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32)

진(眞) 황가(皇家)의 핏줄

***

‘어찌 이 몸 어미의 함자가 이자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특이한 방명이나 처음 듣습니다. 저런···. 진 형에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오.”

“아니오. 괜한 일을 입에 올렸소.”

호충은 놀란 마음을 숨기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허면 아까 진 씨를 찾은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부인이 회임한 채로 나와 헤어졌기 때문이오. 그 아이가 태어나면 나의 성을 붙여줬을 것이니···. 태어났다면 올해 열일곱이 되겠구려.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고, 부인이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

호충은 의심할 것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자가 내 생물학적 아비가 되는구나. 진양의가 여기까지 알아봤음인가!’

알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진(眞) 황가(皇家)의 인물이 내 아비였다. 그래서 내가 황태자와 닮은 것이야!’

호충은 이후 다른 것을 고민했다.

‘저 놈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중년인 곁에 편안히 앉아 있는 마교도를 죽이고 정확한 사정을 파악할지 아니면 이대로 놔둘 것인지를 고민했다.

‘녀석의 무위는 화경 초입. 상대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마교도의 무위가 상당하다는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현경급 마인으로 분한 스승들과 수시로 생사결을 치르고 있었다. 현경도 아닌 화경급 마인이라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다.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해. 마교와 이 사람의 관계를 알아내야 움직일 수 있어.’

생물학적 아비일 뿐이나, 혈육은 혈육이었다.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보낼 수가 없겠습니다. 진 형. 실례가 아니면 간단하게 술이라도 한잔 어떻습니까.”

“······.”

진휘평은 마 장로를 돌아봤다. 허락이 필요했던 탓이다. 호충은 왕 모라고 했던 마교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왕 형도 그렇소. 너무 박하게 굴지 마시고 제가 걷는 상인의 길에 도움을 좀 주십시오.”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거늘.”

호충은 마교도가 눈을 빛냈던 주제를 다시 꺼냈다.

“아직 못 다한 얘기도 많습니다. 진가의 공자들 얘기도 그렇고, 산적들의 얘기도 있지요.”

“···좋소. 너무 길지 않다면···.”

“허허허. 고맙소. 오늘 술은 제가 사리다. 거하게 대접하겠소. 유시(酉時)에 요 밑에 객잔에서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곳 숙수의 요리가 끝내준다오.”

“허허. 근방에 잘하는 집을 몰랐는데, 덕분에 알았군.”

약속을 잡은 호충은 담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봤자 마교도의 의심만 살 것이기 때문이다.

“진 형, 왕 형. 천천히 차를 즐기고 이따 다시 봅시다. 나는 차보다 술이 더 좋은가 봅니다. 하하하.”

유쾌한 얼굴로 돌아선 호충은 다루에서 멀어지며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어딘가에 아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황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범주였다.

‘어찌 내가 진(眞) 황가(皇家)의 핏줄이냔 말이다!’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현대를 살아온 호충에게 황가의 핏줄이라는 것은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옥죄는 허울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진가장의 막내라는 허울조차 얼마나 자신을 귀찮게 했던가.

‘게다가 왜 하필 마교도와 함께한단 말이오!’

분위기로 봐서는 마교도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진실한 내막은 더 알아봐야 알 터였다. 하지만 황가의 진 씨 중년인과 마교도를 생각하면 간단치 않을 것임은 확실했다. 호충은 실로 귀찮은 일에 자신이 끼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호충은 송 영감에게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서안의 흑패 조직원들에도 자신을 보고 아는 척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또한 도착하는 각 지역의 하오문 수뇌부들을 먼저 찾아 조심스럽게 전각으로 이동시킬 것도 지시했다. 마교도의 눈에 걸려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했던 객잔에도 미리 요리를 준비시켰다.

“손이 가요. 손이 가. 귀찮은 잡일에 손이 가요. ···자꾸만 손이 가······. 참 손 마이 간다. 썅.”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마음을 다해 준비하는 호충이다.

