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검결(開花劍結)
***
모두가 아미를 찌푸리고 고민에 빠져있자, 청진이 조건을 더했다.
“오늘과 같이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과 개화검결(開花劍結)을 가져왔다고 가정해보세. 오늘처럼 금 십만 냥은 어림도 없겠지?”
그제야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금 십만 냥은 말도 안 됩니다. 최소한 이십만 냥은 요구하겠지요.”
“이십만 냥도 너무 낙관적인 금액입니다. 삼십만 냥을 요구해도 내줘야겠지요.”
“만약 진실로 화산의 정화가 돌아온다면 화산의 전각을 팔아서라도 사들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장문인.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은 화산의 모든 것입니다. 전각은 새로 지을 수 있으나, 화산의 검법은 새로 창안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잘 들었다. 그럼 삼대 제자의 말을 들어보겠다.”
청진이 눈짓하자 백준이 잔뜩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대 제자 백준 여러 조사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저 아이는 삼대 제자의 맏이가 아닌가. 어찌···.”
모두들 같은 마음으로 백준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었다. 이대 제자도 참석하지 못하는 화산의 회의에 삼대 제자가 참여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백준. 네가 오늘 보고 겪은 것을 말하라.”
“예. 장문인. 저는 집안에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화산 초입에서 저를 기다리던 진 공자와 함께 화산에 올랐습니다.”
대부분의 도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 얘길 왜 들어야···.’
의문이 생기기 전에 바로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둘이 한참 화산에 오르는 길에 꼽추 하나를 만났습니다.”
“!”
“!”
“!”
조금 전에 각주에게 보고 받았던 꼽추가 아니던가.
“그는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을 금 십만 냥에 사라며 강요했습니다.”
“허어. 녀석이 또 사기를 치는구나!”
“그 자리에서 잡았어야 했소.”
“그래도 다행이 아닙니까. 삼대 제자에게 금 십만 냥은 없었을 것이니···.”
“저는 그만한 돈이 없었지만, 진가장에서 화산의 손님으로 온 진 공자는 품에 십만 냥짜리 전표를 품고 있었습니다.”
“커흡!”
“주었느냐?!”
“사기를 당했느냔 말이다!”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주었습니다.”
현인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백준! 너는 어찌하여 호충이 사기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
“어허. 각주. 여기가 어디라고 언성을 높이는가.”
“···죄송합니다. 장문인.”
사과를 하면서도 현인의 눈은 백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백준. 계속 해보아라. 앞으로 누구도 너의 말을 끊지 않을 것이다.”
“예. 장문인.”
백준은 허리를 펴고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 사기가 분명하다 하였으나, 진 공자는 개화검결을 확인하여 진위를 파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꼽추는 의심이 가득하여 조금만 보라 했지만, 진 공자는 다 보게 하지 않으면 사지 않겠다고 하였지요. 결국 진 공자의 뜻대로 개화검결을 전부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진 공자는 지금 자신이 본 개화검결을 펼쳐 검법의 진위를 확인하겠다고 하였고···.”
“비급을 한 번 본다고 검법을 펼치면 그게 사람인가?”
“허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거 조용히 하시게. 장문인께서 말을 끊지 말라하시지 않으셨는가.”
청진은 무(武)자 배의 원로들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진 공자는 이미 삼대 제자들과 수련하며 두각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는 연무각의 현인 각주님을 포함한 사숙조님들께서 알고 계실 터이니 나중에 확인하시면 됩니다.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준은 호충의 검 끝에 피어난 매화 봉오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진 공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개화검결의 검식을 펼쳤고 특히 마지막 검식에서 선명한 매화 봉오리를 드러내보였습니다.”
매화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원로들이 대경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장문인이 말을 끊지 말라했던 것도 소용없었다.
“뭐라!!”
“매화라고!!”
“진정이냐?!”
백준은 목소리를 높였다.
“개화검결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습니다. 말 그대로 화산의 정수가 담긴 검법이었습니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진 공자나 제가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그대로 장문인께 가져다드렸고 장문인께서 진본임을 확인해주셨습니다.”
모두의 눈이 청진을 향했다.
“모두 사실이다. 오늘 화산에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과 개화검결(開花劍結)이 돌아왔다. 내가 직접 확인한 바 모두 진본이다.”
“······.”
“······.”
“······.”
무(武)자 배의 원로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떤 이는 차오른 눈물을 얼굴로 흘려보내고 있었고, 어떤 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얼마나 바라던 순간인가. 화산에서 실전한 많은 상승 무공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었다. 또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배우기 위해 익혀야 하는 개화검결까지 돌아왔으니 앞으로 화산에 매화가 피어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현(玄)자 배의 각주와 당주들은 입을 쩍 벌리고 놀라는 중이었다.
‘그, 그럼 그 꼽추가 진본 비급을 들고 왔었다는 말이 아닌가!’
청진은 모두의 감정이 수습될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두 무공은 엄밀하게 따져 진가장의 막내인 진호충 공자의 것이다. 아직 화산은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처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화산은 진 공자에게 얼마를 주어야하는가.”
“그, 그건···.”
“아아······.”
청진은 아까 원로들이 거론했던 거액을 다시 입에 올렸다.
“지금까지 원로들은 이십만 냥과 삼십만 냥 그리고 화산의 전부를 털어주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대체 진 공자에게 얼마를 주어야 합당할 것인가!”
“······.”
“······.”
“······.”
원로 몇몇이 현인을 돌아봤지만, 청진이 먼저 호통을 쳤다.
“각주는 잘못이 없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현인과 같이 판단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원로들도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에효. 그래도 조금 싸게 살 기회였건만···.”
