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32)

하산

***

다시 화산의 정문을 넘어 밖으로 나간 호충은 오매불망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백준.”

삼대 제자들의 대사형인 백준이었다.

“야! 간다면 간다고 인사는 해야지. 하마터면 얼굴도 못 볼 뻔했잖아!”

호충은 잊어버리고 당당했다.

“깜빡했다.”

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백준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산파 놈들은 왜 이렇게 질척 거리냐.’

안 그래도 자신을 좋게 봐주는 현 자 배의 도장들이 마음에 걸렸는데, 백준까지 더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뭐! 날 잊었다고!?”

“큭큭. 이리 만났으니 됐잖아.”

하지만 백준이 이렇게 나와 있으니 인사는 해야 할 것이다.

“언제 돌아와?”

“돌아오긴 뭘 돌아와? 이대로 가면 끝이지.”

다시 화산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돌아오고 싶지 않아.’

돌아올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을 지낸 것도 아니고 고작 몇 개월 봤는데······, 정이 드냐.’

매일 화산파 정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현 자 배의 각주와 당주들이다. 어찌 정이 쌓이지 않겠는가.

“···인정머리 없기는.”

“무림에서나 만나자. 백준.”

백준이 무림에 출도하지 않는 이상 다시 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너는 잔뜩 일만 만들어 놓고 가는 구나.”

“이제야 실감났어?”

호충이 떠나자마자 연무각의 현인은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덕분에 삼대 제자들은 물론이고 이대 제자들까지 잔뜩 움츠리고 수련에 임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너 보러 간다니까 보내주시더라.”

“······.”

“네가 다시 돌아왔다는 얘길 듣고 기다리고 있었어.”

“···잠깐 이리로 와봐라.”

호충은 화산의 정문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데려와서 주머니 하나를 백준의 품에 쑤셔 넣었다.

“야, 야! 이건 뭐야?”

“삼대 제자들 좀 챙겨줘. 내가 언제 요리라도 대접하려고 했는데, 도통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뭐?”

“넌 대사형이잖아. 가끔 화음으로 내려가서 사제들 몸보신 좀 시켜줘.”

오늘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던가. 십만 냥을 노렸는데, 무려 이십만 냥을 얻지 않았던가. 광에서 인심 나는 법이다.

“얼마 안 된다. 그리고 이번 일에 네 공로도 컸어.”

백준이 중간에서 역할을 했기에 일이 부드럽게 흘러갈 수 있었다.

“그건 이미 장문인께 다 치하를 받았어. 도로 가져가!”

“난 인사를 못했어. 그러니 그냥 넣어둬. 그리고 너 주는 거 아니라 삼대 제자들 주는 거다. 알았지?”

“···하. 이 녀석이 인사하러 나온 사람한테.”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었다.”

“인사도 깜빡했다는 놈이?”

“큭. 정말 깜빡했다는 뜻이기도 하잖냐.”

“···말해봐.”

호충은 백준의 귀를 잡아 당겨 가까이 대고 말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

“배우다 막히면 나한테 오시던가. 내가 열심히 가르쳐줄 터이니.”

“너 설마! 벌써?”

호충이 누군가를 가르쳐줄 수 있을 만큼 익혔다는 뜻과 같았다.

“큭큭큭. 상당히 난해한 검법이었으나, 이 몸에게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루 만에 익히는 검법이 부지기수일세. 헌데 며칠이나 지났으니···.”

“야! 너, 너 입 조심해.”

“우리는 공범일세. 친우여.”

“제기랄. 그냥 다 말해버릴 걸.”

“어허. 도사의 입이 거칠구려.”

“···썩을 놈.”

“내 친우가 무림에 출도 하는 날을 기다리지.”

“······그냥 향화라도 하러 와라. 너 기다리다가 늙어죽는다.”

“큭큭. 또 보자. 백준.”

“내가 고수가 되서 무림으로 나갈 테니 두고 봐.”

“그럼 화산의 매화검수를 만날 수 있겠군.”

“!”

매화검수라는 단어가 화산에서 사라진지 언제던가.

“···매화검수.”

화산이 꿈에 그리던 검의 고수를 이르는 칭호였다.

“인사는 충분해. 어서 들어가서 개화검법이나 열심히 연마해라.”

