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32)

동상이몽(同牀異夢)

***

몇 날 며칠 호현의 도주가 이어졌다.

“흐흡. 허헉.”

‘이젠 쉬어야 해. 이대로 계속가면 쓰러진다.’

인적이 드문 숲의 구석진 곳에서 자리 잡은 호현은 지금 자신의 상황만큼이나 자장의 본가를 걱정했다.

‘아버지가 원로원으로 가시고 셋째가 가주에 올랐다면···.’

물론 아버지를 향한 걱정이 아니라 가주자리를 향한 걱정이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빨리 자장으로 돌아가 가주 자리를 되찾아야 했다.

‘둘째가 먼저 도착하면 그것도 큰 일.’

자신에게 위험을 알려준 파진후가 둘째에게도 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내 의심으로 이틀이나 지체했다.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해야 해.’

늦은 밤이기도 했지만, 며칠째 숲길을 지나온 참이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도저히 걸음을 옮길 수 없어 잠시 휴식을 위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건량으로 대강 허기를 달래고 움푹 들어간 구덩이에 몸을 뉘었다. 쉴 때 확실히 쉬어야 다시 길을 갈 수 있을 터였다.

바스락.

“!!”

하지만 모포를 덮고 막 잠에 들려던 차에 들려온 소리는 호현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산짐승인가?’

바스락. 바스락.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인간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현은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귀를 가져갔다. 인간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더 상세한 정보가 땅을 타고 전해졌다.

‘···발을 끌면서 오고 있다.’

보폭은 일정하지만 기운이 잔뜩 빠진 인간이 내는 소리였다.

‘사냥꾼? 아니야. 사냥꾼이라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산에서 길을 잃을 일도 없지.’

호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자신이 자리 잡은 방향으로 오는 것을 알고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나를 추적하던 마교도 중의 하나일 수 있어.’

호현은 나무 뒤에 숨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 녀석을 통해 어디까지 마교도가 수색 중인지 알아내야 해.’

조용히 숨을 죽이고 나무 밑동에 쪼그려있던 호현은 상대가 나무 곁을 지나는 순간에 칼을 뽑아 녀석의 어깨에 걸쳤다.

촤앙!

“끅!”

며칠간의 도주로 잔뜩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입을 다물어라. 입을 여는 즉시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

호현은 상대가 고분고분 말을 따름에 다행이라 여기며 첫 질문을 던졌다.

‘마교도일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다른 질문으로 넘겨짚어야 해.’

“마교의 추적대 규모는 얼마나 되느냐. 네가 속한 조는 어디에 있지?”

“어?”

“움직이지 마!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혀, 형님?”

호현은 형님이라는 말에도 겨눈 칼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돌았다.

별빛에 드러난 얼굴은 호현이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호중아!!!”

“호현 형님!”

호현은 얼른 칼을 거두고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밤 깊은 숲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가 쫓아오진 않았느냐?”

“마교도는 제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야밤을 틈타 빠져나왔습니다.”

호충이 미리 호중을 도주시켰기 때문이다. 덕분에 분양에서 마교도를 따돌린 일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호현은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추적자가 붙었다면 자신까지 위험했다.

“······.”

호중을 만난 것이 오히려 걱정만 가득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까지 왔느냐.”

이유부터 알아야 했다.

홍동에 있던 호중이 어째서 자장 방향이 아닌 위로 향했는지 알 수 없었다.

“파 대협이 형님과 합류하는 편이 도주에 용의할 것이라 했습니다. 해서 분양 방향으로 도주 경로를 잡았습니다. 내일까지 형님을 마주하지 못하면 자장 방향으로 틀 생각이었습니다.”

‘···파 대협이 성공했군.’

차마 성공하지 않기를 바랐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파 대협이 급히 길을 달려오느라 고단하다고 하셨지만, 너를 구해야 했다. 다행히 제 시간에 도착하신 모양이구나.”

“형님과 이미 만났다는 소식은 파 대협을 통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수고 많았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천운이지 싶구나.”

