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제자
***
“······.”
“······.”
현진과 현인은 방금 자신이 본 설화검에 눈을 감고 깊은 여운을 느끼는 중이었다.
‘화산이 새하얀 눈에 깊이 덮여 있구나. 그러나 생명은 언제나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지.’
‘화산의 설화는 언제 싹을 틔울 것인가.’
화산의 삼대 제자들은 자신들이 익혀야 할 설화검을 재현한 호충을 보고 어제의 시연이 그저 간단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와. 처음 아니었어?”
“정말 잘하네?”
“쳇. 진가장이 검으로 유명하잖아. 미리 검을 배웠겠지.”
“하여간 잘사는 집안이란···.”
백준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단 한 번의 시연과 이어진 호충의 재연. 어제도 오늘도 마찬가지였어.’
호충이 사숙조의 시연을 처음 보고 검법을 완벽하게 따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보게 현인.”
“말 걸지 말게. 아직 여운이 남았네. 아! 화산의 설화여···.”
“···지금 삼대 제자들 앞이네. 정신 차리게”
“아. 그랬지.”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현인이 아니었다.
“오늘 나 대신 제자들을 부탁하네.”
“뭐, 뭐?”
현진은 호충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가자! 내가 직접 장문인께 고할 것이다.”
어제와 판박이 같은 상황이다.
“자, 잠시만. 현진 도장. 이미 어제 장문인을 뵈었습니다.”
현인도 얼른 현진을 막아섰다.
“어허. 내가 안 해본 것이 아니라지 않았는가. 다 얘기가 끝났는데 또 이러면 진 공자가 난감할 것이네.”
현진은 현인이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장문인을 보러 가고 싶었으나, 호충이 자신의 가문에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떠올리고 잡은 손목을 내려놨다.
“어찌···. 어찌하여.”
전해 들은 것과 직접 본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욕심일세. 욕심이야.”
“어찌 욕심이란 말인가. 진 공자는···.”
현진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호충과 눈을 마주쳤다.
‘이 녀석이 화산의 제자가 된다면 누구보다 빛나는 보배가 될 것인데···.’
그저 기재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현인의 말대로 향후 무림에 천하제일인이 나타난다면 호충이 분명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현인은 현진의 미련을 떨치기 위해 호충을 보고 말했다.
“시연은 잘 봤네. 덕분에 개안했어. 어서 자리로 가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저는 화산의 제자들과 함께하겠습니다.”
호충은 얼른 화산의 삼대 제자들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 붙잡혀 시연하고 싶진 않았다.
“······.”
현진은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호충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제 제자들의 수련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야.”
“···수련은 자네가 시키면 안 되겠나? 아무래도 난 저 녀석과 조금 더···.”
“어허. 뭐가 그리 급한가. 이미 저 아이는 화산에 있네.”
현인은 현진을 두고 뒤로 향했다. 호충의 모습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현진은 자신이 현인과 자리를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마냥 호충의 검만 보고 싶었다.
“···모두 목검을 들어라. 개화검을 수련할 것이다.”
““예!””
삼대 제자들의 수련 중에도 현진의 눈은 호충을 향해 있었다.
‘허어. 어쩜 저리···.’
삼대 제자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호충만 눈에 가득 들어왔다.
‘깔끔하다. 검 끝에 작은 흔들림조차 없어.’
연무장의 삼대 제자들 가운데에서 군계일학이었다. 아직 기초 검법을 배우는 삼대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압!”
눈을 돌리니 삼대 제자들의 흔들리는 검 끝과 어설픈 목검의 궤적이 들어온다.
호충을 보기 전엔 미래 화산의 동량이 될 제자들의 검을 보고 얼마나 흐뭇한 마음이었던가. 검 끝이 흔들리고 어설픈 검식을 그려도 당연하게 여겼었다.
예전엔 그랬다.
‘어찌 저따위로 개화검을···.’
하지만 지금은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만! 어찌 개화검을 그따위로 펼치느냐! 다시!”
“하압!”
부웅.
“처음부터 다시! 검이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느냐! 검식을 외우기는 한 것이냐!”
“으하합!”
부웅. 부웅.
