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32)

작업 시작

***

호충이 왕호의 아침 수련을 지시하고 화산에 올랐다.

“어서 오게. 진 공자.”

이젠 너무나 친숙해진 현인이 화산의 정문에서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각주께서 매번 이리 나와 계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게다가 접객각의 각주도 아니시고 연무각 각주이시지 않습니까.”

“허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네.”

각주가 정문에 나와 향화객을 맞이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호충이 처음 화산에 올라와 현수 도장을 만난 것도 우연하게 시기가 맞았기 때문이지, 평소라면 접객각의 다른 제자들이 맞이했을 것이다. 하물며 연무각의 각주인 현인이 이 자리에 나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현인이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화산의 제자들이 정문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도장.”

“허허. 그러지.”

연무장으로 가는 동안 호충은 계속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야 했다.

“현진 도장.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흠. 어서 가세.”

“현우 도장께서도 오시었군요.”

“요즘 삼대 제자들 보는 재미가 있더군.”

“어휴. 현수 도장도···.”

“진 공자는 이대 제자들과 함께 수련을 해야 하는데 말이야.”

“현무 도장···.”

“현용 도장···.”

“현중 도장···.”

호충은 화산의 현자 배를 이끌고 연무장으로 가고 있었다.

‘왜 소문을 내시냐고요. 이 양반들아.’

현진과 현인이 현자 배 동기들에게 호충의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천년기재(千年奇才)가 화산에 들어왔다!”

소문을 들은 현자 배가 할 일은 당연했다. 삼대 제자들의 연무장은 현자 배로 가득 채워졌다. 모두 호충의 검식을 보기 위함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개화검이 어찌···.”

“개화검뿐이 아니라 설화검도 대단하군.”

“검에 마음을 담는 경지라···.”

“몸이 타고났군. 대체 진가장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가.”

그 다음부터는 항상 이 모양이었다. 혹시나 호충이 화산에 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여기저기 전각 뒤에 숨어 있다가 호충이 정문을 넘어 들어오면 우연하게 만난 척하며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썩을 또 사숙조님들이 다 왔어.”

“미치겠네.”

“야. 들으시겠다. 조용히 해.”

삼대 제자들은 죽을 맛이다. 안 그래도 현진의 불호령으로 인해 항상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현자 배의 사조들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따위로 검식을 그리려거든 종남에나 가라!”

“어찌 그리 심한 말씀을···.”

“아니면 저걸 보고 배우란 말이야!”

“크흑.”

“넌 겨우 그것 밖에 못 하는 것이냐! 왜 저렇게 휘두르질 못해!”

“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보법은 언제 익숙해 질 것이냐! 쟤는 한 번 보고 완벽하게 익혔다지 않았느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숙조님.”

비교 대상은 당연히 호충이었다.

“······.”

‘이래서 얘들이 날 싫어하잖아. 이 사람들아!’

백준 덕분에 조금 친해질 참이었는데, 현자 배의 도인들로 인해 삼대 제자들과 한참 멀어졌다. 지금도 도끼눈을 뜨고 호충을 노려보는 삼대 제자들이다.

.

.

.

전에는 지나는 길에 만난 이대 제자들까지 호충을 알아봤다.

“네가 그 놈이냐?”

“예?”

“진호충. 네 놈 때문에···.”

으득.

분노에 가득 차 이빨을 갈아 대는 사람 옆에 서있던 다른 이대 제자도 한 마디 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이대 제자들도 현자 배의 스승들에게 무공을 익히며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호충은 잘못한 것도 없이 사과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도우.”

“···휴우. 네가 무슨 죄가 있을까. 못난 제자가 스승을 화나게 한 게지.”

“세상은 어쩌자고 저런 놈을 화산에 보냈을까.”

아직 젊은 이대 제자들에게 화풀이를 할 이유도 없었다. 자신 덕분에 괜히 수난을 겪고 있는 이들이었다.

“자중하겠습니다.”

“어디 스승께서 그리 칭찬하는 네 검식이나 보자.”

“맞아. 나도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봐야겠다.”

“···도우께서 말씀하시니 보여드리지 않을 수 없지요.”

호충은 그날 화산에 조금 늦게 내려간다는 각오를 하고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저는 개화검과 설화검을 배웠으니 두 가지 검법을 시연하겠습니다.”

“···개화검과 설화검? 고작 그거였어?”

“대체 우리가 언제 적에 배운 검법이야?”

이대 제자가 삼대 제자일 시절에 익힌 검법이었다. 대략 십년을 터울로 제자를 받는 화산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들이 개화검과 설화검을 익힌 것은 최소 십년 전의 일이었다.

“어설픈 실력이니 감안하고 봐주십시오.”

호충은 밑밥을 깔고 개화검의 기수식을 시작했다.

우웅.

시작부터 목검이 울어댔다.

“!”

“!”

호충의 시연은 순식간에 개화검을 지나 설화검에 이르렀고, 이대 제자들은 자신의 심상에 떠오른 역동하는 생명을 볼 수 있었다.

‘이, 이것이 진실한 개화검과 설화검. 대체 난 지금까지 뭘 했단 말인가!’

‘내가 화산의 검을 깨닫지 못했다는 스승의 말이······. 사실이었어.’

착.

호충은 두 검법의 시연을 마치고 차분하게 목검을 내려놨다.

“부족한 실력이라 부끄러울 뿐입니다.”

“······.”

“······.”

이대 제자 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개화검과 설화검은 익힐수록 새로운 맛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두 검법의 오의를 깨닫기엔 무리였습니다. 항상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지요.”

“오의가 아니야?”

“···아직도 깨닫고 있다고?”

지금 본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늘과 내일이 같다면 어찌 무인이라 하겠습니까. 매일 앞으로 정진하며 새롭게 변화해야지요.”

