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32)

설화검(雪花劍)

***

“영감. 나무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아이고. 도련님. 잔소리는 적당히 하시고 얼른 올라가십시오.”

“···쳇. 사랑이 식었어.”

“허튼 말씀하시지 말고 어서 가십시오.”

호충은 송 영감이 등을 떠밀자 농담을 그치고 걸음을 옮겼다.

호충은 터벅터벅 화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농담도 안 통하네.”

어제와 달리 호충은 느긋했다. 어제는 다 오르고 나서야 주변 경관을 둘러봤기에 오늘은 아예 마음먹고 화산의 절경을 눈에 담는 중이다.

“저기도 도관이 있었나?”

주변을 눈에 담다가 멀리 다른 산에 있는 전각도 보였다. 한 둘이 아니었다.

“···화산파와 같은 멍청이가 또 있었구나. 어휴. 많기도 하네.”

화산에는 화산파 외에도 많은 도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곳도 있었고, 신당을 세우기도 하고 개인적인으로 도문에 들고자 하는 이들도 화산에서 많이 수련하고 있었다.

‘화산에도 전대의 거목들이 있었을 텐데···.’

호충이 상념은 화산에서 은거한 전대의 인물들에게 향했다.

진가장에도 진원우의 아비이자, 호충의 할아버지인 인물이 살아 있었다. 물론 외부에 코빼기도 비추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해서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전대의 거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현 화산의 장문인인 청진은 사실 진즉에 원로원으로 들어 은거해야 맞았다. 다른 청자 배가 모두 은거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하지만 가장 높은 배분을 갖고 있음에도 무공이 일천하여 장문인에 오를 수 있었다. 오히려 무공이 부족하기 때문에 장문인이 된 것이다.

‘장문인은 절정 중반에 금방 돌입하게 생겼던데···.’

청자 배에서 가장 무공이 부족한 청진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는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호충은 청자 배의 청진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의 배분을 가진 원로들도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다.

‘화산은 그들을 어디에 숨겨 두었을까.’

호충은 화산에서 은거한 원로들이 어디에 머무는지 궁금했다.

‘무공이 절정 급에 오른 것은 당연할 것이고···. 내공은 은거 당시 보다 더 쌓았겠지? 다른 할일이 없으니 무공을 더욱 날카롭게 연마했을 수도 있음이지.’

현 무림에 호충을 상대할 이는 찾기 어려웠다. 굳이 찾자면 황궁의 명으로 은거한 원로원에서 찾아야 했다. 자신과 검을 나눌 상대는···.

‘앞으로 노땅만 상대해야 하려나?’

나이대가 비슷한 이들 중에는 결단코 없었다.

누가 공청석유를 취해 환골탈태를 이루었을 것인가.

누가 고대의 신공을 얻어 익혔을 것인가.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도 희박한 확률이었고, 둘을 동시에 성공한 사람은 호충 외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의 대련은 스승님들 외에는 대안이 없네···.”

심상 수련은 했다하면 죽기 때문에 막심한 심력을 소모하게 된다.

‘진짜 죽는 건 아니지만, 누가 죽는 걸 좋아하겠어?’

심력도 심력이지만, 자꾸만 죽어나가는 것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제 심상 수련을 빼먹었더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른다.

“···이게 게을러지는 건가?”

호충은 자신이 수련을 소홀히 했나 싶었다.

“기초를 너무 깊이 생각했을지도···.”

어제의 수련을 복기하며 천천히 산을 오르던 호충은 잠시 자리에 멈춰 눈을 감았다.

‘이제야 주변에 인적이 없구나.’

산을 오르는 초반에는 자신 외에도 여럿이 화산을 오르고 있었다. 호충이 주변 경관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오른 것은 오직 절경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경신을 발휘해 화산에 오르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타앗.

호충의 발이 가볍게 언덕을 차고 쏘아져 나갔다. 영감에게 얘기했던 절벽 방향이었다.

***

호충은 화산에 거의 다 와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수련은 되겠다.’

평지와 산길은 많이 달랐다. 절벽과 산길은 더욱 달랐다.

호충은 절벽에서 가진 무공을 총 동원하여 올라왔고, 이후 다시 산길로 돌아와 이곳에 이른 것이다.

‘내일은 내공을 조금 더 줄이고 시도해봐야겠어.’

호충은 화산의 정문으로 가서 문을 열려 했는데, 안에서 벌컥 열려 버렸다.