“···휴우. 진가장이 걱정입니다. 아버지께서···.”

“···셋째가 가주에 올라 있겠지?”

“······.”

둘은 잠시 침묵했지만, 호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다.”

“맞습니다. 저도 쉬어야겠습니다. 이제 걷기도 힘에 부칩니다.”

호현은 자신이 쉬던 곳으로 호중을 데려갔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고민했다.

‘모용가의 힘을 빌리고 진가장 무사들을 규합하면···.’

가주 자리를 되찾는 것은 여반장일 것이다.

‘하지만 둘째가 훼방을 놓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호중과 자신의 뜻을 하나로 만들어야 했다.

“···자느냐?”

“아닙니다. 형님.”

“자장에 도착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맞습니다. 진가장의 가주 자리를 모자란 놈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가주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 때까지 우리는 분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를 믿으신다면 그리하지요.”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느냐다.

‘호현이 너를 어떻게 믿어?’

‘네 놈은 분명 내 뒤를 노릴 것이다.’

호현은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너는 내 동생이고 지금 우리는 고난에 처했다. 나는 너를 지켜낼 것이고, 또한 믿을 것이다. 우리 같이 자장으로 가자.”

“예. 형님. 저희는 섬서에 도착하는 즉시 모용가와 서문세가에 서찰부터 보내야 할 것입니다. 자장의 무사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있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네? 그럼 셋째를 어찌 가주자리에서 끌어내리겠습니까.”

“변수가 하나 더 있지 않느냐.”

“······.”

‘내가 무슨 변수를 빼먹었지?’

호현은 자신이 조금 더 현명하다는 것에 내심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무려 마교의 재등장이다. 지금 진가장은 정무맹과 협의맹의 인사들로 가득할 것이야.”

“!!”

“모용세가와 서문세가도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는 자장의 진가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아······.”

‘젠장. 이젠 머리까지 밀리다니···.’

지금까지 자신이 호현보다 현명하다고 믿어온 호중이다.

“우리의 일은 진가장을 정상화한 다음에 따져야 할 것이다. 지금 진가장에서 혼란을 야기하면 될 일도 말아먹게 된다. 우리가 힘을 모아야 셋째를 끌어내릴 수 있어.”

“원로원에 들어가셨을 아버지도 우리 형제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당장이라도 가주직 이양을 되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원로원이다. 명분은 있을지라도 힘이 없지.”

“···진가장 내부의 일입니다. 힘보다 명분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호중이 놓친 것이 하나 있었다.

“다 좋다. 하지만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 것 같으냐? 둘 중에 아무나 괜찮다고?”

“······.”

아버지는 지금까지 자신 곁에서 일을 도왔던 호현을 선택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다.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원로원을 끌어들여 황궁까지 이 일에 관심을 두게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따르겠습니다. 형님.”

‘오늘은 내가졌다. 하지만 가주에는 내가 오를 것이다.’

호중은 분한 마음을 달래며 속으로 각오를 다졌지만, 호현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질 것이다. 네가 나를 찾아온 것부터가 잘못이지. 파 대협도 나를 위해 너를 내게 보냈을 것이야. 가주 자리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

“상세한 얘기는 내일 깨어 다시 나누자. 이젠 정말 쉬어야겠다.”

“예. 저도 무척 노곤한 참입니다.”

동상이몽(同牀異夢)의 배다른 형제가 한 곳에서 잠을 청했다.

***

호충은 연안에서 며칠을 더 기다렸다. 자장을 빠져나온 흑패주들과 기녀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대형. 흑패주와 주요 수뇌부가 모였습니다.”

“기녀들까지 전부 도착했습니다.”

“그럼 가지.”

호충은 송재호의 얼굴로 나섰다. 화진은 호충의 곁에서 따르고 있었고 사중환과 옥비연이 양쪽에서 따라붙었다.

호충이 나타나자 모두가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송 대협을 뵈옵니다.””

“······.”

모두가 모이니 연위 흑패주의 커다란 객청이 가득할 지경이었다.