“!”

“!”

‘처음 무공을 익히며 가졌던 마음가짐···.’

‘···초심을 잊고 있었다.’

이들도 삼대 제자로 처음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오늘 열심히 수련하면 내일은 조금 더 강해진다는 확신으로 가득했던 때였다. 하지만 삼대 제자를 지나 이대 제자가 되고 비슷한 무공을 반복하여 익히며 조금씩 현실에 적응해 나갔다. 말이 적응이지 결국은 초심을 잊고 현실에 안주한 것이다.

둘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호충을 향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진 공자께 큰 가르침을 받았소.”

“나 또한 그렇소. 우리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

‘화산은 명문 정파의 의기(意氣)가 남아있었구나.’

핵심적인 무공을 잃었지만, 가장 중요한 정신은 그대로였다. 현자 배의 무공에 대한 열의도 결국 화산의 정신이 이어진 결과였다.

‘화산은 화산의 정기를 되찾을 것이다.’

“대 화산의 정신이 지금도 여전함을 알겠습니다.”

“앞으로 이대 제자들은 진 공자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대 제자들도 조심하라 이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우.”

.

.

.

이후 이대, 삼대 제자들이 호충에게 불만을 표한 일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삼대 제자들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것까지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만간 날을 잡아야겠군.’

왕호의 무공 수위가 점차 생각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화산을 떠날 때가 됐다.’

***

며칠 뒤 왕호는 손에 든 두 권의 서책을 들고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것이 화산의···.”

“쉿. 입 밖으로 내지 마라.”

호충은 왕호의 손에 들린 두 권의 책자를 받아 보자기로 싸맸다.

“너는 오늘 정해진 시각에 화산의 정문으로 가서 행패를 부려야 할 것이다.”

“후우. 예.”

“나머지는 전부터 얘기한 바와 같다. 알겠느냐.”

“어렵지 않지요. 대형과 합을 맞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그럼 화산의 제자를 만나 천천히 산에 오르겠다.”

“예. 대형. 거기서 뵙지요.”

왕호는 담을 넘고 비호처럼 날래게 신형을 뽑아내 화산을 올랐다. 호충은 천천히 집을 나서서 화산의 입구에서 만날 사람을 기다렸다.

‘올 때가 되었는데···.’

화산의 입구에서 일 다경을 기다려서야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호충!”

“백준!”

호충이 기다리던 사람은 삼대 제자들의 대사형인 백준이었다.

“어째서 아직 화산에 오르지 않았어?”

“친우가 돌아온다고 하니 함께 오르려고 했지.”

백준은 본가에 잠시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었다. 본래 호충은 백준과 따로 약속을 잡고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이런 우연한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바로 움직였다.

“하하. 화산에 오르는 길이 심심하진 않겠어.”

“어서 오르지. 지금부터 올라야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할 거야.”

“오늘 많이 늦겠는데? 혼나지 않을까?”

오늘 수련에 늦어 호충이 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아니지···. 화산엔 너를 혼 낼 사람이 없구나.”

화산의 스승들 가운데 호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삼대 제자들에게만 끝없는 눈총을 받을 뿐이다.

“큭. 다들 좋은 분들이야.”

“네게만 이겠지.”

“그렇지. 나만 안 혼나면 끝이지.”

“푸흐흐. 가자.”

호충과 백준이 화산을 오르는 동안 왕호는 빠른 속도로 화산을 질주하고 있었다.

***

“헉. 헉. 아이고.”

왕호는 화산의 정문 근처에서 한참 쉬고 나온 참이다. 하지만 미리 호충과 얘기 한 대로 진이 빠진듯 한 연기를 선보였다. 왕호는 기어가듯이 화산의 정문으로 향했다.

“헥헥. 도사님. 여기가 화산이 맞습니까?”

“···이렇게 높은 곳에 도관이 있는 곳은 화산밖에 없지요.”

“어휴. 다행입니다. 제가 제대로 찾아왔군요.”

“향화를 위해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물건을 좀 팔러왔지요. 헤헤.”

“물건?”

현인은 안 그래도 호충이 화산에 오르지 않아 심기가 날카로웠기 때문에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등이 굽은 꼽추였고, 머리엔 깊이 두건을 쓰고 있었지만 봉두난발의 머리칼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인상도 좋지 않았다.

화산에 도착하기 전에 등에 옷을 집어넣고 가발을 쓴 다음 두건으로 얼굴까지 감춘 것이다.

“화산은 장사하는 곳이 아니오. 썩 물러가시오.”

“무슨 물건인지는 듣지도 않으십니까요?”

“······.”

현인은 물건을 팔러왔다며 봇짐도 보이지 않는 상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소.”

“화산에 아주 중요한 것을 들고 온 참인데···.”

“하! 안 산다고!”

현인의 호통에 안에 있던 현자 배 도인들이 하나씩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진 공자는 아직인가?”

“다들 잘 오셨습니다. 제 말 좀 들어주시오. 제가 화산의 중요한 물건을 가져왔다는데 이 분이 듣지도 않고 저를 내 쫓으려 하지 뭡니까.”

“이보게 현인. 뭔지나 듣고 내 쫓게.”

“듣는다고 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 않나.”

“안 그래도 진 공자가 오지 않아 심심하던 차에 잘 됐군.

“에잉.”

현인이 불만에 가득해 몸을 돌리자 왕호는 품에 있던 보자기를 꺼내 말했다.

“자아. 도사님들 제가 뭘 가져왔는지 아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것이옵니다.”

“뭔데 그래?”

다른 현자 배 도인들도 왕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눈을 빛낸 왕호는 보따리를 풀어내며 말했다.

“바로바로~~~. 짜잔! 바로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과 이를 익히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개화검결(開花劍結)이올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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