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32)

마한로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

***

장문소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꽝! 뿌드득. 쿵. 쿵.

그의 손이 두꺼운 탁자를 내려쳤고 탁자는 두 동강이 나서 옆으로 쓰러졌다.

“일을 그르쳤다! 그것도 완벽하게 말아먹었어!”

“······.”

“······.”

진가장을 도모하려던 마혈단주가 일을 실패하고 돌아왔는데, 일을 수습하는 중에 어이없이 죽어버렸다. 둘째를 죽여야 한다고 신신당부 했건만, 패도문의 사국도는 대결에서 패배해 꼬리를 말고 무관으로 숨어버렸다. 자신의 휘하에 있던 마교도들까지 그 일로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진가장의 둘째를 쫓으라고 보낸 남은 마혈단원들도 저마다 소득을 얻지 못하고 다시 홍동으로 돌아왔으며, 거기다 방금 분양에서 진가장의 첫째까지 놓쳤다는 전서구가 도착했다.

으득.

도무지 되는 일이 없었다.

“어찌 이렇게 무능할 수가 있는가! 대체 뭘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장 교사님······.”

“장로님께 뭐라 할 것이며, 교주님께는 뭐라고 고할 것인가! 입이 있다면 말해보게!”

“······.”

“······.”

장문소의 앞에 꿇어앉은 둘 중에 하나는 홍동 무관의 감시를 맡았던 고산마였고, 하나는 호중을 찾기 위한 추적대를 이끌었던 태모준이었다. 마교에서 둘의 위치가 낮지 않았지만, 장문소 보다는 아래였다.

“나 혼자 가서 죽으라 이건가? 엉?”

“옥연비라는 놈이 문제입니다. 갑자기 나타나 홀연히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분명 녀석이 뭔가 수를 쓴 것입니다.”

고산마는 자신이 놓친 옥연비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으득. 할 말은 그것이 전부냐!”

가만히 듣던 태모준도 고산마를 거들고 나섰다.

“장 교사님. 옥연비라는 놈이 아무래도···.”

“녀석의 용모파기를 그리지 않았느냐! 찾으면 될 일이다!”

장문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이 봤던 옥연비의 용모파기를 그려서 건네주었었다.

태모준은 이를 다른 마교도에게 보여줬고, 알아보는 마교도가 있었다.

“···진가장에 갔던 마혈단의 말로는 파진후와 너무 비슷하다고 합니다.”

진가장에 다녀왔던 마혈단원의 하나가 이를 알아본 것이다. 이후 남아 있는 다른 마혈단원들도 용모파기를 돌려봤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파진후라는 놈이라고 호언장담했다.

“!!”

이는 호충도 파진후의 얼굴을 하고 장문소를 만났을 때부터 걱정한 부분이었다. 무관에 들어온 날에 많은 인물을 만나지 않아 넘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녀석이 파진후라면···. 모든 일의 원인이 바로 그 놈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가장에서 우리의 일을 방해한 녀석이 홍동까지 달려왔다? 그 짧은 시각에?”

“우리 마혈단원들이 도착하고 이후에 도착했으니 시간은 얼추 맞습니다. 마혈단주를 상대할 정도로 고강한 무위를 자랑하는 놈입니다. 경공을 익히지 않았을 리 없지요.”

“······녀석이 진정한 원흉이었어.”

“예. 무공도 절정급 이상인데, 정파 무림의 인사가 아닙니다. 어디에도 알려진 적이 없었던 놈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녀석을 찾아내야 우리가 살겠구나.”

마교는 오래 전부터 무림의 동태를 살펴왔다. 만약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력이 무림에 암약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면, 이번 대계의 실패를 묻어버릴 공을 쌓을 수 있었다.

“교인들 전부에게 녀석의 용모파기를 뿌리겠습니다.”

“···빨리 찾아라. 하다못해 녀석의 행적이라도 발견해야 한다.”

“예. 장 교사님.”

하지만 호충은 자신의 얼굴을 되찾고 연안으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마교가 찾던 파진후의 얼굴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니, 공을 쌓을 기회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

호충은 연안에 자리한 연위 흑패로 들어가기 전에 연위 흑패의 두 인물을 찾았다.

“가서 위지승과 양소를 불러와. 녀석들은 내 원래 얼굴을 봤잖아.”

연의 흑패 이후 각 지역의 흑패를 접수하면서 송재호라는 이름과 새로운 얼굴을 사용했기에 미리 입을 맞춰둘 필요가 있었다.

“마차 안에 계시면 제가 들어가서 둘을 데려올게요.”