호충의 손이 허공을 지나갔다.

“으헥.”

덕분에 문을 잡으려던 호충의 몸이 휘청했지만, 곧 중심을 잡고 열린 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어이쿠. 진 공자. 입산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리가 풀린단 말인가.”

“아. 현인 도장. 기다리고 계셨군요.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오라. 문을 잡으려 했는데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기척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기감은 확실 없군.”

그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화산에서 위험할 일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새로 나타난 화산의 도인에게 인사부터 했다.

“인사 올립니다. 진가장에서 온 진호충입니다.”

“나는 집법당의 현진이네.”

“반갑습니다. 현진 도장.”

현진은 호충의 다리를 유심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리가 떨리지 않는 것을 보아 근육이 풀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로군. 정말 놀라운 일이야.”

사실 현진은 당장이라도 호충의 다리를 만져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네 놈의 다리는 어떻게 생겨먹었단 말이냐.’

“···어제 한번 올라와 봤다고 조금 수월했습니다.”

“수월? 화산이 한 번 오른다고 수월해지는 산인 줄 아는가?”

오히려 앓아누웠다면 이해할 일이었다.

‘이 새끼는 날 언제 봤다고 시비야?’

호충은 불쑥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예의를 갖췄다.

“화산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도장.”

호충이 사과하자 현인이 현진을 나무랐다.

“거 수월할 수도 있는 거지. 왜 따지고 그러나? 엉?”

“······.”

“화산에 입산하는 것이 수월하면 화산파가 무시당하는 거야? 그럼 고수는 다 화산 무시하나? 우리 대화산이 매일 무시당하고 살았어?”

“으이그.”

현진이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현인은 호충을 향해 돌아섰다.

자신이 잘했다는 듯이 어깨까지 우쭐거리고 있었다.

“어흠. 내가 따끔하게 혼내줬으니 우린 들어가세.”

“오늘은 현진 도장께서 삼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현진 도장과 함께 가야 맞지 않을지···.”

현진은 옳은 말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나를 따라 오시게.”

“예.”

현인은 얼른 현진의 뒤로 붙었다.

“큼큼. 진 공자에게 안타까운 일이 많은데 어제 내가 다 얘길 못 했네. 그러니 자네가 좀···.”

찌릿.

“힉.”

현진의 날카로운 눈이 현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 공자는 먼저 연무장으로 가 있게. 어제 가봤으니 위치는 알겠지?”

“예. 도장.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호충이 먼저 연무장으로 가자 현진이 다시 물었다.

“안타까운 일이라니? 진 공자에게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는가?”

“그게 말이네···.”

현인의 입에서 호충이 겪었던 설움과 당했던 사고가 흘러나왔고, 사고 후 진가장에서 취했던 행동들이 이어서 전해졌다. 덕분에 호충이 화산에 온 일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현진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물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현진은 차가운 말투와 달리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미 잃은 자식이 무슨 죄라고···. 저리 집안을 생각하는 자식을 어찌 그리 대할 수 있는 가.”

“그러니 너무 삭막하게 대하지 마시게. 우리라도 저 아이의 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모르지 우리가 잘 해주면 진가장에서 벗어나 화산으로 올지도···.”

“그것은 진 공자의 결정이네. 우리가 함부로 할 일이 아니야.”

“에효. 어쨌든 진 공자가 잘못해도 조금은 봐주는 걸세. 자네도 그리 할 게지?”

“···되도록.”

짧은 대답을 한 현진은 얼른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대 제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가세.”

현인이 얼른 현진의 뒤로 따라붙었다.

***

호충은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쏠린 눈들을 보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안녕?”

“······.”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 중에 호충과 안면이 있던 백준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어제 별일 없었어?”

“아휴. 말도 마. 고역이었어.”

현인이 얼마나 끈질기게 달라붙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만, 백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못한다고 했는데도 왜 그러셨는지 몰라.”

“그러게 말이야.”

백준과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현진과 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현진 사숙조와 현인 사숙조를 뵙습니다!”

둘은 제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앞으로 나섰고, 호충은 얼른 삼대 제자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호충은 앞으로.”

우뚝.

현진의 말에 호충은 고개를 갸웃하며 앞으로 향했다.

‘또 뭐야?’

어제도 앞으로 나섰다가 고생했기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호충이 곁으로 오자 현진은 잠시 안쓰러운 눈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화산의 제자들 앞에서 개화검을 시연했다지?”

