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232)

화산의 정화

***

현인은 호충을 의약당으로 데려갔고, 백준은 삼대 제자에 불과하지만 기어코 장문인과 마주했다.

“어허. 삼대 제자가 독대를 원한다라···. 너는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아느냐?”

“···기사멸조(欺師蔑祖)의 대죄가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대 제자와 각주는 물론이고 그 위의 높은 배분이 또 있었다. 그런데도 이 모두를 건너뛰고 직접 장문인을 보고 얘기하겠다고만 고집했으니, 기사멸조(欺師蔑祖)의 죄를 물어도 할 말이 없었다.

“죽음까지 각오했다는 말이냐?”

“예. 장문인.”

화산의 객에 불과한 호충이 보여준 의기가 백준의 가슴에도 불을 지폈다.

“어디 무슨 말인지나 들어보자.”

백준은 품에 고이 가져온 보자기를 꺼냈다.

“방금 산에서 만난 고인이 전해준 비급입니다. 호충은 이 비급을 금 십만 냥을 주고 샀습니다.”

“허! 혹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과 개화검결(開花劍結)이더냐?”

백준은 보자기를 펼쳐보지도 않은 장문인의 입에서 비급의 제목이 흘러나오자 대경하며 물었다.

“헙! 어찌 아셨습니까?”

“허허. 현자 배에서 사기꾼을 놓쳤다고 들었거늘 결국 너희가 당하고 말았구나. 이를 어찌할꼬.”

이후 백준은 장문인의 입을 통해 그가 화산에 다녀갔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본을 들고 왔습니다. 장문인.’

“장문인 그 꼽추는 사기꾼이 아니었습니다.”

“어허. 너희가 사기를 당했대도.”

“저는 호충이 개화검결을 펼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어라?”

“호충은 현자 배의 현진 사숙조를 비롯한 모든 현자 배의 사조들께서 귀히 여기는 기재이옵니다. 지금까지 현인 사숙조와 현진 사숙조께서 보여주신 개화검과 설화검을 단 한 번 보고 똑같이 재연했습니다.”

“그 얘길 듣긴 했다만···.”

그래봐야 기본 검술이기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백준이 말한 개화검결을 개화검으로 알아들었기에 여전히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호충은 꼽추가 준 개화검결을 보고 개화검결의 마지막 초식까지 완벽하게 펼쳤으며······.”

백준은 마음을 가다듬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

“검 끝에서 매화를 피워냈습니다.”

“!!”

장문인은 현인이 봤다던 매화를 떠올렸다. 현인은 심상에서만 매화를 보았다고 하였다.

“···심상에서 보았더냐?”

“아닙니다.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휘릭.

청진 장문인의 손이 급하게 보자기 속의 비급을 향해 뻗어졌다.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파라락.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라 적힌 비급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청진의 눈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진정······.”

어찌 비급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화산의 정수가 물씬 풍기는 검보가 비급에 가득 들어있었다. 이후 개화검결도 얼른 펼쳐서 살폈다.

“이건! 개화검법이 아니라 개화검결!”

“진정한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입니다. 개화검결(開花劍結) 또한 마찬가지이옵니다.”

“누, 누가 알고 있느냐.”

“여기까지 안내해주신 현인 각주께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잘 하였다. 정말 현명하게 처신하였어.”

“이 또한 호충이 일러준 것입니다. 장문인.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호충의 공입니다. 호충은······.”

이후 백준은 지금까지 호충이 보여준 것과 당부한 말들을 장문인에게 쏟아냈다.

“사내끼리의 진심이라···. 녀석은 사람을 상대할 줄 아는구나. 덕분에 사본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욱 좋다.”

“정말로 단번에 익혔단 말이냐? 선재로다.”

“그 정도 고수라면 별호가 알려졌을 터인데···. 꼽추 고수의 얘기는 들어보질 못 했구나.”

“······허허. 그렇지. 녀석이 산 비급이니 진가장으로 들고 갔어야 맞는 일이다. 우리가 어찌 알았겠느냐. 제목만 바꿔서 익혔다면 우리가 매화검법을 어찌 알아볼까.”

모든 말을 쏟아낸 백준은 호충의 걱정을 전했다.

“호충은 숨겨주십시오. 만약 진가장에 알려진다면 녀석은······.”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진 가주의 심성을 생각하면···. 호충이 가문에 돌아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이다.”

“!!”

심하면 쫓겨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너는 죽음까지 각오했단 말이냐!’

“아무리 황궁이 상승 무공을 가진 무림 방파를 겁박한다지만, 다들 몰래 숨겨두고 있음이다. 우리 화산만이 진실로 무공을 실전하였다. 하지만 이젠 우리도 갖게 되었다.”

“아!”

청진은 정무맹의 장문인들과 교류하며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황궁엔 기를 쓰고 정보를 막고 있었지만, 저들끼리는 공공연한 비밀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다들 최소한 하나 정도는 상승 무공을 숨겨두고 익히는데, 오직 화산만 상승 무공이 없었다.

“화산은 이번 일을 철저히 숨기고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과 개화검결(開花劍結)을 화산의 제자들에게 전수할 것이다.”

“예. 장문인. 제자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을 다물 것입니다.”

“헌데···. 진 공자가 이십사수매화검법도 보았느냐?”

“······.”

백준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유심히 보던 호충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입은 전혀 다른 말을 뱉어냈다.

“호충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봐도 자신이 알아볼 수 없다며 개화검결만을 확인하였습니다. 개화검결이 진본이라면 이십사수매화검법도 당연히 진본이리라 여긴 것이지요.”

‘너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본 적도 없는 거야.’

화산 검법의 정화인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외인이 함부로 익혀서는 안 되는 검법이었다. 만약 호충이 이를 보았다고 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거짓을 입에 담은 것이다.