“수고해줘.”

마침 가장 먼저 연위 흑패에 도착한 두 사람은 화진의 부름에 금방 마차로 달려올 수 있었다. 사중환고 옥비연이 아직 아무도 연안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것이다.

“저희 왔습니다. 위지승입니다.”

“양소도 왔습니다.”

“들어와라.”

자장과 천수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접수한 흑패가 바로 연안의 연위 흑패였다. 호충에겐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위지승과 양소를 보는 호충의 눈에 조금 더 마음이 담겼다.

“수련이 많이 고됐던 모양이야?”

둘은 예전보다 조금 야위어 있었고, 눈이 퀭하니 들어가 있었다.

“말도 마십시오. 사 대협이 얼마나 닦달을 하는지···.”

“옥 대협은 한 술 더 뜹니다요.”

휘하에 들인 흑패주들은 둘에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정도로 수련을 받고 있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수련이야. 무공을 제대로 배우자면 엄한 스승이 필요한 법이지.”

“에효. 덕분에 실력은 쑥쑥 늘고 있습죠.”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었는지···. 분명 전에는 비등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호충과의 여정 중에 계속해서 밀착 수련을 받은 결과였다.

“···둘에게만 일러둘 것이 있어서 불렀어.”

호충은 두 사람 앞에서 역용술을 사용했다.

우드득. 드득.

순식간에 호충의 얼굴이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

“!”

“앞으로 나는 이 얼굴을 드러낸다. 흑패 연합의 수장은 진호충이 아니라 송재호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와아.”

“미리 듣기는 했지만···.”

이미 사중환과 옥비연이 두 사람에게 일러둔 바였다. 연안에서 보여준 얼굴과 이후 다른 흑패주들이 알고 있는 용모가 달라 미리부터 둘에게 알려준 것이다.

“너희는 내 진실한 신분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다. 그러니 특별히 입을 조심해야 할 것이야.”

“···염려 마십시오. 이 위지승. 입이 무거운 놈입니다.”

“흐흐. 그만큼 저희가 중요한 위치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중요한 위치이기는 하지만 자장 흑패와 천수 흑패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희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도 알아줬으면 한다만?”

“······.”

“······.”

높은 자리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지도부에 가까워지고 싶거든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무공이 약한 놈은 언제나 남의 밑에 있게 될 것이야. 너희가 놀면 나중엔 다른 흑패주들에게 굽신 거려야 할 수도 있지.”

“···썅. 그 꼴은 못 봅니다.”

“수련하다 뒈지는 한이 있어도 꼭 고수가 될 겁니다.”

“······.”

‘의욕 주입이 너무 과다했나?’

둘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부러 다른 흑패주를 거론했다.

‘이 녀석들은 눈에 불을 켜고 무공에 열의를 보일 거야.’

“이제 나가자. 내가 송재호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을 잊지 마라.”

“예! 대형!”

‘대형이라는 호칭도 이번에 바꿔버려야겠어.’

흑패 연합은 하오문(下汚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날 것이다.

***

눈에 불을 켜고 무공에 열의를 올리는 놈이 또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거한은 팔다리를 후들거리며 산을 오르는 이의 등에 업혀 있었다.

바로 호충에게 발목 힘줄을 잘린 흑부 마한로였다. 마한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 평지에서는 그나마 조금씩 걸음을 옮길 수 있었지만, 산을 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마한로와 함께하던 녀석이 마한로를 업고 산에 오르는 중이었다.

“헥. 헥. 패주. 이제 거의 다 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패주자리에서 내려 온지 한참이었지만, 아직도 녀석은 마한로를 패주라 부르고 있었다.

“더 올라가보자.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산에 높이 올라와 구름이 산에 걸쳐 있었다. 안개와 같은 구름 속에서 산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끄응. 벌써 어제부터 같은 얘기만 하셨습니다. 이 산이 아니지 않을까요?”

“내가 다리만 성했어도 너를 이리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죽일 놈이지···.”

“에효. 간다고요!”

산길을 헤매기를 한참.

둘은 기이한 문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문이라고 말하기에도 난감했다. 대문의 틀만 있을 뿐 정작 닫을 수 있는 양쪽 문이 없었고, 문 옆으로 담장도 없었다. 그저 문이라는 형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저기다!”

“드디어!”

“고생했다. 소야.”

“헤헤. 제가 고생을 하긴 했지요.”

“웃지 말고 어서 저리로 가.”

“···에효. 갑니다.”

이제 조금 쉴 수 있나 싶었더니 문을 지나자마자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나타났다.

“···쉬었다 가시죠.”

