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휘평
***
호충은 화산의 가옥을 처분하고 송 영감과 다시 길을 나섰다.
“단출하니 좋습니다.”
“나도 거추장스러운 녀석들이 없으니 편해.”
나귀가 끄는 수레는 여전했지만, 날이 풀려 둘은 천천히 함께 걷고 있었다. 송 영감은 출발 전에 들었던 목적지를 다시 입에 올렸다.
“자장으로 가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고 진가장에 간다는 건 아니고···.”
호충이 잡은 방향은 다시 진가장이 있는 자장이었지만, 진가장으로 간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중환과 옥비연이 흑패주와 중요 인물들을 교육하고 있었기에 그리로 가는 것이다.
“어차피 한번 모아서 얼굴을 봐야지 싶었거든.”
이들이 모여 있으니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진정한 흑패 연합을 발족할 생각이었다.
“엉뚱한 얼굴을 보이셔야 하는 것이 마음이 걸립니다.”
연안까지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지만, 이후로는 네 스승 중 하나인 송재호의 이름을 사용했고 축골과 역용을 사용해 모습까지 바꾸었기 때문이다.
“흑패 연합의 수장은 외부에 드러낼 수 없어. 앞으로 연합의 성세가 커지면 커질수록 위험이 커질 테니까.”
당장이 아닌 먼 훗날을 내다본 결정이었다. 무림의 방파와 세가에서 흑패 연합을 가벼이 여길 것이기에 얼마든지 위협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물론 고수인 호충이 위협이 되진 않겠으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달랐다.
“그나저나 우리 화진이는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호충은 흑패에서 기루를 떼어가라고 명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진이 기녀들을 잘 규합하고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허허허. 아가씨의 무위가 범상치 않으니 어렵지 않으셨겠지요.”
“분명 흑패주 새끼들이 대들었을 거야. 내가 그 새끼들 다 찾아내서 혼 구멍을 내줘야지.”
“이왕 맡기셨으니 끝까지 맡기십시오. 아녀자의 일까지 간섭하시면 도련님 체면이 상합니다.”
“······.”
“무리의 수장이 되기로 하셨으니 그만한 무게감을 갖추셔야 합니다. 작은 일은 밑에 맡겨두시고 도련님은 더 큰일을 하십시오.”
“항상 영감한테 배울 게 있다니까.”
“허허. 도련님께선 훌륭한 지도자가 되실 것입니다.”
***
호충이 자장으로 향하는 동안 마교의 핵심 인력이 산서(山西) 홍동(哄洞)의 모처에서 모여 있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장 교사님.”
“인원은 충분하겠지?”
장문소는 산서 곳곳에 확장을 진행 중인 진가장의 일에 훼방을 놓으며 오늘을 기다렸다.
“예. 절정급 마인 다섯에 뒤에서 받쳐줄 일류 마인들이 열이나 됩니다. 진가장의 무사들이 다 빠져나갔으니 이 숫자로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복장은.”
“황궁의 금의위 복장과 관인들의 복장을 숨겨두었습니다.”
마교는 진가장을 습격하며 황궁의 일로 꾸밀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진가장에 셋째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가주를 참하고 셋째를 가주로 세워라.”
“예. 장 교사님.”
진가장의 진원우를 정리하고 자신들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셋째를 가주로 만들 계획이었다. 이후 셋째가 비명횡사하면 진가장의 모든 것이 마교의 수중으로 들어올 터였다.
“첫째와 둘째가 급히 본가로 돌아가려 하겠지만···.”
첫째와 둘째의 일거수일투족은 마교에서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본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면 둘은 곧장 본가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 길목을 마교의 마인들이 지킬 것이라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계가 성공하기만 하면 처리할 생각이었다.
“녀석들은 길바닥에서 명을 달리하겠지.”
“하지만 진가장의 넷째가 화산으로 갔다니 난감하옵니다.”
호충이 화산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녀석은 아무런 힘도 없는 녀석이다. 나중에 진가장으로 돌아왔을 때 정리해도 늦지 않아.”
“예. 그럼 진가장의 셋째를 통해 녀석을 정리하겠습니다.”
“급히 이동하지 말고 외부의 눈길을 피하는 데 중점을 두게. 정파의 조무래기들이 극성일세.”
“···예. 장교사님.”
***
“······.”
중년의 남성은 어두운 실내에서 조용히 좌정하고 있었다. 앉은 자세만으로 기이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흠. 들어가겠소.”
밖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내고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인물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중년인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왕야. 오늘도 이리 입을 다물고 계실 것이오?”
“···너는 말로만 나를 왕야라고 부르는 구나.”
왕야라 함은 황제의 친족을 이르는 말이었고, 그 중에서도 황제의 형제를 뜻했다.
“진 왕야께서 원하시면 저도 예를 따르지요.”
“되었다.”
중년인이 눈을 뜨고 일어섰다.
진 왕야라고 불린 인물은 황제의 동생인 진휘평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마교의 전각에 홀로 있는 것일까.
“왕야께서 원하시면 우리는 언제든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소.”
“···허수아비 황제는 원하지 않는다.”
진휘평을 앞에 두고 말하는 인물은 황위를 대수롭지 않게 거론했다. 매번 같은 대화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허수아비라니요. 왕야께선 진 황실의 진정한 동량이시오. 왕야가 아니면 누가 황제의 위를 차지하겠습니까.”
“···너희 손을 빌어 황제가 되느니 자진하고 말 것이다.”
황제의 자리를 쉬이 입에 올리는 이들은 지금 역모에 관해 대화하고 있음이다.
“허허. 오늘도 여전하시오.”
진휘평은 오래전의 일을 다시 끄집어냈다.