‘이들이 모두 내 밑으로 들어왔구나.’

왕호를 비롯한 천수 흑패의 인원이 빠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인원이 상당했다. 각 지역의 흑패주들과 이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이인자들이 더해져 있었고, 각 지역 기루에서 올라온 대표 기녀들의 숫자도 비등한 숫자였다.

‘이제 겨우 섬서의 일부를 차지했을 뿐. 내 욕심을 채우기엔 부족하다.’

호충은 배에 힘을 주고 기운을 끌어올렸다. 목소리에 내공을 담기 위함이었다.

“모두 연안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자장에서 갑자기 변고가 생겨 일이 틀어졌구나.”

우우웅. 덜덜덜.

내공이 가득한 목소리는 이들이 서있는 전각까지 떨리게 했다.

“!”

“!”

호충의 웅혼한 내공을 느낀 이들은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젠장. 대체 내공이 몇 갑자가 되는 거야.’

‘지금까지 송 대협이 보여준 무위는 빙산의 일각이었구나.’

이제 겨우 기초를 배우고 있지만, 내공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온 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기운이라면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영창(景槍:사중환의 별호)과 광도(光刀:옥비연의 별호)에게 전해 들었겠지만, 앞으로 너희의 수련은 서안에서 이어질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기초를 끝내고 맡은 지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웅. 우우웅.

“바쁜 와중에도 중요한 일을 전하려 너희를 모았다.”

호충은 모두가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짧고 명료하게 선언했다.

“오늘 흑패 연합과 기루 연합은 하오문(下汚門)이라는 이름 아래 모일 것이다.”

화진이 호충 곁에서 답했다.

“소첩. 하오문(下汚門)에 기쁘게 참여하나이다.”

“하오문(下汚門)···.”

“나는 하오문(下汚門)의 초대 문주가 될 것이며 앞으로 중원 전역의 모든 흑패와 기루, 도박장을 하나로 모을 것이다. 다만 외부에 개파를 선언하는 것은 무기한 뒤로 미룬다. 우리가 중원을 차지하는 그날! 진정한 개파를 선언하고 무림에 등장할 것이다. 알겠는가!”

““예! 문주님!””

이미 개파를 알고 있었던 사중환과 옥비연이 답하자 나머지 인원도 똑같이 답했다.

““예! 문주님!””

“영창(景槍)과 광도(光刀)는 이들이 서안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도와라.”

그리고 전음으로 따로 덧붙였다.

[그냥 길만 떠나기엔 시간이 아깝다. 가는 동안 기초 수련이 부족하지 않도록 보충해야 한다.]

““예! 문주님!””

사중환과 옥비연의 수련이 고되다고 하지만 본래 지독한 수련은 호충이 원조였다.

둘 조차 호충의 수련에 피가 마를 정도였다.

“모두 동작 그만! 이쪽으로 모엿!”

“허벅다리에 살 붙은 놈들 뭐야! 정신 안 차려!”

호충은 화진에게도 일렀다.

“기녀들은 그대가 맡는 것이 좋겠지.”

[기녀들의 수련은 꾸준히 이어져야 할 것이야.]

“예. 문주님.”

화진도 앞으로 나서서 기녀들을 향해 말했다.

“기녀들은 이쪽으로 모이도록. 그간 소홀함이 없었는지 점검할 것이다! 또한 누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서안에서 다시 확인할 것이야.”

호충은 바짝 긴장한 이들을 두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지금의 고통이 훗날 높은 경지로 돌아올 것이다.’

자신이 심상 수련으로 겪는 고통에 비하면 이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호충은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할 정도로 극도의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 올라있어도 스승들의 무공 수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죽는 건 진짜 싫다고···.’

심상 수련을 빼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밤에도 심상 수련을 이어갈 호충이다.

“에효.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지금까지 자신의 손에 죽은 놈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전생의 삶이 아니라 현생에서도 많은 놈들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준 호충이다.

“스승을 넷이나 모시고 사네.”

고루고루 죽여주시는 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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