이대 제자들과 배워야 할지도···.”
현자 배의 둘이 내일을 기대하며 대화하는 동안 호충은 이미 산 아래 가옥에 도착하는 중이었다.
***
가볍게 화산 입구에 도착한 호충은 안에서 자신을 기다릴 송 영감부터 찾았다.
“영감. 나 왔어.”
“도련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첫날이잖아. 인사만 하고 얼른 내려왔어. 진짜 수련은 내일부터 하려나봐.”
“화산에 오르내리시느라 고단하셨겠습니다. 매일 오르시려면 얼마나 힘드실지···.”
“에이. 화산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절벽에서 발 몇 번 구르니까 금방 도착이야.”
“···절벽에서 말입니까?”
오를 때는 그나마 정상적인 경로를 탔지만, 내려갈 때는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호충은 까마득히 보이는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몇 번 몸을 뒤집고 절벽을 발로 차며 속도를 줄였다. 이후 가볍게 바닥에 착지해 화산 입구에 있는 가옥까지 천천히 걸어온 것이다.
“내일은 절벽을 타고 오를 생각이야. 부족한 체력을 길러야지.”
“···저는 상상만으로 까마득합니다.”
“헤헤. 영감은 절벽 근처도 가지마. 우리는 객잔에 요리시켜먹으러 가자.”
“예. 도련님.”
현진과 현인에게 지독한 고민을 안겨준 호충은 편히 객잔에서 요리를 시켜먹고 송 영감의 수련을 도왔다.
이후엔 자신의 수련을 이어갔다. 화산엔 많은 산이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도 많았다.
‘난 기초가 부실했던 거야.’
오늘 개화검을 통해 이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괜히 무림인들이 기초 검법을 배우며 단계를 밟아 나갈까? 이유가 있으니 그랬던 거야.’
호충은 경혼무흔(驚魂無痕)의 검식을 떠올리며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려치고, 올려치고···.’
호충은 직도(直道)를 떠올리고 있었다. 위와 아래, 좌측과 우측, 횡으로 이어지는 검의 곧은길이다.
‘더 간단하게 나누면 찌르고, 베고, 막는다.’
이것이 천지인의 검법이었다. 보통 삼재검(三才劍)으로 불리는 기초 검법이 바로 이 천지인의 검법이었다.
‘또한 안정된 하체로 검식을 굳건하게 한다.’
애초에 대부분 무림의 기초 검법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호충은 삼재검을 떠올리며 검식의 길을 따랐다.
사악.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검은 깔끔하게 직선을 그려냈다.
호충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분명 조금 흔들렸어.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위에서 아래로 검이 떨어져 내린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검로(劍路)였지만, 호충은 만족이 없었다.
‘···여전히 부족하다.’
호충의 검이 내려치기를 시작했다. 끊임없이 검신이 아내로 떨어져 내렸고, 검광은 곧은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항상 완벽에 가까워 보였지만, 호충은 부족하게만 보일 뿐이다.
‘기초를.’
사아악.
‘완벽하게 다져야.’
사악.
‘그 다음을 익힐 수 있다.’
사악.
매번 고차원적인 무리를 고민하던 호충은 그날 삼재검법에 푹 빠져 수련했다. 심상 수련마저 잊은 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