“개화검법 다음이 설화검법 여기에 개화검결 그리고 이십사수매화검법. 까마득하네.”

“그리고 하나 더 있잖아. 자하신공(紫霞神功)”

“!!”

화산이 잃은 무공이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만은 아니었다. 화산에서 장문인으로 올라설 다음 대 제자에게 전해지는 자하신공도 실전한 상태였다. 그 외에도 중요한 무공들이 있었지만, 자하신공에 비할 무공은 없었다.

“이것도 찾으면 사오지. 잘하면 네가 익힐 수도 있잖아.”

“···미친. 그걸 어떻게 찾고 어떻게 사?”

“그럼 우리가 이십사수매화검법과 개화검결은 살 줄 알았냐?”

“···몰랐지.”

‘화산은 돈이나 열심히 벌어두쇼. 이번에 비싸게 받았으니 그때는 싸게 드리리다.’

화산이 망하지 않아야 다시 비급을 팔아먹을 수 있을 터였다.

“간다. 너는 가서 애들한테 대신 인사나 전해.”

“······가라. 무운을 비마.”

짧은 인사를 끝으로 호충은 몸을 돌렸다. 뒤에 백준이 보고 있을 테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

스르릉.

대신 품에서 회칼을 뽑았다. 그리고 빠르게 휘둘렀다.

휘리릭. 샤악.

검 끝에서 붉은 매화가 잠시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며칠 전에 개화검결을 펼치며 보였던 꽃봉오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완벽하고 화려한 매화였다.

“!”

‘앞으론 네가 피워내야 할 매화다. 백준.’

“······.”

호충이 사라지고도 백준은 멍하니 그 자리에서 자신이 본 매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저 녀석이 그사이에···.’

개화검결에 이어 이십사수매화검법까지 익혀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백준이다.

“천년기재···. 저런 놈이 실제로 있긴 했구나···.”

하지만 녀석이 뽑았던 칼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칼로 매화를 그린 거야? 그건 화산에 대한 모독이라고!”

***

호충이 떠난 화산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선 재경각의 현무는 만세를 불렀다. 돌아온 십만 냥 덕분이다. 전장에 융통했던 자금을 바로 갚고 화산에 필요한 자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급한 불을 끄는 용도로 사용되고도 조금 남았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지출이 부담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빚에 치어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화산의 현자 배 도인들이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마인을 찾으려 외부로 나가 있는 무자 배 원로들을 불러들이기 위함이었다. 호충에게 의뢰하긴 하였으나, 애초부터 의뢰는 명목상 넘긴 것이기 때문이다.

화산의 무자 배 원로들은 더욱 바빴다.

본래 원로라고 하면 장문인과 같은 배분을 가진 화산의 도인들이 갖는 호칭이다. 허나 청진이 남아 장문인을 맡으며 무자 배는 장문인 보다 낮은 배분의 원로가 되는 기이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청진이 장문인 자리를 무자 배의 대사형에게 물려주고 태상원로원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화산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청진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허허허. 이제야 사형들을 뵙겠구나.”

청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참이나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사형들을 오늘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태상원로원의 전각은 깊은 심지에 마련되어 있었다. 화산파의 전각이 지어진 연화봉에서 벗어나 한참이나 계곡을 따라 내려가야 했다. 그래도 화산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이리 가까운 곳에 있었건만 어찌 이리 오래 걸렸는가. 이 몸이 죄인이로다.’

다른 청자 배와 달리 막내인 자신의 무공 성취가 너무 더뎠기 때문이었다. 청자 배의 동기들이 모두 태상원로원에 들어갔음에도 자신은 이제야 사형들을 만나러 왔음이 어찌나 민망한지 모른다.

끼이익.

가볍지만 또한 무거운 마음으로 태상원로원의 정문을 밀고 들어갔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나가지는 못하는 문이었다.

“!”

“이제야 왔는가. 청진 사제.”

“청원 대사형!”

전대 장문인인 청원이었다.

“허허허. 청수가 좋아하겠어.”

청수는 청진의 바로 위 사형이었다.

“청수 사형은 저를 정말 예뻐하셨지요.”

“···그게 아니라 식사 당번이 하나 늘었으니 하는 말이야.”

“······.”

