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232)

의뢰

***

‘오냐. 어차피 마음에 걸리던 차였는데 잘 됐다. 장문인에게 깨달음까지 선사했으니 난 좀 챙겨도 돼!’

호충은 깊이 포권하며 인사를 전했다.

“화산은 실로 영산(靈山)이옵니다. 용이 승천하는 산이라니요. 또한 장문인께 천기가 닿았음이옵니다. 아니라면 어찌 용의 승천을 목격하시고 깨달음까지 얻으셨겠습니까. 감축 드리옵니다.”

“허허허. 천기가 닿기는 했으나, 내가 아니라 화산에 닿았을 것이다. 그대가 화산의 정기를 찾아와 이리 상서로운 일이 생긴 것이야.”

청진은 용의 승천을 목격하며 모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걸 받게. 화산의 정화를 돌려준 그대의 공로에 화산이 보이는 성의라네.”

하얀 봉투엔 십만 냥의 전표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이제야 끝이로군.’

호충은 봉투를 받아 확인도 않고 품에 넣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확인하지 않는가?”

“이미 화산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나이다.”

“허허허. 그래. 그랬지.”

청진은 웃으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럼 이것도 그냥 받아주시게.”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화산의 은인에게 줄 수 있는 표식이네.”

딸깍.

청진이 작은 상자를 열어 보여줬다.

화산보은(華山報恩)이라 새겨진 옥패(玉佩)였다.

“이건!”

“오직 장문인만이 내줄 수 있는 것이지. 화산파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화산의 제자에게 이 옥패를 보여주게. 화산에 해를 끼치는 부탁이 아니라면 뭐든 들어줄 것이야.”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쓸모가 많은 패로다.’

앞으로 흑패 연합을 통해 문파를 창설하자면 타 문파의 동조가 필수였다. 화산파를 그 첫 단추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헤어짐은 짧을수록 좋다더군.”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나, 진 공자를 마음에 둔 이가 많으니, 인사는 꼭 전하고 가시게.”

“그리하지요. 장문인. 강녕하십시오. 멀리서 화산의 발전을 고대하며 지켜보겠습니다.”

“허허허. 나야 곧 태상원로원으로 가야할 터. 화산의 미래는 무자 배에게 맡기는 수밖에···.”

“······.”

완연한 절정에 돌입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충은 길게 읍하며 포권하고 장문인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호충은 연무장에서 삼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현인을 보기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품 안의 봉투를 툭툭 두들겼다.

‘얼마나 넣었을까. 궁금해 미치겠네.’

하지만 아직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디 구석에라도 가서 봐야 하는데···.’

호충은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운 덕분에 구석진 곳을 찾으려는 마음을 접었다.

‘···현진 도장.’

일전에 하산할 때에 따라 붙었던 현진이 멀리 전각 뒤에서 자신이 가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나오면 되지 기다리긴 왜 기다려?’

“헛흠.”

호충은 헛기침을 하며 연무장으로 더 가까이 갔다.

저벅.

그제야 현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충이 아니냐. 언제 입산한 것이냐.”

“아. 당주님. 다시 뵈니 정말 반갑습니다.”

“···몸은 괜찮고?”

“화산의 영약은 정말로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다행이로구나.”

“······.”

현진은 정말로 안심한 얼굴이었다.

‘자꾸 이러지 말지? 그래봤자 돌려줄 일은 없다고!’

이미 받은 돈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겨우 십만 냥이잖아! 이 정도는 화산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호충은 자신의 품에 있는 전표가 십만 냥일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 하산을 위해 현인 각주님과 현자 배 도장들께 인사를 드리려던 참입니다.”

“···하산. 그래. 하산 해야지.”

이후 울컥 눈물을 머금은 현인을 포함해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 다니던 현자 배의 도장들과 인사를 나눴다.

“영영 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 뵈올 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큽.”

“저는 언제나 화산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도 기억해주십시오.”

“끄윽.”

“내일 다시 볼 것처럼 보내주십시오. 그리 해주시면 저도 마음 편히 화산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이대로 가거라. 가서 얼른 돌아 오거라.”

“언제나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겠습니다.”

호충의 깊이 숙인 허리와 앞으로 내밀어 겹친 손이 조금 떨리는 듯 했다.

그리고 휙 돌아서서 화산을 나서기 시작했다.

‘에이. 에이···. 왜 또 울고 그래···.’

킁. 훌쩍.

호충은 코를 훌쩍이며 화산의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

.

.

하지만 이리 쉽게 떠나기엔 뭔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화산의 정문을 나서고 얼마나 됐다고 호충이 다시 달려 들어왔다.