“멍청한 녀석들! 다시! 다시! 다시 해!”
그날 현진은 고리눈을 뜨고 삼대 제자들을 닦달했다.
***
짧은 수련을 끝내고 자율적인 수련 시간이 되었을 때 호충은 다시 현진에게 호출당했다.
백준과 따로 만나 얘기하던 중이었다.
“호충. 현진 사숙조님이 부르셔.”
“···어. 그래.”
백준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현진과 현인을 보고 호충에게 말했다.
“사숙조님 두 분이 널 또 부르시네.”
“···다녀올게.”
“올 수 있으려나 모르지.”
“에효.”
현진과 현인은 눈을 반짝이며 호충을 맞이했다.
“진 공자. 수련에 어려움은 없었는가?”
“예. 현인 도장.”
이미 다 배운 것이나 다름없는 개화검을 삼대 제자들과 함께 수련했을 뿐이다. 어려울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현진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어 현인과 대화 중 임을 무시하고 물었다.
“아까 자네가 보여준 개화검의 마지막 검식 말이네.”
“예. 개화만개 말씀이십니까.”
“그래. 개화만개 말이야. 자네가 시연한 개화만개는 정말 인상적이었어.”
“감사합니다. 도장.”
“헌데 어찌 그렇게 개화만개를 변화시켰는가? 이유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
“사실···. 어제 개화검을 보고 삼재검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삼재검?”
삼재검은 구하자면 누구나 구할 수 있는 기초 검법이었다.
“개화검은 화산의 기초 검법인데, 천지인의 조화가 부족한듯하여 마지막 개화만개에 천지인을 담았고, 이를 하나의 꽃봉오리로 그려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천지인의 조화가 이루어진 마지막 검식은···.”
호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진과 현인이 탄식을 내질렀다.
“아! 그것이 천지인이었구나!”
“그랬어! 그래야 기초 검법이 완성되는 것이지!”
“···하지만 이해가 부족하여 완전한 하나의 꽃봉오리가 아닌 세 개의 꽃봉오리를 그려내고 말았습니다.”
일부러 완전한 천지인의 조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어제도 그리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것까지 보여주면 얼마나 더 소란을 피울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만 갖고도 이럴 줄은 몰랐지만···.’
“어찌 이리 검에 대한 이해가 높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감히 시도할 생각도 못 한 일이지 않은가. 개화만개에 천지인을 담다니···.”
“우리는 대체 지금까지 뭘 했단 말인가.”
“속절없이 나이만 먹었구나.”
‘계속 화산에 머물러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화산의 도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도 적당한 수준이어야 했다.
“자네. 내공 심법은 익히지 않았다 하였지?”
“예. 앞으로 화산 제자들이 익히는 심법을 익힐 생각입니다.”
“······.”
“······.”
현진과 현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래선 안 될 것이야.”
“삼대 제자들이 익히는 심법이 정순한 내공을 지향하긴 하지만, 너무 느리지.”
“그럼 이대 제자들이 익히는 심법이 어떤가.”
“그렇지! 최소한 그 정도는 배워야 맞아.”
“······.”
호충은 바라지도 않았던 상위 심법을 배우게 생겼다.
‘어차피 익히지도 않을 것인데···.’
경혼무흔(驚魂無痕)을 가진 호충에겐 그 어떤 심법을 가져와도 대수롭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화산의 객(客)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이대 제자들이 익히는 심법이라면 직전 제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심법일 터, 객에 불과한 제가 익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틀린 말이 아니라 둘은 입을 다물었다.
“화산의 도인들께서 저를 높이 평가해주는 것만으로 저는 충분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것 같아 만족입니다. 앞으로 삼대 제자들과 더 어울리며 충실하게 맡은 바 일을 다 하겠습니다.”
둘은 예를 다하고 돌아가는 호충을 붙잡을 수 없었다.
“어허. 당장이라도 사제로 들이고 싶으이. 사부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현진의 마음이 얼마나 아쉬운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삼대 제자는 현진의 사손에 해당했는데, 호충을 동급으로 끌어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제라니! 나는 나보다 배분이 높아도 좋겠네. 장문인께 제자를 들이라고 해볼까? 무 자 배로 들어가면 호충이 원로님들께 얼마나 예쁨을 받겠는가.”
