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232)

잊었던 일

***

“!”

사국도는 찢어진 호구(虎口)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진가장 공자의 검첨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내가 졌···.”

호충은 사국도가 패배를 자인하기 전에 얼른 검을 거두고 포권했다.

“실로 엄청난 도법이었습니다. 사 문주. 오늘 이 진 모가 지고한 경지를 보았음이옵니다.”

“!”

“아직 제 검술이 미숙함을 알고 사정을 봐주신 문주께 깊이 감명 받았습니다.”

“그, 그건···.”

그제야 패도문의 문도들은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고, 진가장의 무사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승리한 자의 넓은 포용심이 드러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제가 무례한 것이 있었다면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앞으로 홍동에서 패도문과 분쟁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헛. 흠.”

“다만 오늘은 길을 터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제 아비가 사경을 헤매고 계시기에 본가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부디 사정을 봐주시옵소서.”

“······.”

대부분이 이번 대결의 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상대는 비도만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비도를 엉뚱한 곳에 날려 보냈고, 마지막엔 자신의 목을 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낮추며 자신을 드높이고 있었다.

‘진 공자는 내 목숨을 살린 것으로 모자라 무림의 평판까지 지켜주고 있구나.’

두 번이나 목숨을 건진 것이다.

“···가시오. 효성이 깊은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소.”

“감사하옵니다. 문주! 오늘 사 문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훈훈한 모습이었지만, 지켜보는 장문소는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저 멍청한 놈이!!!’

하나씩 틀어지기 시작한 계획이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틀어졌다. 사국도를 통해 진가장의 공자를 죽이고 마교는 철저하게 감춘다는 계획이었다. 이제와 진가장의 공자를 죽이려 해도 방금 죽어버린 놈이 문제였다.

‘마혈단주라도 남았어야 뭘 해보지!’

마혈단주가 죽었기에 남은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

장문소의 눈에서 아지랑이 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녀석과 나만 따로 떨어지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이라면 자신의 마공을 드러내서라도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 사이 패도문의 세력이 홍동으로 다시 돌아갔고, 호충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인부들이 눈먼 비도에 맞았구나.”

“···인부 하나는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마도 사 문주의 도에 튕긴 비도에 맞았을 것이다.”

‘그 비도가 어디로 튕겼는지 내가 다 보았거늘!’

장문소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꼭지가 돌 것 같았다.

“허나 대결 중에 생긴 일이나 내 책임도 있다. 자장에 다녀와 그의 집에 보상하고 나 또한 사죄할 것이다.”

“······.”

마교의 단장인 그에게 집이 어디 있으며 가족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대는 다리를 다친 인부들을 모아 다시 홍동으로 돌아가게. 이들을 끌고 자장으로 갈 수는 없지 않겠나.”

“!!”

‘나까지 돌아가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무사를 차출하여 함께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공자님 곁을···.”

“아닐세. 죽은 인부까지 생각하면 홍동에 인망 높은 그대가 가서 설명해야 할 것이네. 게다가 내 대신이니 그대를 보낼 수밖에.”

‘썩을!’

하나 같이 맞는 말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사들은 인부들 대신 짐을 챙겨라! 우리는 이대로 자장으로 갈 것이다!”

“예! 공자님!”

장문소가 다른 방책을 찾기도 전에 호충과 무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

“···이제 어찌하옵니까?”

다리에 비도를 맞은 인부 하나가 장문소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아직 홍동에 남은 이들이 있다. 이들을 보내야겠구나.”

“저희는 두시고 먼저 가십시오. 저들을 쫓자면···.”

“버틸 수 있겠는가.”

“버틸 수 있습니다. 지혈만 잘하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죽은 마혈단주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나머지는 다리만 다쳤을 뿐이다.

“그럼 내가 홍동으로 가서 추격대를 보내겠다. 기다려라.”

“예.”

장문소는 일행이 떠나간 방향을 노려보다가 땅을 박차고 경공을 펼쳤다.

파앙!

‘찢어죽일 놈!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진가의 공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호충은 대결이 벌어진 곳에서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일행을 멈춰 세웠다.

“모두 정지!”

“정지!”

마차에서 내린 호충은 무사들을 불러 모았다.

“예. 공자님. 모두 모였습니다.”

“···지금 우린 함정에 빠졌다.”

“!!”

“그래서 내가 인부들에게 비도를 날린 것이다.”

호충은 어제 무관에 방문한 아버지의 친우에게 들었다며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진가장이 마교에 습격을 당하다니!”

“장문소와 인부들이 마교도?”

“그렇다면 패도문과 대천문도 연관이 있을 것이옵니다!”

호충은 무사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하여 우리는 여기서 모두 흩어져야 한다. 그래야 적의 추격대를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따르겠습니다. 공자님!”

“나는 홀로 떠날 것이다. 너희는 지금부터 사방으로 흩어져라. 마교의 마공은 실로 두려우니 절대로 잡히지 마라.”

“···공자님은 어디로 향하십니까.”

“나는 너희가 붙잡힐 것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내가 경유할 곳은 일러줄 수가 없구나.”

“······.”

“각자의 짐을 챙겨라. 모두가 따로 흩어질 것이다.”

“···예! 공자님.”

말에 오른 무사들은 단단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공자님!”

“무운을 빈다.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나자.”

모두가 떠나가 휑한 곳에 서 있던 호충은 마차에서 말을 떼어냈다.

짜작.

히이힝. 히잉.

볼기를 맞은 말들이 투레질을 치며 멀어졌다.