“에효. 내가 죽어야···.”

“때려 죽여도 지금은 못 갑니다.”

“······.”

마한로는 앓는 소리도 소용없자 어쩔 수 없이 소야의 등에서 내려왔다.

“조금만 쉬고 바로 가는 거다. 알았지?”

“알았다고요!”

마한로를 업고 오느라 등이 흠뻑 젖어 있었던 소야는 금방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쉬다가 죽을 판이었다.

“으으으. 그냥 가죠. 쉬다가 얼어 죽겠습니다.”

“내가 무공을 익히면 너를 꼭 대우해주마.”

마한로는 예전에 읽었던 서책에 나온 인물을 찾아온 참이었다.

“이 분은 신선을 스승으로 모셨다 했으니 진정 대단한 무공을 가르쳐줄 것이야. 게다가 지금은 그조차 반 신선이라 했다.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야.”

마한로가 참고한 서책은 호충도 읽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마한로는 [고대중원무림비서]에 기록된 허황된 말을 믿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내가 그의 무공을 이으면···.”

‘진호충.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밖으로 내 뱉으면 자신의 복수심이 희석될까 말도 아끼고 있었다.

.

.

.

소야는 길고 긴 계단을 올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작은 초옥이 하나 지어진 곳이었다.

“역시. 반 신선이라 그러신지 상당히 검소하시군.”

마한로가 바닥에 내려섰고, 소야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꺼억.”

“쉬고 있어라. 소야.”

마한로는 바닥에 기절해버린 소야를 두고 절룩거리며 초옥으로 다가갔다.

“신선님!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우렁우렁 울리는 마한로의 목소리가 산에 메아리쳤다.

···왔습니다. ···습니다. ···다. ···다. ···다.

끼이익.

초옥의 작은 문이 열리며 머리칼과 눈썹, 수염까지 온통 하얀 노인이 밖을 내다봤다. 보이는 모발은 전부 하얗게 세어 있었지만, 얼굴의 피부는 대춧빛을 보이는 것이 대조적이었다.

“허어. 왜 이리 소란한고.”

입은 옷은 기우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덕지덕지 옷 조각으로 기워져 있었고, 기우다 못해 해진 곳도 상당했다.

‘역시 신선의 풍모로다!’

마한로는 겉모습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만약 말끔한 옷차림에 부유한 모습이었다면 오히려 의심했을 것이다.

“소인 마한로라 하옵니다. 신선님의 서책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

척.

내민 손은 뭔가를 바라고 있었고, 마한로는 저 손에 무엇을 올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젠장. 진짜 돈을 줘야 하나?’

고민은 짧았다. 무공을 배우러 여기까지 왔을 때 이미 작정한 바였다.

마한로는 품으로 손을 가져가 주머니를 꺼냈고, 곧 신선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짤그락.

백발 도인의 손이 빠르게 주머니를 열었다.

그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고 곧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너는 내가 말 한대로 금원보 열 개를 챙겨왔구나.”

“흐흐. 예.”

호충에게 받은 금원보는 단 하나였지만, 따로 챙겨둔 금원보가 아홉이나 있었다. 손등이 칼에 뚫리는 순간에도 자신의 비밀 자금을 감춘 것이다.

***

소야의 기연

***

금원보를 확인한 백발 도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네가 처음이다. 너 외에 다른 놈들은 금자나 은자를 가져와 흥정하려 했었지.”

“참으로 못된 놈들입니다. 흐흐.”

“어떤 놈은 아예 빈손으로 온 놈도 있었다. 도둑놈 심보였지.”

“저런! 혼쭐을 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너만 내 말대로 했구나.”

“아휴.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이제 내려가라.”

“···네?”

“제자를 받았으니 너는 내려가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자가 여기 있는데, 어찌 내려가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내 제자가 될 놈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내려가라는 말이다. 금원보 열 개는 분명 제자 한 명분의 값이다.”

백발 도인은 마당에 쓰러져 있는 소야를 보고 있었다.

“저기 저 놈이 제자가 아니라 제가 제자가 될 생각입니다.”

백발 도인은 마한로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너는 다리 힘줄이 잘리지 않았느냐?”

“!”

마한로는 단번에 자신의 상세를 알아봐 깜짝 놀랐다.

“흐음. 그래도 다 잘리진 않았구나. 절반 정도만 잘렸어. 열심히 다리를 움직인다면 몇 해 뒤에는 정상으로 돌아올 게다. 하지만 무공까지 익히는 것은 어렵다.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너는 불가(不可)다.”