“···예. 처음 해본 터라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내가 보지 못했으니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겠느냐?”

현진은 설화검(雪花劍) 전에 어제의 개화검(開化劍)을 먼저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억나지 않으면 내가 다시 시연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해도 좋다.”

“···기억합니다.”

현진은 자연스럽게 목검의 손잡이를 들이밀었다.

“원래의 개화검과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 잘못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호충은 어제 개화검을 시연하고 혼자 기본 검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덕분에 개화검도 조금 달라졌다.

“달라져? 어쨌든 해보아라. 너의 시연을 보고 다시 얘기하자.”

“예. 현진 도장.”

호충은 어제 보였던 개화검의 기수식을 시작으로 시연을 시작했다.

샤아악. 탁.

호충은 그저 기본 검술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검의 본질에 한걸음 다가갔을 뿐이지만, 개화검이 완전하게 다른 검술로 보이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

“!!”

개화검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 자신하는 현진과 현인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이 개화검이라고?’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니!’

호충이 가장 크게 변화시킨 것은 짧은 개화검법의 마지막 검식인 개화만개(開化滿開)에 있었다.

샤악. 샥. 샥. 타닥. 탁.

단 한 번 꽃봉오리를 만들어야 하는 개화만개(開化滿開)의 검식이 위와 아래 그리고 중간으로 나뉘며 세 갈래로 갈라졌다.

호충이 세 개의 꽃봉오리를 검으로 그려낸 것이다.

호충은 어제처럼 개화검을 연달아 펼치지 않고 담백하게 목검을 내렸다.

‘어제처럼 무의식에 빠질 수는 없지.’

“······.”

“······.”

현진과 현인은 방금 본 개화검이 눈에 어른거려 입을 열지 않고 서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마음대로 마지막 검식에 손을 댔습니다.”

“누가 일러줬더냐?”

“아닙니다. 어제 혼자 고민하다가 이렇게 하면 어땠을까 생각하여···.”

“허허.”

허탈한 웃음을 보이는 현진과 달리 현인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내가 뭐랬는가. 흐흐.”

“···자네 말이 사실이었어.”

현인은 천년에 한번 나온다는 기재라고 했었다. 현진은 현인의 말이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오늘 개화검의 마지막 검식인 개화만개를 보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보이던 개화검이 마지막 개화만개를 통해 완벽한 모습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기본 검법이었다.

“······.”

현진은 멍하니 호충을 바라보다가 얼른 자신의 검을 들며 입을 열었다.

“지, 지금부터 설화검(雪花劍)을 보일 것이다. 잘 보고 따라해 보아라.”

“···예.”

삼대 제자들은 설화검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자신들이 다음에 배워야할 검법이었다.

현진은 정성을 다해 설화검을 펼쳤다. 방금 완벽에 가까운 개화검을 봤기에 더욱 정성껏 검법을 시연했다.

샤악. 스스릉.

호충은 마지막 검식을 끝내고 검갑으로 돌아가는 검의 흐름까지 눈여겨보았다.

“잘 보았느냐?”

“···예.”

“해보아라.”

“······.”

호충은 목검을 들고 화산의 제자들을 돌아봤다.

‘이것들이 지금 뭘 하는 거야···.’

어제부터 자신을 앞에 세워두고 검술만 시연시키지 않는가.

‘에효.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호충은 진양의를 통해 현진이 시연한 설화검을 보았기에 시연에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확실히 개화검 보다는 조금 낫네.’

그래봐야 기본 검법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 검법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호충의 목검이 설화검의 검로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유려한 설화검의 검로가 현진의 시연과 똑같은 모습으로 재연되고 있었다. 여기에 호충이 방금 설화검을 보고 깨달은 검의(劍意)가 깊이 더해졌다.

‘하얀 눈이 가득 내린 화산에···.’

스르륵.

‘작은 발자국이 하나 있었네.’

타박.

‘겨울은 모든 생명이 숨죽이고 있으나···.’

스르륵. 샤아악.

‘눈 밑에선 생명의 씨앗이 봄을 기다린다.’

호충은 현진의 설화검을 보고 느낀 자신의 심상을 검식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었다.

‘생명의 씨앗은 설화가 가득한 화산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으며···.’

타닥. 탁. 스르륵.

‘언제나 봄을 기다리리라.’

호충은 기다림의 아득함을 담아내며 목검을 수납했다. 현진이 보여줬던 그 모습 그대로의 설화검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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