‘내가 새로운 세상에 도착해 차지한 이 몸을 쓰는 대가일 것이니···.’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고마운 이의 아비였다.

“···다시 잃지 않을 거야.”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은 호충이다. 이후 풍진 세상을 홀로 살아가며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고팠던가. 새로운 세상에 도착해 부모가 있음을 좋아했지만, 그들은 남보다 못했다. 친모 또한 한참 전에 죽어 만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아비가 생겼다.

“당신을 지킬 것이오.”

***

저녁 무렵인 유시(酉時)에 미리 객잔에 가서 준비를 마친 호충은 객잔의 입구에 나와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 진 형. 왕 형! 여기요.”

“···누가 보면 오랜 지기를 만날 줄 알겠소.”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처음 인연이 닿았는데 제가 너무 호들갑이었습니다.”

“괜찮소. 나도 그대가 싫지는 않으니 말이오.”

진휘평도 말이 많은 이 사내에게 의외의 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늘···.’

혹여 둘이 친밀해질까 싶었던 마 장로가 끼어들었다.

“어디 그리 맛있다는 숙수의 요리 맛 좀 봅시다.”

“왕 형! 내 보증하리다. 하하하. 어서 들어오시오.”

호충의 장담처럼 숙수의 요리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둘은 섬서 특유의 양 요리와 어우러진 약재의 향을 맡으며 요리를 즐겼다.

“호오.”

“섬서는 임산물이 풍부한 곳이지요. 특히 산에서 나는 약재가 많은 편이고, 산에서 기르는 양 덕분에 양 요리가 발달했지요. 이 둘이 더해진 이곳 숙수만의 특제 요리라오.”

“허허. 이 곡주 또한 대단히 맛이 좋소.”

“붉은 빛이 도는 이 술은 서안의 특산품입니다. 서안 홍주는 서안이 아니면 어디서도 맛 볼 수 없을 겁니다.”

호충은 둘의 입안에 혀처럼 굴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왕 형. 한 잔 더 받으십시오. 오늘 이 송 모가 왕 형에게 크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오.”

“허허허. 이 사람이 나 때문에 결국 이 자리를 마련했구먼.”

“물론이지요. 상행에 도움을 받아야 하니 왕 형의 조언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호충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 오히려 마교도에게 관심을 보였다.

진휘평은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요리만 즐기고 있었다.

“허허. 그런 성격이면 어딜 가서든 성공할 것이야. 오늘 처음 본 우리를 이렇게 환영하는데, 상행을 하면 얼마나 상인들의 호감을 사겠는가.”

“아이쿠. 덕담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차를 실어 나르지요.”

마 장로는 마음이 풀어져 술을 들이부었고, 호충은 쉼 없이 술병을 추가하며 입을 털었다.

“산적들은 실로 간악하지요. 적당히 통행세를 쥐어줘도 배짱을 부린다 이 말입니다.”

“보통 그렇지.”

“표국의 무사들이 상하자면 딱히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쟁자수는 어쩐단 말입니까. 산적들과 싸우다가 쟁자수를 잃으면 짐은 누가 나르겠습니까. 어찌어찌 짐을 옮겼다 쳐도 문제입니다. 나갔다하면 산적들에게 쟁자수가 죽어나가는데, 누가 그 표국에서 쟁자수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겠습니까요.”

“······.”

진휘평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세상의 얘기를 듣고 있음이다. 산적을 향한 성토는 곧 진가장의 일로 넘어갔다.

“진가장은 이제 혼란만 남았다고 하더이다.”

“···혼란?”

술이 잔뜩 들어간 마 장로는 붉은 눈으로 호충을 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시오. 왕 형. 셋째가 가주가 됐는데, 첫째와 둘째가 돌아온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 되겠습니까. 둘이 가주가 되겠다고 날뛰지 않겠습니까.”

“큭. 그렇겠지.”

대계가 실패로 돌아긴 했으나, 진가장에 혼란을 주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 집안이 보통 집안 입니까? 첫째는 모용 세가의 금지옥엽이 시집와 낳은 아들이고, 둘째는 서문 세가의 금지옥엽이 시집와서 낳은 아들이지요. 두 가문에서 그들을 구한다고 무사들을 파견했을 것이니 앞으로 볼만할 것입니다.”