“···제가 안 된다면 돈은 돌려주십시오! 저 놈을 제자로 만들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오!”

“그것도 불가(不可). 이미 금원보는 나의 것이다. 네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왔지 않느냐.”

“이익!”

화가 끓어오른 마한로는 품에 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지금 당장 내 주머니를 돌려주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요. 노인장.”

“···허허. 네 성정이 포악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로 고약한 일이로다. 내 뜻을 처음으로 실현한 놈이 이런 놈이라니···.”

“당장 내 놓지 못하겠소!”

마한로의 호통에도 백발 도인은 소야를 향해 돌아섰다.

“지독하게 미련하고 자질 또한 평범하나 욕심이 크지 않구나. 그야말로 내 제자가 될 놈이로다.”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노인네로구나! 내 돈 내놔!”

마한로는 짧은 거리에 있던 백발 도인에게 칼을 휘둘렀다.

휘익.

백발 도인의 팔이 기이하게 늘어나며 마한로의 이마에 딱 밤을 선사했다.

따앙!!!

엄청난 굉음에 메아리가 화답했다.

···딱. ···딱. ···딱. ···딱.

마한로는 딱 밤 한 방에 정신을 놓고 막 태어난 새끼 망아지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백발 도인은 기절한 마한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소야를 향해 다가가 기절한 소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찌 저런 녀석을 업고 여기까지 왔느냐. 그간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네가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네게 복으로 돌아왔음이다.”

백발 도인은 보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제자를 위해서라도 녀석을 조금은 고쳐야겠구나. 허허.”

기절한 소야의 입술이 작은 미소를 그렸다.

[고대중원무림비서]의 저자는 진정으로 신선의 유진(遺塵)을 이은 고수였음이다.

“그 전에 너를 더 자세히 보자꾸나.”

도인의 손은 소야의 손을 향해 뻗어졌고, 서로의 손이 맞닿으며 소야가 살아온 과거의 편린이 흘러들어왔다. 소야의 인생 굴곡을 보기 위해 특별한 무공을 사용한 것이다.

“어디보자···. 허. 짧은 인생을 고달프게 살아왔어.”

도인은 소야의 현재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살피기 시작했고, 소야의 탄생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상단전의 공능이었는데, 백발 도인이 천안통의 능력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

깜짝 놀란 도인의 눈에 노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네 놈들은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였는가!!”

누구도 알지 못했던 소야의 과거를 확인했음이다. 도인은 잠시 눈을 감고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문의 업이 이리 크다니···.”

백발 도인은 금방 신색을 회복하고 소야를 가볍게 들어 초옥으로 들어갔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러다 고뿔이 걸리지 싶구나. 어서 옷을 갈아입자.”

마한로에게 냉랭하던 백발 도인이 지금은 한없이 친절한 스승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

.

한참 뒤에 눈을 뜬 소야는 자신이 어째서 방에 누워있는지, 또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내가 죽어서 거지로 다시 태어났나? 전생에도 거지였는데 또 거지야?’

상념이 이어지는 가운데 백발 도인이 방에 들어왔다.

“깼느냐?”

“···누구십니까?”

소야는 초옥을 보고 바로 기절해 버렸기에 백발 도인을 처음 보는 참이었다.

“앞으로 네 스승이 될 것이다. 네가 내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아! 저까지 받아주십니까? 감사합니다. 스승님!”

소야는 넙죽 절했지만, 작은 오해가 있었다.

“네가 업어온 이는 너를 두고 하산하였다. 제자가 되는 것은 너 하나다.”

“패주께서···. 하산하셨단 말입니까?”

“패주? 너는 아직도 그를 패주라고 부르더냐?”

백발 도인은 소야를 통해 과거의 일을 대강 보았다. 패주라고 불리던 마한로는 이미 패주 자리를 빼앗긴지 오래였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못한 몸을 갖고 있었다.

“패주는 자장에서 가장 힘이 쎈 분입니다. 저는 흑부 형님의 하나 뿐인 수하입니다!”

소야는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백발 도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는 그가 네 목숨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알고 있느냐?”

“···큰일을 하자면 작은 일까지 신경 쓸 수는 없는 법입니다. 패주께서 하산하셨다면 저도 하산하겠습니다.”

“······.”

백발 도인은 미련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제자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하산하였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다친 다리가 성해졌다는 뜻이다.”

“!”

“네가 내 제자가 되는 것이 기뻐 그를 고쳐줬다. 그런데 너는 하산을 입에 올리느냐?”

“······.”

“패주께서는 노인장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는데···.”

