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六) 할
***
따그락. 따그락.
사중환은 서안(西安)에 도착해 마차 안에 고했다.
“형수님. 서안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흑패로 가세요. 서안의 흑패주를 먼저 보고 이후 기루로 가도록 하죠.”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중환과 옥비연은 서안의 흑패주가 기거하는 전각으로 마차를 몰았고, 곧 서안 흑패의 본거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사중환과 옥비연을 알아본 흑패의 조직원들이 바짝 긴장해서 인사했다.
“영창(景槍)대협을 뵈옵니다.”
사중환이 서안에서 흑패를 정리하며 새로 생긴 별호였다. 그림자 영(景)에 창(槍)이 붙었고, 그 의미는 그림자와 같은 창술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광도(光刀)대협을 뵈옵니다.”
옥비연은 도신에 비친 빛으로 인하여 빛나는(光) 도(刀)를 쓴다는 별호가 붙었다. 서안을 정리하는 시점엔 두 사람의 무위가 상당한 진척을 보인 때였기에 별호가 붙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비연의 광도(光刀)는 다른 의미도 있었다. 미칠 광(狂)을 써서 광도(狂刀)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옥비연이 익힌 황룡살도(黃龍殺刀)의 살기가 눈에 광기를 내비칠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들 수고하는 구나. 안에 흑패주께서 자리하고 계신가?”
“예. 대협.”
“우리가 왔음을 고하라.”
“예. 곧 전하겠습니다.”
사중환은 얼른 내려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가시지요.”
서안 흑패의 문지기들은 사중환이 누구를 저리 극진하게 대하는지 싶어 마차에서 나오는 인물을 주시했다.
‘영창(景槍)대협이 저리 대하시는 분이라면 분명···.’
전에 서안에서 엄청난 신위를 보여준 절대 고수를 떠올렸다.
“고마워요.”
“?”
하지만 남자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가 들여오자 다들 기이하다 여겼다. 전에 서안 흑패를 모조리 패퇴시킨 고수는 분명 번권이라는 별호를 가진 선이 굵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사박.
고운 비단신이 먼저 마차 밖으로 나왔고, 이어서 궁장을 예쁘게 차려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
“!!”
그들이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미인(美人)이었다.
“우아.”
“허.”
화진은 마차 밖으로 나와 서안 흑패의 전각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여산(廬山) 흑패와 비슷한 모양이네요. 서안은 조금 다를 줄 알았더니.”
“서안이 조금 큰 성읍이긴 하지만, 어차피 흑패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서안 흑패주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겠죠?”
“···그것도 비슷할 것이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렇지요?”
화진은 마차 곁에서 함께 따라오던 둘을 보며 말했다. 사중환과 옥비연이 아닌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이번에는 저희가 알아듣게 설명하겠습니다.”
“예. 형수님께서 또 고생하실 것 까지는···.”
두 사람은 서안 전에 들른 여산 흑패의 수뇌부였다. 정필상이 여산 흑패의 패주였고, 배소군은 흑패의 부두목이었다. 이 둘은 이미 화진의 진면목을 경험했다.
“···말로 알아들을 것 같으면 그대들도 제 말만 듣고 이해했겠지요.”
“······.”
“······.”
“두 분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세요.”
“예. 형수님.”
“따르겠습니다.”
사중환과 옥비연이 왔다는 소식에 서안의 흑패의 우두머리가 된 임강섭이 후다닥 뛰쳐나왔다.
“영창(景槍)대협! 광도(光刀)대협도 오시었군요!”
“임 패주. 다시 뵙소.”
“오랜만이오.”
임강섭은 사중환과 옥비연의 곁에 서 있는 화진을 보고 말했다.
“헌데 번권 형님은 보이지 않고 경국지색의 미인만 보내시다니···. 허허허. 이런 선물은···.”
화진을 선물로 여긴 것이다.
“항상 고맙지요. 흐흐흐.”
“······.”
끈적한 눈빛에 화진의 눈이 찌푸려졌다. 사중환과 옥비연이 얼른 나섰다.