“···나는 너희가 내 부인과 자식을 어찌했는지 잊지 않을 것이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될 터.”
“낳으면?”
“허허. 당연히 우리의 수중에 있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식을 볼모로 잡을 것임을 입에 올리는 인물이다.
“내 아들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황제가 되겠다는 결심만 하시면 알려드릴 것이오.”
그에겐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교에 빼앗겼다.
“됐다질 않는가!”
“소득이 없으니 교주께 또 혼이 나겠군.”
교주.
진휘평과 대화하는 인물이 입에 올린 교주는 마교의 교주를 칭하는 것이었다.
“신교의 세는 점차 과거의 세를 되찾고 있소. 때가되면 왕야께서 마음을 먹지 않아도 대계가 발동할 것이외다.”
“···나는 황제의 위에 오르지 않는다. 형님께서 어련히 잘 하실까.”
“큭큭. 현 황제는 실로 무능하기 그지없소.”
“형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동생을 처리하려다 우리의 손에 빼앗기지 않았겠소.”
“······.”
황제가 동생인 진휘평을 죽이려 했다는 말이었다.
“그대의 회임한 부인 또한 우리의 뜻이 아니질 않소. 우리는 난리 중에 그대만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오. 나머지는 황제의 짓이오. 애초에 우리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소.”
“···분명 너희가 처리하였겠지.”
“아니라고 해도 믿질 않으시니···.”
“그럼 내가 본 아들은 대체 어찌하였느냐고 묻질 않느냐!”
난리 중에 헤어진 부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시 맞은 처와 아들은 분명 이들의 손에 있다.
“같은 답을 드리겠소. 황제가 되겠다고 하시오. 그러면 알려드리리다.”
“······.”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진휘평은 휙 몸을 돌렸다.
“또 오겠소.”
“······.”
진휘평은 고요한 내실에서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초연···.’
호충의 어미인 북궁초연의 이름이었다. 첫째 아내의 회임으로 기뻐하던 진휘평은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함을 알고 도주를 결심하였다. 분명 황제가 자신을 노릴 것이기에 일부러 서로 다른 길로 도주하였다. 뱃속의 아이와 아내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내가 그대의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어.’
또한 이후 다시 연을 맺은 둘째 부인을 떠올렸다.
‘아들아···. 대체 너는 어찌 살고 있느냐.’
둘째 부인은 마교의 손에 붙잡혀 새로이 맞이한 부인이었다. 진휘평은 자신을 구해준 마교의 호의에 의심 없이 아내를 맞이하고 다시 아이를 가졌지만, 마교는 둘째 부인과 태어난 아들마저도 데려가 버렸다. 그 이후 마교를 믿지 못했고, 이렇게 홀로 지내게 된 것이다.
‘부디 저들의 손에 놀아나지 말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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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휘평의 방에서 나온 인물은 다른 전각을 향했다.
높은 전각이 즐비한 곳에서도 가장 깊은 심지로 들어간 인물은 많은 문과 호위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재림천마 만마앙복. 만세. 만세. 만만세. 장로 화평이 교주님을 배알하옵니다.”
교주라 불린 인물이 입을 열었다.
“···마화평 장로. 진휘평은 여전한가.”
“그러하옵니다. 교주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 장로는 그 전까지 진휘평의 마음을 돌려놓아라.”
“아들이 그곳에 살아 있음을 알면 달라지지 않을지···.”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면 오히려 자신의 쓸모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는 나중을 위한 안배이니 쉬에 입에 올리지 말라.”
“······예.”
“지금은 진가장을 도모하는 일에 문제가 없도록 하라.”
“장 교사와 마혈단(魔血團)에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정파의 인사들은 여전한가?”
“예. 여전히 신교의 교인들을 찾는데 혈안입니다.”
“마공을 사용했으면 뒤처리를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정파에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
과거 마공을 사용하고 시체를 불태우지 않아 마공이 드러났음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앞으로는 그와 같은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당시 뒤처리가 미숙했던 놈들은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이미 정파무림에 교의 흔적을 드러낸 마교도를 흔적도 없이 처리한 다음이었다.
“십 년. 그 안에 결판을 낼 것이다. 신교는 다시 거대한 날개를 펼칠 것이다.”
후웅.
교주의 몸에서 시작한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교주의 독문무공인 천마신공의 운용이었다.
“교주님이 신위가 하늘에 이르렀으니 누가 감히 신교의 위세에 도전하겠나이까. 만마가 교주님의 신위에 굴복하여 절을 올리나이다.”
“마 장로는 황실을 주시하고 때를 살펴라.”
“예! 교주님!”
마교는 수면아래 모습을 감추고 발톱을 세운 상태였다. 언제든 물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끝낸 흑룡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
호충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일 수련을 반복하며 자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밤 숲에서 스승과 심상 수련을 마치고 지금까지 익힌 무공을 가다듬었고, 마지막으로 좌정하여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잔털들이 곤두섰다.
“!”
눈을 번쩍 뜬 호충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기이한 불안감이 엄습한 까닭이다.
‘그것 참 기이하구나.’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진양의가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려 했음인데······.’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은 육감의 영역에서 시작한 불안감이었다.
“···자장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야겠어.”
지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영감을 제외하고 모두 자장에 있었다.
***
두두두두. 두두두두.
“이랴!” “이랴!”
일단의 무리들이 자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마교(魔教)의 마혈단(魔血團)이 자장에 도착한 것이다.
“모두 환복하고 진가장 앞으로 모여라!”
“예. 단주!”
“앞으로 호칭은 위사로 통일한다! 이제 우리는 금의위다!”
“예. 위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