“허! 맞아. 그랬겠지. 게다가 셋째는 중부 전장의 어미였지?”

“어이쿠. 역시 왕 형은 알고 계실 줄 알았지요. 넷째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쪽은 통 소식이 없어서···.”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이라고 하더군.”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호충은 불쑥 올라오는 화를 꾹 눌러야 했다.

“···앞으로 진가장은 한참 혼란하겠어. 꺼억.”

“그래도 진가장 상가의 힘이 약화된 지금이 바로 저희 같은 작은 상인이 일어설 때가 아니겠습니까.”

“자네 시기도 잘 타는구먼. 한잔 들게.”

“헤헤. 잔머리를 조금 굴릴 줄 아는 거지요.”

이후에도 호충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호충이 마시는 것은 술이 아니라 술과 비슷한 향을 풍기는 물이었다. 마교도를 앞에 두고 어찌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술을 마시지 않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호충은 주변을 면밀히 탐색했다.

‘다른 마교도는 그리 강하지 않아. 이정도 인물이 함께하고 있으니 다른 마교도는 필요도 없었겠지.’

이들과 함께 온 다른 인물들 중에도 무공을 익힌 마교도가 있었지만, 절정급 마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류급 마인이 전부였다.

‘이 녀석만 확실히 재우면···.’

호충은 마교도로 보이는 왕씨 상인을 붙잡고 술을 먹었고, 중년인에는 되도록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교도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는 인물에 더욱 마음을 놓고 술을 들이켰다.

“홍주만 마시면 지겹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정말 독한 놈으로 한 병 준비합지요.”

호충은 향만으로 술에 취한다는 독한 천일취를 시켰다.

“허허. 천일취는 상당한 가격일 것인데···.”

“왕 형과 인연을 쌓는 일인데, 가격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드십시다.”

진휘평의 입으로 들어가는 술보다 마교도의 입으로 들어가는 술이 훨씬 더 많았지만, 대접을 위한 것이라며 권하니 사양하기도 어려웠다.

“왕 형. 앞으로 상행에서 저를 보시거든 잘 좀 봐주십시오. 주변에도 잘 좀 말해주시고요.”

“허허허. 내 그리하지.”

그가 무공으로 취기를 날릴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취기가 남으면 일찍 잠에 들 것임은 분명했다. 아무리 취기를 날려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흠냐. 엇! 내가 잠이 들었던가?”

가끔 정신을 놓고 잠에 빠지던 왕 씨 마교도는 금방 고개를 들곤 했다.

‘괜찮아. 내가 원하는 때는 지금이 아니니까.’

“형님께서 먼 길을 오셨나 봅니다. 제가 피곤하신 형님을 붙들고 뭘 하는 짓인지···. 오늘만 날이 아니니 오늘은 들어가서 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예의를 잃지 않은 모습보다 진휘평에게 달라붙지 않는 모습이 믿음직했다.

“송 동생이 그리 말하니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 덕분에 즐겁게 먹고 마셨네.”

술을 마시는 동안 형과 동생으로 변한 호칭이었다.

“예. 형님. 따르는 이들이 있으니 멀리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허허허. 그래. 동생도 일찍 들어가 쉬게.”

오늘이 지나면 더 볼 일이 없는 인물이기에 마 장로는 편히 몸을 돌렸다.

“진 형도 잘 가시오.”

“오늘 즐거웠소.”

“하하. 고맙소.”

호충은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몸을 돌렸다.

‘자.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

호충은 멀리서 비틀거리며 마차에 오르는 마교도와 진휘평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틀.

“어. 취한다.”

“좀 마신 모양이오? 허허.”

둘의 대화를 듣고는 조용히 내기를 돌렸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일에 완벽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출발해야지?’

호충의 바람대로 마차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모습을 감추었고, 곧 호충이 사라지는 마차의 소리를 확인하며 뒤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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