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
***
호충은 하산하며 경공을 전개할 수 없었다. 내상은 거짓이니 내공 때문이 아니었다.
‘에효. 오늘은 천하없어도 느긋하게 하산해야겠군.’
호충의 기감에 걸려든 한 인물 때문이다.
‘왜 따라오시냐고요.’
호충과 떨어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따르는 인물은 바로 집법당의 현진이었다.
현진은 호충을 안쓰러이 바라보며 호충을 따라 하산하고 있었다. 현인은 직접 만났기에 돌려보낼 수 있었지만, 아예 작정하고 따라붙는 현진까지 말릴 방법은 없었다.
‘···하여간 순박한 사람들.’
호충은 그간 화산에서 자신을 어찌 대했는지 기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었다.
자꾸만 미안한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나만 더러운 놈이지 뭐.’
현진은 호충이 화산 초입에 다다를 때까지 따라왔고, 호충이 가옥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몸을 돌려 다시 위로 향했다. 호충은 그런 현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기감으로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호충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사서 고생이셔.”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자면 얼마나 힘들까 싶었던 것이다.
호충이 들어오는 소리에 송 영감이 얼른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어서 들어가자.”
호충은 송 영감과 얼른 들어가 문을 닫고 물었다.
“왕호는.”
“어제 이후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싶어 왕호에게 각별하게 당부했었다. 비급을 거래하고 절대로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는 당부였다.
“어디 있는 거야?”
“혹시 누가 올지도 모른다며 지붕 밑에 숨어 있습니다.”
호충은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의제! 내려와라. 아무도 없어.”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이오?”
“그럼 네 대형이 둘이나 되느냐?”
“히히히. 물론 하나뿐이지요.”
탁.
호충은 왕호가 바닥에 내려서자 손바닥을 들어 내밀었다.
왕호는 픽 웃으며 같이 손을 들어 마주쳤다.
짝.
“잘했다. 의제. 훌륭했어!”
“푸히히. 다 대형의 계획이 훌륭했기 때문이오.”
“네가 열심히 경공을 익혔기 때문에 일찍 시도할 수 있었다. 네 공이 크다.”
“그럼 둘 다 잘 했다고 칩시다.”
“하하하.”
“대형. 그럼 화산에서 뽑아내는 것은 확정이지요?”
뭘 뽑아내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호충은 당연히 알아들었다.
“그래. 조만간 회수하러 다시 입산할 것이다.”
“큭큭.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대형.”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 기대가 크지 않았다. 어차피 화산의 재정이 어렵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없는 놈을 털어먹는다고 작정한 것이다.
‘화산 원로의 말대로 조금 깎아줘야 하려나?’
호충은 화산이 십만 냥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
호충은 화산에 오르지 않는 동안 자신의 무공을 숙달하는데 더욱 힘을 썼고, 왕호는 그런 호충의 수련을 보며 크게 깨달았다.
‘···저렇게 강한 대형도 열심인데, 내가 놀면 어쩌자는 거냐.’
그간 호충에게 무공을 배우고 고수가 되었다며 자만했는데, 무공을 가르친 호충에겐 자만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낮에도 밤과 다르지 않은 수련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몸을 단련했고, 검을 휘둘렀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무공에 쏟아 붓고 있었다.
‘초심! 대형은 언제나 초심을 유지하고 있어.’
사실 호충이 수련에 힘을 쏟는 것은 초심이 아니라 잡념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화산···.’
화산의 순박한 도인들을 떠올리면 비급을 팔아먹기 위해 계획한 자신의 일이 떠올랐다.
‘잊자. 잊어. 십만 냥만 받아서 떠나면 될 일이야. 이후에 화산을 볼일은 없다.’
“대형.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을 수련시켜 주십시오.”
“···그래. 좋다. 오늘은 조금 더 수준을 올릴 것이다.”
호충은 깊은 밤 왕호와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 마련된 공터는 둘의 전용 수련장이었다.
탁. 탁.
경공으로 공터에 도착한 둘은 거리를 벌리고 섰다.
“···왕호.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의 나는 생사대적이다. 죽여야 할 원수다!”
“잊지 않았습니다.”
왕호는 호충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련은 연습이 아니다. 실전이다. 수련을 실전으로 여기고 임하려면 마음부터 고쳐먹어야 할 것이다.]
호충은 자신을 원수로 여기고 공격하라 했었다. 처음은 힘들었지만, 지금은 자유자재로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대형은 강하니까.’
