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답보(月下踏步)
***
“하지만! 송 영감의 경우는 조금 달라.”
“···다릅니까?”
호충은 더 상세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몸이 더 나은 검로를 그릴 수 있음에도 여전히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야. 뿜어 나오는 힘에 저항해 검로를 인위적으로 그렸다는 뜻이거든.”
“···검명이 들리면 일부러 조금 더 천천히 검식을 펼치긴 했습니다.”
호충은 빠르게 검식을 펼치며 검기를 날리는 것보다 느리게 펼치는 것이 더 빠른 길임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것도 상당히 좋았어. 본래 검식은 빠르게만 펼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내가 한 번 보여줄게.”
호충은 자신의 검을 들어 송 영감이 배우는 검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르륵.
“달빛 아래 느긋하게 산책하는 느낌으로 아주 천천히···.”
호충은 [월하답보(月下踏步)]라는 검법의 이름처럼 산보를 하듯이 검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첫 초식을 펼치는 것이었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호충은 첫 검식을 펼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고, 송 영감도 눈을 부릅뜨고 검식을 살피고 있었다. 느린 검식이지만, 마치 검식이 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느린 세상 속에 깊이 던져지면···.”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역행하는 검식은 때로 그 반대를 만들어주었다.
“!”
전면을 보고 검식을 펼치던 호충의 검이 순간 전혀 엉뚱한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검법의 첫 검식이 마무리 되었다. 검식을 끝낸 호충의 이마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검식의 진실한 힘을 마주할 수 있어. 후우. 이거 상당히 힘드네.”
“······바, 방금 그건 뭡니까.”
“정중동(靜中動).”
[월하답보(月下踏步)]는 정중동의 묘리가 들어간 지고한 검법이었다. 그간 송 영감이 검법의 검식에 익숙해졌기에 그 이상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나도 이제 막 시작해서 이 이상은 알려줄 수가 없어.”
자신의 수련을 꾸준히 이어온 호충은 이제 의식적으로 정중동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올라서 있었다. 그럼에도 정중동은 정복하기 힘든 높은 산이었다.
“···엄청난 수준의 검법이었군요.”
“그럼 내가 시답지도 않은 검법을 영감에게 배우라고 했을까. 하지만 월하답보는 정중동이 끝이 아니야. 부드러움(柔)을 극한으로 깨달아 강, 환, 쾌, 파를 모조리 담을 수 있어야 해.”
“우선 지금은 도련님의 검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듭니다. 대체 언제 그 수준까지 오를지···.”
“아무리 급해도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으면 안 되지. 기본부터 천천히 가는 거야. 한 걸음씩 오르다보면 정상에 올라서 산하를 내려다 볼 수 있을 거야.”
“허허허. 그럼 정상에 오르신 도련님 기분은 어떠십니까.”
“···내가 오른 산은 동네 뒷산이더라고.”
정중동을 의식적으로 펼칠 수 있는 수준에 오르니 드높은 산이 엄청나게 많이 보였더랬다.
“······.”
“······.”
호충의 말에 막막한 심정이 된 송 영감과 애초부터 막막했던 호충의 침묵이었다.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보겠습니다.”
“나는 뒷산을 확실하게 정복하고 다른 산을 올라볼게. 오르고 오르다보면 언젠가는 하늘에 닿겠지.”
서안에 하오문(下汚門)의 수뇌부가 모일 때까지 둘의 수련은 계속될 것이다.
***
“확실히 서안은 자장하고 다르게 활기가 넘치네.”
매일 수련만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 서안 시내로 나와 서안 흑패가 운영하는 사업장을 돌아보기도 했다.
‘하오문이 성장하려면 기존의 사업을 더욱 확장해야 해.’
흑패가 진출할 새로운 사업 분야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호충의 일과 중 하나였다.
호충은 흑패가 운영하지 않는 다루(茶樓)에 들러 차를 시켜보았다.
‘흠. 겨우 풀 쪼가리 몇 개 들어갔는데···.’
후룩.
거친 물이 찻잎 몇 개로 인해 부드러운 차로 변했다. 중원인들은 대부분 차를 물 대신 즐기고 있었기에 차는 필수품의 하나로 통용되고 있었다.
‘각 지역의 흑패를 통해 차(茶)와 특산물을 유통해야겠어.’
나라에서 규제하는 물품이 아닌 다음에야 거래에 제약을 받을 일은 없었다. 이렇게 적은 비용으로 큰 수익을 내는 차(茶) 거래에 빠질 수는 없었다. 이에 더해 중원의 성들이 생산하는 지역의 특산물을 더하면 흑패 연합은 거상으로 거듭날 수 있을 터였다.
다루(茶樓)의 이 층에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던 호충은 창문으로 밑에 마차가 도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렇게 부유한 사람들이 즐기는 차는 더욱 비싸겠구나.’
상당한 재력을 갖춘 인물이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차가 열리고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인물은 비단 옷에 강한 인상이었다.
“!!”
호충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은 읽을 수 있었다.
‘마교!’
일전에 진가장에 침입했던 마교도가 풍기는 기운과 똑같은 기운이었기 때문에 마교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호충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안심했다.
‘송재호의 얼굴을 하고 다니길 잘 했구나.’
만약 파진후의 얼굴이나 진호충 본인의 얼굴이었으면 저들에게 나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충은 이 층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이들이 자리를 잡으면 잠시 대화를 나눠볼 요량이었다.
“후우. 이제야 숨을 좀 쉬겠군.”
“대협. 좋은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이 층으로 가세. 서안의 다루는 이층에서 보이는 광경이 좋다고 했거든.”
“사람이 오가지 않으니 좋습니다.”
호충은 위로 올라오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만 쾌재를 불렀다.