“어허! 임 패주. 대형의 부인이 되실 분이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헙. 아이고. 죄송합니다. 형님의 부인이시라면 제게 형수가 되시는 군요.”
“가가께서 그대의 말을 들으셨다면···.”
꿀꺽.
괜히 자신의 말을 대형에게 전할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좋은 눈을 가지셨다고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하하하. 형수는 입심이 일절이십니다. 입심만으로 능히 고수라 해도 되겠습니다.”
임강섭은 방금의 실수가 민망했던지 말이 많았다.
“또한 송 대형과 서시면 천상배필로 보이시겠습니다. 대형께 어찌 경국지색인 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도 배워야겠습니다.”
호충은 역용술(易容術)을 통해 자신의 얼굴이 아닌 새로운 얼굴을 사용했다. 연안에선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만, 연안의 연위 흑패를 접수한 다음부터는 송재호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번권이라는 별호만 드러냈다. 송재호는 진양의(眞兩意)의 스승이었지만, 송 영감을 할아버지로 만들기 위해 같은 성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진가장의 진호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들어가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예. 형수님. 강환아! 가서 차라도 내와라.”
“예. 형님!”
강환은 강섭의 동생이었다. 서안은 다른 흑패와 달리 형제가 흑패를 운영하고 있었다. 호충은 이 두 형제의 우애가 깊음과 다른 흑패주보다 때가 덜 묻었음을 알아보고 서안을 맡겼다.
화진이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사중환과 옥비연은 뒤로 가서 시립했다. 또한 여산 흑패의 둘도 곁에 서 있었다.
“영창(景槍)대협과 광도(光刀)대협은 어찌···.”
“오늘은 형수께서 먼저 볼일이 있으시다.”
자신에게 전해준다던 무공이 궁금했지만, 잠시 더 미루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뭐. 그러지요.”
화진은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황화진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려요. 흑패의 일은 가가께서 직접 관리하실 터이나, 기루의 일은 제가 맡으라 하셨지요.”
“허허. 이미 번권 형님께 듣기는 하였지요. 하지만 형수께서 관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험한 일이 될 것인데···.”
“나 또한 기루를 운영하고 있으니 패주께서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아.”
“그와 관련하여 미리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서안 흑패에서 직접 운영하는 홍루와 청루의 수익 배분을 확정하려 해요.”
“수익 배분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말이 쉽겠군요. 팔(八)대 이(二)의 비율은 변하지 않을···.”
“서안 흑패가 팔(八)을 가져가고 남은 이(二)를 기녀들이 나눈다는 말씀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사(四)대 육(六)으로 합니다.”
“!!”
“흑패는 사(四)할의 수익을 가져가고 육(六)할은 기녀들의 몫으로 남겨두세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어찌 팔(八)할을 사(四)할로 줄일 수 있습니까! 육(六)할도 말이 안 되거늘!”
“흑패는 기루의 일에 그다지 공헌하는 바가 없어요.”
“기녀들을 보호하고 영업이 지속되도록 돕는 것이 흑패의 일입니다. 또한 기루에서 사용하는 술과 음식을 조달하는 것도 흑패의 주요 업무입니다. 어찌하여 공헌하는 바가 없다고 하십니까!”
“그 전부를 더했기에 사(四)할입니다. 실제 기루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기녀들입니다. 제가 기루를 관리하는 이상 이들에게 지금까지와 같은 박봉을 줄 수는 없습니다.”
“형수!”
임강섭의 외침에도 화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임 패주. 나는 번권 대협의 전권을 받아 이 자리에 왔어요.”
“······.”
임강섭은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끼웠다. 협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임 패주는 주로 도(刀)를 사용하신다고 하지요?”
“···갑자기 내 도가 왜 나온단 말입니까? 방금까지 기루의 수익 배분을 논하였는데···.”
“재미있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여산 흑패의 패주님도 제 재주를 보시고 수익 배분을 받아들이셨거든요.”
“···여산 흑패?”