마차에서 가벼운 행낭을 꾸린 호충은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큭. 이 몸의 일처리는 어찌나 완벽하신지.”

호충은 자화자찬하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드득.

호충의 얼굴이 다시 변했다. 이번엔 지역 흑패주들에게 보였던 송재호 스승의 얼굴이다.

“그럼 이제 흑패로 가볼까?”

본래 자장에 가려 했기에 이제 느긋하게 자장 흑패의 본거지로 향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 녀석들도 어느 정도 기본은 배웠겠······.”

호충의 걸음이 딱 멈춰버렸다. 후련했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제길!”

자장에서 사중환과 옥비연의 수련을 감당하고 있을 흑패주들을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무맹과 협의맹!”

진가장에 마교에 침입했음을 어찌 맹에 알리지 않았을까. 진가장에 무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를 위해서라도 정무맹과 협의맹에 급히 전갈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어찌 이것을 떠올리지 못했는가!”

무려 마교의 등장이다. 두 단체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들 것이다.

“무림인들이 자장으로 집결하기 시작하면···.”

자장 토박이도 아니고 얼굴까지 우락부락한 각 지역의 흑패주들은 일 순위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기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마교도라는 의심이었다.

파앙!

호충의 신형이 길게 뽑아져 앞으로 날아갔다.

‘시일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 아직 여유가 있어!’

앞서 달려갔던 진가장 무사의 말을 본 호충은 옆으로 빠져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를 바람처럼 지나치며 경공을 극성으로 펼쳤다.

휘이잉.

‘당장 놈들을 자장에서 빼내야 해!’

주구장창 달릴 일만 많은 요즘이다.

***

“···요즘 자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지?”

“예. 형님. 도박장에도 인적이 뜸합니다.”

사중환과 옥비연도 진가장의 일을 대강 알고 있었다.

“갑자기 진 가주가 원로원으로 들어가다니···. 지난번 혈사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지요. 수문 무사가 칼을 맞고 죽었으니, 내부는 더 했겠지요.”

아직 정확하게 내부의 일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외부에서 칼에 맞아 죽은 이는 그 앞을 지나는 자장 흑패의 눈에도 확인된 것이다. 또한 관에 가주의 원로원 행을 신고한 것도 외부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몸을 사려야겠다 싶기는 한데 말이야. ···확신이 없어.”

“대형께서는 이 상황에 어찌 하셨을까요?”

“!”

사중환은 호충이 있었다면 어찌했을까를 떠올리다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당장 흑패주들을 자장 밖으로 빼내자.”

“그 정도로 일이 커지겠습니까?”

“일이 커질지 안 커질지는 나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흑패주와 수뇌부를 밖으로 빼내면 우리가 위험할 일은 없어!”

“그렇습니다! 형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형수님께도 어서 말씀드려야겠다. 예전 대형이 하셨던 것처럼 길을 나누자. 둘씩 셋씩 짝 지어서 보내면 될 것이다.”

“기녀들을 흑패주에 붙이면 부부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옳다! 그리하자!”

호충의 급한 마음이 전해졌을까. 자장에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호충이 자장에 도착한 것은 홍동에서의 일이 있고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허억. 헉.”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기에 진이 빠질 정도였다.

‘진양의로 내공을 돌리지 않았다면 진즉에 뻗었겠지.’

달리면서 동공을 병행했기에 그마나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저들은!’

호충은 자장으로 들어서며 생소한 얼굴들이 종종 보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공을 쌓은 흔적이 드러나는 무림인들이었다.

‘벌써 무림의 인사들이 오고 있는가!’

마음이 급해졌지만, 호충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호충은 자장 시전으로 들어가 흑패주의 전각을 찾았다.

‘왜 조용하지?’

최소한의 인원이라도 전각에 머물러야 하건만 전각 안은 고요했다.

“게 없느냐?”

아무도 없는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불렀는데도 인기척이 없었다.

“젠장. 벌써 무림인들이 다녀갔는가.”

호충은 얼른 발길을 돌렸다. 이번엔 화용루였다.

‘화진까지 데려갔다면 자장의 무림인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호충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화용루의 담을 넘었다.

“······.”

호충은 조심스럽게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내실에선 작은 대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들 일을 끝내셨다고요.”

“예. 형수.”

“이제 다 내보내고 저희만 남았습니다.”

“그럼 두 분도 가세요.”

“형수님. 제가 남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형님. 제가 남는 것이 낫습니다.”

“어차피 저도 여기서 얼굴이 알려졌어요. 남아도 상관없습니다.”

“무림인들이 자장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기루에서 소란을 피우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형수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저희가 대형의 얼굴을 어찌 봅니까.”

사중환과 옥비연이 화진과 함께 있음이다.

‘녀석들···.’

호충은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드르륵 문을 열었다.

“!”

“!”

“가가!”

송재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호충임을 알아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였다. 지금은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할 때였다.

“사중환 다 내보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자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각 지역에서 올라온 패주들과 주요 인물들을 밖으로 뺐습니다. 형수님 밑에서 수련하던 기녀들도 같이 내보냈습니다.”

“정말 잘하였다.”

“감사합니다!”

“나가자. 너희도 자장을 빠져나가야 할 것이다.”

“···대형께서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계십니까?”

호충은 다 알고 움직인 줄로만 알았다.

“허! 영문도 모르고 움직였더냐?”

“예. 득보다 실이 많으리라 여겼습니다.”

“···진가장에 마교가 침입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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