“재경각! 어디야!”

“저, 저쪽에.”

호충은 정문을 지키는 제자에게 물어 재경각으로 향했다.

‘미친놈들아! 화산 말아먹을 일 있어?!’

밖으로 나가서야 자신이 받은 전표의 금액을 확인한 것이다.

‘오만 냥짜리 전표가 여섯 장이라니!’

무려 삼십만 냥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화산이 살아남아야 뭐라도 얻어먹지!’

호충은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억지로 찾아내며 재경각으로 들어갔다.

현무는 씩씩 거리며 들어오는 호충을 보고 의아한 얼굴이었다. 방금 전에 눈물을 보이며 떠나지 않았던가.

“어? ···뭘 두고 갔느냐?”

두고 간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들고 갔다.

“각주님!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어, 엉? 지금 무슨 소리를···.”

쾅!

호충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물었다.

“대체 전장에서 얼마나 빌리셨소!”

“···아.”

현무는 호충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었다.

“말씀을 하시란 말입니다!”

“그게 말이다···.”

“빌린 것뿐이 아닐 테지요! 화산에서 필요한 자금까지 모조리 쓸어 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시일을 달라 하신 거지요?”

“······.”

호충은 품에 있던 봉투에서 오만 냥짜리 전표 네 장을 꺼냈다.

‘원래 십만 냥은 받아도 됐어. 그러나 나머지는 절대로 아니다.’

이십만 냥을 돌려주려는 것이다.

“이건 도로 받으십시오. 이러다 화산 망합니다!”

“···호충아. 이 일은 이미 장문인과 원로원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무를 수 없어.”

마음은 고맙지만, 문파의 결정을 쉽게 뒤집을 수는 없었다.

“네 마음만 받으마.”

“후우. 제가 이대로 절벽에서 몸을 던질까요? 그러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에효. 차라리 장문인께 가거라.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그러지요. 다시 장문인을 뵙겠습니다!”

.

.

.

호충은 금방 청진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현무가 호충을 장문인의 처소로 안내한 것이다.

“···재경 각주에게 네가 왜 돌아왔는지 들었다.”

“이건 아닙니다. 무림 방파가 움직이려면 자금은 필수적입니다. 자금이 마르면 제아무리 높은 무공을 갖춰도 굶어죽습니다.”

“나는 화산 대회합에서 결정된 일을 무르지 않을 것이다.”

“장문인!”

호충이 크게 소리쳤지만, 청진은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

“허허허. 네 녀석이 화를 낼 때도 있구나. 허나 참 신기한 노릇이다. 화를 내도 밉지가 않아. 현자 배의 각주와 당주들이 너를 왜 예뻐하는 줄을 알겠다.”

“···이건 아닙니다. 장문인.”

호충은 진양의까지 동원하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화산의 어린 제자들은 무슨 잘못이 있사옵니까. 그 아이들이 성장하자면 필수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 더욱 단단하게 성장하는 것이 무인이다.”

“외부에서 화산의 성세를 얕잡아 볼 수도···.”

“오히려 잘 된 일이지. 우리는 숨겨야 할 것이 생기지 않았느냐.”

“세작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면···.”

“화산은 숨겨진 장소가 많지. 따로 자금을 들이지 않아도 충분하네.”

“······.”

호충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청진을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방법이 있었다.

탁.

화산보은(華山報恩)이라 새겨진 옥패(玉佩)가 다시 등장했다.

“옥패를 사용하겠습니다. 금 이십만 냥은 향화객의 시주로 받아주십시오.”

“······.”

청진은 입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이만 가겠습니다.”

청진은 탁자에 올라온 이십만 냥의 전표와 옥패에 가슴이 뭉클해짐을 알았다.

“돌아와 앉아라.”

“······.”

우뚝 선 호충의 등은 굳은 고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앉아!”

“후우.”

호충은 뒤돌아서서 크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화를 풀고 마음을 차분히 해라. 나이도 어린 녀석이 어찌 그리 화가 많으냐.”

“···사문의 존장에게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

청진은 다시 눈을 감고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호충은 그에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화산의 마음은 알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가져야할 몫이면 됩니다.”

그조차 사기에 불과했지만, 십만 냥까지는 받을 마음이었다.

화산의 정화인 비급을 돌려주고 청진 장문인에게 깨달음까지 선사하지 않았는가.

“제가 치른 값은 십만 냥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아닙니다. 저는 그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청진이 눈을 뜨며 말했다.

“···했다.”

“안 했습니다!”

“그럼 앞으로 하면 되겠군.”

“네?”