옥비연이 임 패주의 의문에 답했다.
“대형께서는 서안에 이어 여산에 있는 흑패도 품에 넣으셨다.”
“크흠. 대체 그럼 몇 개나 되는 흑패가···.”
“앞으로 중원의 모든 흑패가 대형의 품으로 들어올 것이다.”
“······어, 어쨌든. 내 도는 왜 물으십니까?”
“잠시 내게 보여주세요. 얼마나 강한 무기인지 보고 싶거든요.”
“허! 아녀자가 들기엔 조금 무거울 것이오.”
임강섭은 묵직한 자신의 애병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쿵.
화진은 작은 미소를 보이며 도병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화진의 옥처럼 하얀 손이 가볍게 도갑에서 도신을 꺼내들었다.
“상당히 잘 재련된 도(刀)로군요.”
임강섭은 화진이 가볍게 들어 올린 자신의 애병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자랑을 빼먹지 않았다.
“서안의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작품이오. 무게만 삼십 근이 넘소.”
퉁.
화진은 기껏 꺼낸 도(刀)를 다시 탁자에 올려놨다.
“잘 보시어요. 임 패주.”
화진의 섬섬옥수가 펼쳐졌고 곧 위로 들어올렸다.
“지, 지금 뭘 하는···.”
꼭 손으로 도를 내리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손이 부러집니다!”
휘익.
명경수(明經手)의 운용으로 단단하게 변화한 화진의 손날이 대기를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따앙.
“!”
임강섭의 도는 끝 부분이 깔끔하게 부러져 있었다.
‘저렇게 쉬이 부러질 도가 아닌데···.’
다시 화진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허읍.”
땅.
도는 다시 토막 나서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땅. 땅. 땅. 땅.
화진의 손날이 들렸다가 떨어질 때마다 도가 조각나고 있었다.
“이 여섯 조각이 기루의 몫입니다. 남은 것이 흑패의 몫이죠.”
“······.”
도신은 도병에 짧은 길이만 남아 있었다.
땡그랑.
화진은 짧은 도를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가가께서 세우신 패주를 제가 무를 수 없기에 패주 대신 도가 희생했다 여기세요.”
“···고, 고수.”
번권과 의형제들만 고수가 아니었다. 번권의 부인이 된다는 눈앞의 여인 또한 고수였다.
‘어찌 죄다 고수야!’
“아니면 제가 육(六)할을 수긍할 패주를 다시 세워야 하겠습니까? 원한다면 그리하지요.”
임강섭은 번뜩이는 화진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전에 번권 대형에게 느꼈던 공포가 다시 떠올랐다.
‘부창부수(夫唱婦隨)로구나···. 대형도 살기를 뿜지 않았지만, 손속은 잔인하기 그지없었지.’
“아, 아닙니다.”
사중환은 딱딱한 분위기를 환기하려 뒤이어 들어온 둘을 소개했다.
“이쪽은 여산 흑패의 패주 정필상과 그를 보필하는 배소군이오.”
사중환의 소개에 임강섭이 벌떡 일어났다.
“아. 서안의 임강섭이오.”
“여산의 정필상이오.”
“배소군이외다.”
“에효. 그냥 알았다고 했으면 됐을 것을···.”
“임 패주도 아까운 도만 날려먹었소. 우리도 애병을 그리 떠나보냈다오.”
여산(廬山) 흑패의 정필상과 배소군은 이미 여산에서 같은 일을 겪었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뻔히 알고 있었다.
“미리 얘기를 해주시지···.”
“말 한다고 들었겠소?”
“우리는 저승 문턱까지 다녀왔소. 임 패주는 운 좋은 줄이나 아시오.”
화진에게 함부로 했다가 사중환과 옥비연에게 제대로 얻어터진 둘이다. 애병을 날려먹고 맞기까지 한 것이다.
“······.”
임강섭은 자신의 조각난 도신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육(六)할을 기루에 내주겠습니다. 형수.”
육 할을 내주지 않으면 자신의 몸뚱이도 저와 같이 조각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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