‘내가 내려가지 않아도 알아서 올라오는 군.’
두 사람은 이 층에서 좋은 자리를 찾았지만, 창가 근처는 모두 자리가 있었다.
“자리가 없군요.”
“기다리는 것은 이제 지겨우니···.”
진휘평은 다른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사람만 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휘평은 마 장로가 말리기 전에 얼른 나섰다.
“실례하겠소.”
“아. 무슨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서안의 다루를 찾았는데, 자리가 마땅치 않구려.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자리를 내어줄 수 있겠소.”
“저도 이 자리를 참 좋아하는 터라···. 자리도 넓으니 같이 앉으시지요.”
진휘평은 못마땅한 얼굴의 마 장로를 돌아봤다.
“···어쩔 수 없지요.”
“일행도 좋다는 군요.”
“하하. 앉으시지요.”
“고맙소.”
호충은 앞에 앉은 인물들을 살피며 의문이 생겼다.
‘이 자는 마교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저 자가 이 사람을 공손히 대할까.’
무공의 고하로 상하가 나뉘는 마교이기 때문이다.
의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 본 것이 분명한데 왜 이리 낯이 익지?’
진양의를 통해 기억력이 비상하게 올라간 호충이다. 스쳐 지나다 얼굴을 보았다고 해도 기억에 있을 것인데, 전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뭐지?’
호충은 진양의로 다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한참 기억을 뒤지던 호충은 비슷한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
‘황태자와 닮았구나!’
눈앞의 장년인은 황태자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
그 말은 곧 자신과도 닮았다는 뜻이었다.
‘혹시······.’
호충은 이 남자가 잠행 중인 황제가 아닐지 의심했지만, 옆에 앉아서 눈을 부라리는 마교도를 생각하며 의심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황제 곁에 마교도가 있을 리 없지.’
나라를 세우는데 지고한 공을 세운 마교였으나, 황궁은 마교를 지독하게 핍박했고 지금도 그 핍박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황실에서 마교인을 곁에 둘 리가 없었다.
“허허. 어찌 그리 저를 빤히 보십니까.”
진휘평은 상대가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음을 알고 물은 것이다. 왕야의 신분일 때는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이리 쳐다보지 못했기에 나름 신선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아는 분인가 하고 살폈습니다.”
“저와 닮은 사람은 몇 없을 겁니다.”
“······.”
호충이 아는 인물만 둘이었다. 바로 황태자와 자신이다. 황궁에 앉아 있을 황제까지 포함하면 셋이나 되지 않겠는가.
“하하. 저도 제가 착각했다 여기는 중입니다.”
“저는 진···.”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던 진휘평은 마 장로의 눈치를 보고 말을 줄였다.
“진 모라 합니다.”
“오. 이런 일이···. 제가 진 형과 비슷하다 여긴 이도 진 가였습니다. 저는 송재호라 합니다.”
호충은 중년의 송재호로 분하고 있었기에 중년인에게 형이라 칭할 수 있었다.
“!”
진휘평은 자신과 닮은 인물이 진 씨라는 것에 놀라 되물었다.
“그가 누구 입니까?”
“자, 잠깐만···. 대협. 이러시면···.”
마 장로는 자신이 있는 가운데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이 실로 못마땅했다.
덕분에 호충은 이들의 관계가 상당히 미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교도는 대협이라 칭하면서도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진 형이 마교도를 어려워하는 구나.’
“그저 궁금해서 그렇소. 내가 아는 인물일 리가 없지 않소.”
“······.”
마 장로는 송재호라고 이름을 밝힌 이를 노려보다가 다시 의자에 등을 붙였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니···. 아무것도 모르겠지.’
진 씨라는 말에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다 생각했다.
“내가 과민하게 굴었나 봅니다. 두 분은 대화하시지요.”
“어휴. 저도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저 진 씨라는 것만 알지 이름은 모른답니다.”
호충은 더 이상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황태자의 존재를 감췄다.
“아···.”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보아하니 친지를 찾으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저 진 씨 성을 가졌다는 말에 궁금했을 뿐입니다.”
“섬서에서 진 씨 성을 가진 이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장으로 가시면 진가장이 있으니 거기서 많이 만날 수 있겠지요.”
“···그도 그렇겠습니다.”
호충은 중년인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뭘까. 이 자가 감춘 아픔은 대체 뭐지?’
호충은 앞의 두 사람이 주문한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상념을 거둘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왜 자꾸 저자가 신경 쓰이는 걸까.’
자신은 마교도인 비단 옷의 남자를 통해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마교도보다 진 씨라는 이 남자에게 더욱 마음이 쓰였다.
‘진양의가 대체 내게 뭘 요구하는 거지?’
예전 비고에서 공청석유를 취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손을 막아선 느낌과 비슷했다.
‘대화를 해봐야 알겠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호충은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 형은 용모가 수려하여 여인들이 많이 따랐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소.”
호충의 말에 그는 더욱 깊은 슬픔을 드러냈다. 오래전 잃은 자신의 부인과 이후 다시 만난 여인과 아이까지 모두 잃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호충은 옆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다시 물었다.
“그쪽은 성함도 듣지 못했구려. 제 소개를 다시 해드리자면···.”
“송 형의 이름은 기억합니다. 나는 그저 진 대협과 친분을 나눈 상인일뿐이외다. 왕 모라 불러주시오.”
호충은 마교도가 관심이 생길만한 주제를 끄집어냈다.
“섬서에 오셨으니 진가장의 일을 들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진가장이 섬서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요.”
“종남과 화산이 있음에도 진가장은 섬서에서 위세가 드높지요. 하지만 최근 큰일이 있었습니다.”
호충은 마교도의 관심이 자신의 입에 쏠렸음을 알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