아무리 자신이 살수를 날려도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래서 스승이 필요했다. 자신의 한계를 내보여도 받아줄 수 있는 스승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 그 차이는 실로 컸다.
“하압!”
왕호의 살기 넘치는 눈은 호충을 향해 있었고, 바짝 힘을 주고 구부린 손가락은 마치 용의 발톱처럼 날아들었다.
부웅.
호충이 선 자리에 왕호의 손이 지나쳐갔다.
픽.
호충의 잔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왕호의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퍼억.
“끄윽.”
왕호는 후다닥 멀어져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호충이 먼저였다.
“적이 네게 정비할 시간을 주겠느냐!”
따악. 따악. 따닥.
팔과 팔이 마주치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호충은 쉴 틈 없이 왕호를 몰아붙였고, 왕호는 방어에 급급했다.
“아래가 비었다!”
퍼억.
“웁.”
호충의 발차기를 회전하며 흘려보냈지만, 충격을 모조리 흡수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접근한 호충의 어깨가 왕호의 몸통을 후려쳤다.
퍽.
“꺼흑.”
대월천룡권은 손발이 주 무기였지만, 고(柧)를 활용하는 수법이 많았다.
온 몸에 존재하는 모난 부분 전부가 대월천룡권의 무기였다.
“네 온 몸을 무기로 활용하라! 손과 발에만 집중하면 대월천룡권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다.”
쉬익.
왕호는 팔꿈치를 날카롭게 위로 쳐올렸다.
틱.
호충의 턱이 그 끝에 걸렸지만, 얕았다. 얼른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좋다. 쉼 없이 움직이고 공격해!”
둘의 신형이 다시 얽혀들었다.
호충이 왕호와 이렇게 대련하며 수련을 돕는 것은 대월천룡권을 익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공은 결국 누군가와 대결하기 위함이다. 상대가 있어야 제대로 익힐 수 있었고, 맞고 때리며 익혀야 빠른 수련이 가능했다.
호충은 여전히 고(柧)를 활용하는데 미숙한 왕호를 위해 대월천룡권의 초식 하나를 사용했다.
“천룡출두(天龍出頭)”
호충의 몸이 회전하며 왕호를 밀어붙였다.
두두두두.
“커거걱.”
호충의 몸은 회전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등과 어깨, 팔꿈치에서 고(柧)가 연속적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손등과 손가락까지 구부려 고를 만들어 사용하고 바로 이어진 엉덩이와 무릎, 발꿈치의 고(柧)가 계속해서 회전하며 왕호를 두들기고 있었다. 대월천룡권의 괴이한 고(柧)의 활용이었다.
왕호의 수난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천룡출두(天龍出頭)의 마지막 고(柧)는 초식의 이름에서 나온 것과 같았다.
뻐억.
“!”
호충의 머리(頭)가 왕호의 몸통을 받아버렸다.
“커걱.”
“왕호! 제대로 못 피하냐!”
“끄윽. 괜찮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그럼 생사대적이 네 사정을 봐줄 거라 생각했어? 또 간다!”
왕호는 그날 수준을 올린다는 호충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호충의 공격은 약해지지 않았고, 왕호는 그 공격을 받아내며 반격까지 시도해야 했다.
“허억. 허억.”
진이 빠진 왕호는 팔을 들어 올리지 못했고, 보법도 더 이상 밟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호충은 봐주는 것이 없었다.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
무공의 이름과 같은 마지막 초식이 호충의 손에서 떠나갔다.
왕호는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쏘아져 나오는 용을 마주할 수 있었다.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용의 모습은 잃어가던 정신을 번뜩 차리게 할 정도로 아찔한 감각을 선사했다.
후앙.
핏.
왕호의 곁을 스쳐지나가던 용의 발톱이 얼굴에 작은 생채기를 내고 하늘로 승천했다.
“······.”
왕호는 하늘로 사라지는 거대한 용의 꼬리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뒤로 넘어갔다.
털썩.
“···네 녀석은 또 나를 고생시키는 구나.”
호충은 기절한 왕호를 등에 업고 영감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
이른 아침 호충은 깨어난 왕호와 영감에게 인사하고 화산에 올랐다.
호충은 아침에 왕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풋. 녀석.”
왕호는 어제 본 대월천룡권에 매료된 상태였다.
“그거 꼭 배우고 갈 겁니다.”
“어느 세월에? 가서 혼자서 익히시라니까?”