“진 공자가 실로 영특하구나.”

“녀석은 개화검결의 마지막 초식을 무리하게 펼친 이유로 내상을 입었습니다.”

“허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현인 각주께서 의약당으로 엎고 갔습니다. 저는 비급을 장문인께 전해야 했기에···.”

“······.”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청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삼대 제자 백준. 오늘 네가 화산의 정기를 되찾아왔음이로다.”

“···삼대 제자의 맏형으로 당연한 일이옵니다.”

“호충이 금 십만 냥을 주고 샀다 했었지?”

“예. 장문인. 부디···. 살펴주십시오.”

“싸게도 사왔군. 하지만 우리는 제 값을 주고 사들여야겠구나.”

“···감사합니다. 장문인.”

이것이 호충의 마지막 노림수였다.

이름하야 없는 놈 털어먹기.

빈곤한 화산을 생각해 조금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했는데, 호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에 호구인 법이었다.

***

“드르렁. 쿨.”

호충은 늘어지게 잠에 빠져 있었다.

“이보게. 현민 당주. 이 아이의 몸은 괜찮은가?”

“···괜찮을 것이오. 각주.”

안 괜찮을 것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잠들었을 뿐이다. 지금 코까지 골고 있지 않은가.

“어허. 어찌하여 내기가 엉켜서는···.”

‘내기가 엉킨 것 같진 않은데···.’

의약당의 현민은 진맥을 통해 속이 멀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기공에 관해서라면 항상 화산의 제자들을 살피는 연무 각주가 더 나을 것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기운이 조금 상하긴 한 것 같으나···. 별 일은 없을 것이오.”

현인은 백준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으득.

“백준.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장문인 처소에서 온 이대 제자로 인해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다.

“현인 각주님. 장문인께서 급히 오라하시었습니다.”

“장문인께서?”

“화산의 각주와 당주를 모두 부르셨고, 원로원까지 소집하셨습니다.”

“워, 원로원까지?”

원로원은 현(玄)자 배의 윗 배분으로 무(武)자 배를 뜻하고···.

“어찌 스승님들까지···.”

현(玄)자 배의 스승임과 동시에 화산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배분이었다.

“장문인과 같은 배분의 태사조님들께서 계셨다면 그 분들도 소집할 기세셨습니다.”

“!!”

청진은 청(靑)자 배에서 마지막 남은 화산의 제자였다. 모두 죽은 것은 아니나, 높아진 공력으로 인해 태상원로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무림에 일절 관여할 수 없는 태상원로원은 호충이 궁금해 하던 전대의 거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어서 가시죠. 각주님. 당장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 알았다. 바로 가지.”

“현민 당주님도 가시지요.”

“나까지? 알았네.”

현인과 현민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

장문인의 호출에 모인 화산의 도인들이 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청(靑)자 배에선 오직 청진 장문인만 남아 있었기에 다른 청자 배의 인물은 없었고, 무(武)자 배는 무려 스물이 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 현(玄)자 배의 각주들과 당주들이 속속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화산파의 대회합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삼대 제자 백준이 장문인 곁에 앉아 있었다.

청진은 좌중을 둘러보다가 비어 있는 무(武)자 배의 자리를 보고 물었다.

“무(武)자 배의 원로들이 몇 보이지 않는구나.”

“장문인. 무성(武成)을 포함한 화산의 원로 다섯이 마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마인을 찾는 일이니만큼 처음 마인을 발견했던 현자 배를 불러들이고 가장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화산의 원로들을 내보낸 것이다.

“들어온 소식이 있는가.”

“···송구하옵니다.”

뭐라도 찾았다면 전서구를 보냈을 것이나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쉬이 찾을 수는 없겠지. 다만 우리 화산이 가장 먼저 흔적을 찾았으니 마인들의 꼬리도 먼저 잡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일은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터···.”

청진은 오늘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기에 작은 일에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오늘 화산의 중추를 이렇게 모은 것은 모두의 의중을 모아야 할 일과 전할 소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

“이 일을 의논하게 전에 현(玄)자 배에게 묻겠다. 오늘 본문에 방문했던 꼽추를 맞이한 이가 누구인가.”

현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를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장문인.”

“연무각의 각주가 직접 맞이하였군. 현인 각주. 그에 관하여 이 자리에서 보고해주시게.”

“······.”

이미 장문인에게 다 전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여기며 입을 열었다.

“저는 화산의 정문에서 다른 제자 대신 번을 서고 있었습니다. 정오가 되기 전 한 인물이 정문에 도착하였고······.”

이후 현인이 직접 보고 겪었던 일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현인의 입에서 화산의 비급이 등장했지만, 무(武)자 배의 원로들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현인과 마찬가지로 사기를 치려는 인물로 생각한 탓이다.

“현(玄)자 배의 동기들과 사기꾼을 쫓았으나,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여 녀석의 용모파기를 화음으로 보내 수배할 예정입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합리적인 일처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어디서 또 사기를 치려 들 수도 있는 일. 각주가 현명하게 처신하였소.”

“그렇습니다. 감히 화산에 와서 비급으로 사기를 치려하다니···.”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청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武)자 배의 말에 동조하는 듯했다.

‘현인이 무(武)자 배에 욕을 먹을 일은 없겠구나.’

현인이 어째서 비급을 가진 자를 내쫓았는지 모두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청진은 꼽추가 진실한 비급을 가져와 거래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현인이 어떤 고초를 겪을지를 예상하고 이리한 것이다.

“지금 그 마음을 잘 기억하길 바라는 바이다.”

““예. 장문인.””

이후 청진은 호충을 위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일을 겪고 보니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진실로 화산의 비급을 가져왔다고 했을 때 화산은 얼마를 지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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