왜 마한로를 받아주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그는 심성이 차갑고 언제나 자신밖에 몰랐기 때문에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내가 익히는 무공은 비인부전(非人不傳) 부재승덕(不才承德)을 철저하게 따른다.”

비인부전(非人不傳) 부재승덕(不才承德)이란 사람됨에 문제가 있는 자에게 벼슬이나 재능을 전수하지 말아야 하며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백발 도인은 사람의 됨됨이가 갖춰지지 않은 자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 확고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다리가 조금 나아졌음을 알고 너를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초옥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묻지 않더구나. 녀석은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마한로는 자신의 다리가 고쳐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도망치기 급급했다.

“패, 패주가 나를···.”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는 소야에게 백발 도인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버렸지. 너는 그에게 버려졌다.”

“······.”

“녀석에겐 너를 버린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너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너는 그저 몸이 불편한 자신을 돕는 종복의 하나로 여겼고, 가축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었다.”

“······.”

“이 높은 곳까지 힘들게 업고 온 너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너를 돌본 다음 깨어난 너와 인사해야 옳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사람됨이다. 하지만 녀석은···.”

마한로는 기절했다가 깨어나 자신의 다리가 조금 나은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자신의 다리를 낫게 한 것도 그렇지만, 칼을 들고 덤벼들었음에도 순식간에 자신을 쓰러트린 백발 도인이 굉장한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안위만 중요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소야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는 한 번 준 마음을 쉽게 거두는 녀석이 아니지.”

“······저, 저는.”

소야는 고개를 쳐들고 백발 도인을 바라봤다. 세상에 자신이 의지하던 단 하나 뿐인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흑부 마한로는 자신의 전부였다.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자신에겐 그가 세상의 전부였다.

“울지 마라. 이제 내가 너의 아비가 되고 스승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나와 함께 살자꾸나.”

“······끄흑.”

“배가 고프지 않느냐? 내가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두었으니, 우리 함께 먹고 기운내자.”

“···저는 소야라 하옵니다.”

“알고 있다. 이제 네 이름은 연소야라 할 것이다.”

“!!”

“네가 지금까지 성도 없이 소야라는 이름으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내 성을 따라 연소야라 할 것이다.”

“연소야···.”

“그래. 이제부터 너는 연소야다. 네 스승인 나의 이름은 연만호다. 잘 기억해두어라.”

“···예. 스승님. 앞으로 스승님을 부모처럼 믿고 따르겠습니다.”

‘딱한 녀석···.’

연만호의 눈엔 연민이 가득했다.

‘네 아비와 어미가 멀쩡히 살아 있거늘···.’

***

깊은 산을 달리는 한 남자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 쫓아오진 않는지 불안한 눈으로 살폈다.

“허억. 헉.”

털썩.

이미 숨이 턱까지 차오른 호현은 더 달리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아직 자장까지는 멀었다. 여기서 쉬면 목숨이 위험하다.’

“끄응.”

호현은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발을 놀려 앞으로 향했다. 관도도 아닌 숲길이라 나뭇가지와 잡풀이 길을 방해했지만, 추적자들이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선 차라리 마음 편한 길이었다.

‘파 대협이 아니었으면···. 나도 녀석과 함께 죽었겠지.’

파진후의 조언으로 분양(汾陽)에서 탈출한 호현은 며칠 전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

.

.

진호현은 멀리서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떼어놓은 진가장의 무사였다. 진가장의 무사 한 명를 대동하고 분양에서 빠져나왔고, 다시 무사와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향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고삐를 무사에게 주고 왔기에 무사는 두 마리 말을 데리고 태원(太源) 방향으로 걷는 중이었다. 무사는 자신이 다른 방향으로 먼저 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파 대협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해야 해.’

전음을 전할 정도로 고절한 고수라 당시엔 믿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다.

“!”

상당히 먼 거리에서 무사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멀리서 달려오는 인마(人馬)를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추적대? 아니야. 그저 길을 지나는 상인의 무리일 수도 있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온 이들은 진가장의 무사가 있는 곳까지 금방 도착했다.

멀리서 이들이 편히 대화하는 모습을 본 호현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추적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벌써 이틀이나 무사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호현은 다시 진가장 무사에게로 돌아가려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

방금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던 진가장 무사의 목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 방금 녀석이 가리킨 길은···.”

자신이 무사에게 알려준 길이었다. 장치(長治)로 가서 부총관 염태중을 만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날 쫓는 추격대였어!’

호현은 인마가 멀리까지 사라진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분양은 호굴이었구나! 우회해서 자장으로 돌아가야 해!’

그때부터 본격적인 호현의 도주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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