화산에 사기 치는 일도 대부분 끝났으니, 왕호는 이제 천수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너무 늦습니다!”
“네가 천수로 가는 건 안 늦고?”
“가긴 가야 하는데···.”
본거지인 천수 흑패로 가야했는데, 마지막 초식인 대월천룡권이 눈에 밟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 이틀 보겠냐? 너 대형을 연례행사로 볼 생각이야?”
“그건 아니지요.”
“네 무공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우리 흑패 연합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가서 애들이 잘 키워. 류창과 나준이 얼마나 널 기다리겠냐.”
“대형. 꼭 와주셔야 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릴 생각인데? 버틸 수 있는 거지? 아차. 너 천룡출두는 제대로 하냐? 엉?”
“조금···. 천천히 오셔도 좋겠습니다.”
“뭐? 하하하.”
.
.
.
호충은 자신이 화산에 오르는 동안 떠나기로 한 왕호와 미리 작별하고 입산한 참이었다.
‘가서 애들이나 잘 키워라. 왕호.’
흐뭇한 얼굴로 화산에 오르던 호충은 곧 시무룩해졌다.
‘화산.’
다시 화산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휴우. 일은 일이다. 나의 대업에 도움이 되는 일을 작은 정으로 그르칠 수는 없어.”
호충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화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
호충은 도착한 화산의 정문에서 접객각의 다른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호충입니다.”
“아.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미 연무각의 현인과 자주 마주한 얼굴이기에 화산의 정문은 무사통과였다.
“재경각으로 가야하는데···.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안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현인이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호충! 왔느냐!”
“···각주님.”
현인의 얼굴을 보자 다시 양심의 털들이 바짝 일어섰다.
‘난 양심이 털 난 놈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까마귀다.’
“오늘 이후로는 쉬이 뵙기 어렵겠습니다.”
“···너만 무사하면 됐다. 몸은 다 나았느냐?”
“몸은 이제 가볍습니다. 화산에서 질 좋은 요상단을 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뭐 별거라고···.”
“저는 재경각으로 가면 되겠지요?”
호충은 돈이 급했다. 이 돈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하지 않았던가.
“현무 각주는 보러갈 필요 없다. 장문인과 대면하면 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각주님.”
흑패나 무림 방파나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일은 우두머리를 만나야 해결할 수 있다.
***
“······.”
호충은 고요히 좌정한 청진 장문인을 두고 언제 입을 열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뭐하는 짓이오.’
하지만 저마다 급이 있는지라 호충은 감히 화산파 장문인의 좌정을 방해할 수 없었다.
‘적당히 하시고 눈 뜨시지?’
청진은 잠시 더 좌정한 다음 안광이 번뜩이는 눈을 열어 호충을 바라봤다.
“왔는가.”
“예. 장문인. 진가장의 호충이옵니다.”
“···어제 대단한 광경을 보고 큰 깨달음이 있었다네.”
‘깨달음?’
호충은 얼른 청진의 내공 수위를 살폈다.
“!”
‘완연한 절정! 화산파 장문인의 교체 시기가 되었구나!’
화산에 마지막 남은 청자 배의 청진이 완연하게 절정에 달한 무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무자 배의 원로가 장문인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터였다.
“소인은 잘 모르오나, 감축 드리옵니다.”
“허허허.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않는가?”
호충은 마치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물음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광경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하옵니다.”
“···어제 밤이었네. 진 공자가 화산에 오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내일을 기약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지.”
마음을 내려놓기 위함이었다. 화산에서 거액의 가용자금을 지출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기재를 얻고 싶은 욕심이 그것이었다.
‘이 나이를 먹도록 속에 욕심만 채웠구나.’
청진이 장문인의 처소에서 나와 화산의 산하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비우고 있을 때였다.
“!!”
저 멀리 하늘에서 은빛용이 승천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역동하는 용의 몸체는 실로 기이한 감정을 선사했다.
‘진정한 용이다!’
멍하니 용의 승천을 바라보던 청진은 곧 흙바닥에 좌정하고 명상에 빠졌다. 그렇게 깨달음이 찾아왔고, 지금까지 수십 년간 넘을 수 없었던 커다란 벽을 넘어섰다.
“···그리하여 높은 깨달음이 찾아왔다네.”
“······아.”
‘썩을···. 왕호에게 보여주려고 왕창 힘을 주었더니···.’
엉뚱한 사람이 본 것도 문제였는데, 깨달음까지 얻었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