청자 배는 태상원로원에서 막내였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니 식재료만 담을 넘어 받고 있었기에 먹고 살기위한 모든 일을 막내 배분인 청자 배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사조님들을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또한 태상원로원의 모두가 모여야 할 것이옵니다.”

청자 배의 윗 배분인 현(玄), 화(花), 백(白)의 사부와 사조들이 즐비한 곳이다.

“청진이 왔으니 응당 그래야지.”

“······.”

청진은 며칠 전 화산 대회합을 떠올렸다. 당시엔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화산의 제자들을 굽어보고 있었지만, 오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보고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화산의 청진. 오늘 태상원로원에 입관하였습니다. 현검(玄劍) 태사조께서 이리 강건하신 모습을 뵈오니 실로 감격이옵니다.”

현검은 청진의 윗 윗 윗 배분이라 까마득히 높은 배분이라 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잘 왔다.”

“······.”

‘현검 태조사께서 화경에 이르셨구나!’

현검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기운에 청진은 온몸이 굳어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어야 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호오. 청진의 무위가 범상치 않구나. 대기만성이었더냐.”

“최근 기이한 일을 겪어 소성을 이뤘나이다.”

“기이한 일? 무엇이냐.”

“···화산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나이다. 용의 승천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현검은 청진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며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내가 봤다니까!!”

“?”

청진은 갑자기 변화한 현검의 말투에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서 현검의 말에 답하고 있었다.

“거참. 진짜 용이 승천했다고요?”

“헛것을 보셨나 했더니···.”

“노망 안 났으면 다행이긴 하네요.”

“뭐? 노망? 이것들이 날 노망났다고 여긴 게냐?”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요. 잊어버리십시오.”

“이것들이 이제 맞먹어? 엉?”

“맞먹기는 언제 맞먹었다고 그러십니까.”

“에이. 잊으시라니까요.”

현검과 그 이하 배분의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청진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게 대체···.’

같은 공간에서 항상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배분보다 친분이 우선시되고, 이후 서로 격 없이 지내다보니 이리 되었다.

소란 속에 청진이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또한 화산에 큰 복이 있었습니다.”

“복?”

청진은 품에서 두 권의 비급을 꺼냈다. 화산에 원본을 남겨두고 필사한 비급이었다.

“개화검결(開花劍結)과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화산에 돌아왔나이다.”

“!!”

“!!”

“!!”

“!!”

“!!”

“!!”

“!!”

모두가 경악한 모습에 청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화산에 복이 왔음에 용이 승천하며 기뻐한 모양입니다.”

“허허허허허. 화산의 정화가 돌아왔구나!”

현검의 웅혼한 기운이 웃음과 함께 퍼져나갔다.

“청진이 큰일을 해냈습니다!”

“매화검법이라니! 개화검결이라니!”

“근처에서 발견했더냐? 아니면 외부에서 발견 했더냐?”

현검의 물음에 청진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화산에 기인이 방문하였습니다. 이후······.”

꼽추 기인이 화산을 방문한 일부터 호충이 이를 화산에 넘긴 그간의 일들이었다.

“···허허. 협의맹의 자손이 화산을 그리 여기다니···. 실로 천운이 닿았음이로다.”

“하여 진가장의 호충에게 화산의 보은 패를 주고 이십만 냥의 값을 치렀나이다.”

“겨우 이십만 냥으로 화산의 정화를 사오다니! 허허허.”

“화산은 화산의 매화를 되찾았습니다.”

“매화! 매화!”

이들도 매화에 미쳐있던 화산의 제자들이다. 이십만 냥의 거액이나 보은 패보다 비급이 더 중요했다.

“앞으로 이 비급을 연구하고 주해를 달아 외부로 내보내야 합니다.”

청진이 태상원로원에 들기 전에 밖에서 논의된 내용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처에서 매화검법을 익혀나갈 것이옵니다. 그러자면 고수들의 가르침이 필수일 터. 이 일은 저희가 맡아야겠지요.”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청진은 다른 일에 손을 대지 말고 오직 비급에만 전념하여라.”

현검의 말에 청수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 그럼 식사 당번은···.”

“그럼 이런 거창한 일을 해결하고 온 놈한테 겨우 식사 당번을 맡길 참이냐! 너는 밥이나 태워먹지 마.”

“···에효.”

당번 하나가 늘어 편해질 줄 알았더니, 도로 아미타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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