“하지만 장문인. 벌써 비급이 저희 품에 들어왔으니···.”
그냥 꿀꺽하자는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줄인 것이다.
청진은 노기를 참아내며 원로들에게 말했다.
“비급의 주인인 진 공자는 지금 화산의 의약당에 누워있다. 내공이 받쳐주지 않았음에도 무리하여 개화검결을 펼쳤기 때문이다. 또한 삼대 제자가 내게 가져온 화산의 비급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진 공자를 대신하여 가져온 것이다! 이 또한 잘못이라 바로잡아야 하거늘, 원로들은 화산파를 저잣거리의 무뢰배와 동급으로 만들 셈인가!”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허튼 소리를 했습니다.”
무(武)자 배의 원로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당사자와 협의해야 빠를 줄로 압니다.”
청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준을 찾았다.
”백준!”
“예. 장문인.”
“의약당에 가서 진 공자가 깨어났는지 확인하고 이리로 데려 와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
백준은 급하게 걸음을 옮겨 의약당으로 향했다.
적막한 의약당엔 코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드르렁. 쿠울.”
“······.”
잠시 호충이 자는 모습을 보던 백준은 손을 뻗어 호충을 흔들었다.
“호충! 일어나봐.”
“우헙. 뭐야?”
“나야. 백준.”
“어휴. 대사형께서 오시었소?”
“이제 장난할 여유도 있어?”
“큭. 화산에 들어왔잖아. 마음 푹 놔도 되지.”
“······.”
백준은 금 십만 냥을 쓰고도 저리 마음이 편한 친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장문인께서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각주와 당주들은 물론이고 화산의 원로들까지 소집하셨어. 비급 때문이야.”
“오오.”
호충은 없는 놈 털어먹기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음에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오랜 계획이 드디어 실현되고 있구나.’
이번 일은 없는 놈 털어먹기로 끝이 아니었다. 진가장에서 자신을 화산으로 보낸 원인까지 한방에 해결할 묘수였다. 이제 진가장이 화산의 매화검법을 가져가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진가장이 매화검법을? 어림도 없지.’
호충은 지금까지 진가장에서 받은 설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난 네가 시킨 대로 다 했다.”
“역시 대사형이야.”
백준은 침상에 허리를 숙이고 호충의 귀에 조그맣게 말했다.
“네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보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으니, 너도 못 봤다고 해.”
“···오. 똑똑하기까지?”
백준은 호충이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두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보다야 못하지만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 넌 어떻게 한 번 보고 그걸···.”
“개검이야 쉽잖아.”
개화검이 아니라 개화검결이었지만, 호충에겐 똑같은 개검이었다.
“···으휴. 어쨌든 너도 데려오라고 하셨어. 지금 당장 가야해.”
“에효. 또 가서 개화검결을 보여야 되겠네. 내 검을 챙겨주겠어? 내가 검을 들고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설마 그러진 않겠지···. 방금 장문인께서 네가 내상을 입었다고 모두에게 얘기했다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못 믿는 사람도 많거든. 그럼 나랑 내기하겠어? 난 금 십만 냥을 걸지.”
백준은 그런 돈이 없었고, 내기에 이길 자신도 없었다.
“······네 말대로 될 것 같아.”
호충의 말대로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기는 불성립이네. 그럼 내가 또 쓰러지거든 부탁해.”
“······보여 달라고 해도 안 보여준다는 선택지는?”
“에이. 화산에서 얼마나 원하던 매화인지 몰라? 내가 조금 힘들다고 화산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어.”
“너란 놈은 대체······.”
“가자. 백준.”
호충은 눈을 반짝이며 화산의 중추가 모인 곳으로 향했다.
“같이 가!”
백준은 호충의 검을 들고 뒤따랐다.
***
끼이익.
백준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호충은 백준의 뒤를 따라 들어와 청명한 미소와 함께 포권했다.
“진가장의 진호충이 여러 화산의 도장들을 뵈옵니다.”
“···진 공자.”
청진 장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하여 포권하며 말했다.
“화산의 구십칠대 장문인 청진이 화산의 은인을 뵙소.”
화산의 장문인이 보일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인사였다.
“과례는 비례라 했습니다. 저는 화산의 객에 불과하니 은인이라는 호칭은 물러주십시오.”
“어허. 화산의 정화를 화산으로 가져왔으니 충분히 은인이라 불려도 되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
모두가 의문을 보이며 호충을 보고 있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제야 모두가 호충의 뜻을 짐작했다.
‘속이 깊은 아이로구나.’
화산에 상승 무공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내뱉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예. 무엇을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무(武)자 배의 원로가 일어나 답했다.
“그대가 내상으로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많은 화산의 원로들이 매화를 그리워하고 있다오. 그대가 그렸던 개화검결의 검식을 보여주시오.”
“!”
백준은 호충의 말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호충은 사람의 속마음까지 짐작하는 수준이었구나.’
청진도 원로들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진 공자를 데리러 간 사이 모두의 뜻이 하나로 모였네. 부디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매화는 화산의 꿈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호충은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백준은 호충의 검을 건네며 작게 말했다.
“무리하지 마.”
“···이럴 때 무리를 하지 않으면 언제 할까.”
백준은 자신의 사문도 아닌 화산에서 끝도 없는 호의를 보이는 호충이 답답했다.
“멍청이.”
“큭. 그럼 멍청이의 검을 잘 봐라.”
스르릉.
호충의 검이 검갑을 빠져나왔고, 호충은 거대한 내실의 중앙으로 가서 섰다.
‘관객이 많구나.’
아까는 산 중턱에서 검식을 펼쳤기에 제대로 된 개화검결을 보일 수 없었다.
‘이번엔 제대로 보여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