현인은 아예 자신보다 배분이 높아도 좋단다.
***
이후 호충은 현자 배의 두 도장들의 눈을 피해 삼대 제자들과 안면을 익혀갔다.
“나는 호병운이다. 서안에서 왔어.”
“난 포성에서 온 동소진.”
“태백의 임관수다.”
호충은 한참 어려 보이는 삼대 제자들이 사실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두 살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삼대 제자들은 서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서로가 모두 사형제라는 개념이었다.
“이미 알겠지만, 다시 소개할게. 자장에서 온 진호충이야. 나이는 열일곱.”
“한참 많은 줄 알았더니···.”
“어제 약을 잘 못 먹어서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했잖아.”
“또 딴짓하느라 못 들었겠지. 집중 좀 하자. 응?”
“집중했거든?”
“그나저나 대체 무슨 약을 먹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러게. 약이 엄청 독했나 봐.”
호충은 어린 티를 내는 삼대 제자들이 우스웠지만, 비슷한 연배 덕분에 어울릴 수 있었다.
“큭. 나도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공청석유로 촉발된 환골탈태가 오히려 나이를 먹게 할 줄을 어찌 알았을까.
“검술은 집에서 익혔어? 아까 보니 정말 잘하더라?”
“애초에 시작점이 달라. 진가장의 아들이랑 우리 같이 없는 집 자식이랑 같겠어?”
“맞아. 우린 여기 와서 처음 검을 잡았다고.”
“우리는 빼자. 그래도 난 집에서 검은 잡아봤거든?”
“웃기시네. 너 개화검도 다 못 외웠잖아. 아까 현진 사숙조가 너보고 소리 질렀어.”
“야! 너도 만만치 않아. 네 검식이 흔들린다고 얼마나 혼났냐?”
“······.”
호충은 이들에게까지 거짓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잘난 척은 화산의 도인들 앞에서 한 것으로 충분했다.
“무가가 다 그렇지 뭐. 밥 먹듯이 수련해야 하는 곳이니까.”
백준은 다른 삼대 제자들과 떨어지고 나서 호충에게 다시 물었다.
“호충.”
“응?”
“원래 검술을 익혔던 거야?”
“···아니. 진가장에서 배운 건 없어. 집에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이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검을 익힌 것은 비동에서 홀로 비급을 보고 익힌 것이다.
“어? 아까는···.”
“안 배웠는데 처음부터 잘한다고 하면 재수 없지 않냐? 애들이 얼마나 짜증 나겠어?”
자신도 그런 마음이 들려던 차였다.
“큭. 그렇긴 하지.”
하지만 호충의 말을 듣고 보니 우스워졌다.
‘나보다 잘났다고 시기하는 것은 어린애나 할 짓이야.’
“그나저나 삼대 제자 중에 대사형은 누구야? 내가 아무리 객이라지만 삼대 제자의 대사형께는 인사를 드려야지.”
같은 삼대 제자들이지만 그중에 대사형이 존재했다. 보통은 화산의 직전 제자 중에 대사형이 있기 마련이었고, 백준이 화산의 직전 제자였기에 묻는 것이다.
“···네 앞에 있잖냐. 여기.”
백준의 엄지가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였냐?”
“어허. 대사형께 너?”
“큭. 죄송합니다. 대사형. 그동안 제가 몰라뵈었네요.”
“아직 그리 예를 따질 건 없어. 겨우 삼대 제자일 뿐이니까.”
“삼대 제자 중에 직전 제자는 너밖에 없는 거야?”
“설마. 내 밑으로 줄줄이 있어.”
“오호. 진짜 대사형이야?”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그럼 나 혼자 직전제자라 대사형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거야?”
“확실히 수준이 다르긴 하더라. 삼대 제자 중에 네가 제일 잘했어.”
“너 빼고?”
“에이. 나랑 같은 수준을 논하려면 백 년은 이르지.”
“야!”
“푸흐흐.”
호충은 백준 덕분에 다른 화산의 직전 제자들과도 안면을 익힐 수 있었고, 삼대 제자들 틈에 녹아들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