청진은 호충이 놓아둔 이십만 냥에서 십만 냥을 꺼내 밀어냈고, 옥패를 들어 그 위에 올렸다.

“화산의 장문인 청진이 진호충에게 의뢰를 맡기는 바이네. 의뢰금은 금 십만 냥과 화산의 은인을 증명하는 옥패일세. 의뢰에 실패해도 의뢰금은 돌려줄 필요 없네.”

“···장문인.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진 공자가 내게 돌려준 것을 내 마음대로 쓰고 있네.”

“······.”

“내가 바로 화산의 장문인일세.”

맞는 말이긴 했다. 화산의 장문인에게 이정도 권한이 없겠는가.

“은인의 옥패 사용을 말장난으로 되돌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장난이 아니야.”

“그럼 제게 맡긴다는 의뢰는 무엇입니까. 십만 냥의 가치가 있는 의뢰가 대체 무엇입니까.”

“꼬리를 드러낸 마교의 종자를 찾아라.”

“!!!”

“지난 날 화산은 하남에서 마인(魔人)이 마공(魔功)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하고 정무맹과 협의맹의 회합에서 이 주제로 회의하였네. 지금 정무맹은 마교의 종자들을 찾느라 분주하지만, 협의맹은 이를 빌미로 저들의 세를 늘리고 있지. 진 공자는 엄밀히 따져 협의맹 소속일 것이나, 이미 화산과 연을 맺었다. 하여 나는 진호충 개인에게 마교의 종자를 찾을 것을 의뢰하노라. 어떤가? 능이 십만 냥짜리 의뢰가 아닌가.”

“하···. 마교라니···.”

호충의 머리는 지난 정무맹과 협의맹의 회합이후 벌어진 진가장의 확장이 무엇에서 연유하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마교의 꼬리가 드러났고, 정무맹과 협의맹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협의맹은 이번 일을 세를 늘리는 기회로 여겼음이다.’

청진은 입을 벌리고 있는 호충에게 이어서 말했다.

“다만 화산의 무자 배 원로들도 처음 마공의 흔적이 드러난 지역에서 마교의 꼬리를 잡는 일에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으니, 진 공자가 실패하여도 선금을 되돌려 줄 필요는 없다네. 그럼 화산은 십만 냥을 그냥 얻었군. 향화객의 시주는 감사히 받겠네. 진 공자가 깨달음을 얻어 무릉도원에 가길 기원하겠네.”

“······.”

청진은 호충이 마교의 종자를 찾으리라 여기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거창한 의뢰를 빌미로 돈을 돌려주려 함이었다.

“마침 전장에 갚을 돈을 갚고 필요한 곳에 자금을 수혈할 수 있겠어.”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남은 십만 냥으로 가능하겠냐는 물음이었다.

“솔직히 삼십은 조금 무리였네. 이십이면 적당했지.”

“휴우. 장문인···.”

“더는 협의가 없을 것이니 강요하지 말게. 여기까지 하세.”

“······.”

“어차피 진 공자에게 일을 맡겼다는 핑계도 필요하지 않았는가. 진 공자는 마교의 종자를 찾다가 화산의 원로를 만나거든 어서 화산으로 복귀하라 말해주게. 하남 북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야. 또한 복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화산에 매화검법이 돌아왔으니 당연히 원로들이 돌아와야 할 터였다. 다른 이에게 알려줄 수 없는 일이니 이것도 호충이 맡기에 적당한 의뢰였다.

“의뢰가 둘입니다?”

“허허허. 둘 중에 하나만 성공해도 의뢰는 성공으로 치겠네.”

호충은 더 강요할 수 없었다.

“진씨 세가의 막내아들이 아니라 진호충 개인으로 의뢰를 받겠습니다. 장문인. 꼭 의뢰를 성공하겠습니다.”

마교라면 언젠가 마주할지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시기가 조금 이르게 다가왔을 뿐이다.

‘흑패 연합이 자리를 잡기 전에 마교를 파악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마교의 간자가 흑패 연합에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화산의 은인이 의뢰를 받아주었으니 기대하고 있겠네.”

호충은 두 번째로 청진에게 작별을 고하고 장문인의 처소에서 물러섰다.

‘사문의 존장을 상대하는 것이 이리 어렵구나.’

오늘 일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어디서 이런 일을 겪어 보겠는가.

‘···앞으로 다른 문파에서 돈을 뜯어내는 데 도움이 되겠지.’

호충이 가진 비급은 한둘이 아니다. 다른 무림 방파의 진산절기가 호충의 머리에 가득했다. 애초에 호충은 중원 흑패를 규합하며 무림 방파의 돈을 뜯어낼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화산은 그 첫 번째 목표였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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