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232)

세 형제

***

호현은 자신의 방에 침입한 상대가 대경하리라 여겼으나, 검은 복면인은 빈손을 들어 보이며 바로 투항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면인은 작은 살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께 전할 것이 있어서 이리 왔습니다. 외부에 알릴 수 없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복면인은 자신의 얼굴을 감추던 복면을 내렸다.

“너는···. 셋째의 무사로구나.”

“예. 공자님.”

예전에 셋째 호성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지도무사였다.

“도련님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어 서찰을 가져왔습니다.”

“훗. 너는 왜 셋째를 가주라고 부르지 않는가?”

호성이 가주가 되었기에 진가장의 무사라면 모두가 호성을 가주로 칭해야 옳았다.

“···지금 호성 공자님이 진가장의 가주 자리에 앉아계시나, 진실한 가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가주가 아니다?”

“서찰에 모든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무사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서찰을 꺼냈고, 호현은 미심쩍은 눈길을 주면서 검을 내렸다.

“우선 읽어보겠다.”

눈앞의 무사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호성의 서찰은 처음부터 바짝 수그리고 있었다.

[호현 형님. 형님께서 살아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맨발로 뛰쳐나가 형님을 맞이하고 싶었으나, 대부인 마님께서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알고 있었기에 애써 참았습니다.]

‘이 녀석이 무슨 수작으로···.’

서찰을 보낸 이유도 분명 나와 있을 것이기에 마저 서찰을 읽었다.

[마교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 돌아오신 형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제가 무척이나 민망하지만, 시기가 급하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진가장은 마교의 위협보다 내부의 일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

이어진 서찰의 내용은 호현의 눈을 의심케 했다.

[중부전장의 마수가 진가장을 향해 뻗어지고 있습니다.]

중부전장의 일은 이미 짐작한 바였다. 하지만 단어 선정이 이상했다.

‘중부전장의 진출을 마수라 표현한다고? 그것도 호성이가?’

셋째 호성의 외가가 중부전장이었고, 진가장은 중부전장에서 받은 금전적인 지원으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중부전장 덕분에 진가장 내에서의 호성의 위치가 공고해지지 않았겠는가.

호현은 서찰을 끝까지 읽고 호성이 왜 서찰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진가장에 새로 들인 무사들은 모조리 중부전장에서 돈으로 사들인 무사들이며, 이들은 제 어미의 명만 듣고 움직입니다. 두 분 형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에 앞으로 무사들을 증원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지요. 저는 진가장의 중부전장에 넘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습니다. 하여······.]

호현은 지금 호성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가주로 올라선 자신의 아들까지 뒷방으로 밀어내며 진가장을 차지하려 달려든다는 뜻이었다. 호성은 이름만 가주인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너도 진가의 피가 흐르는 구나.’

중부전장을 등에 업은 셋째 어미 방자연은 호성이 진가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호충도 간과한 부분이다. 둘을 살려 보내면 진가장 내부에 큰 소란이 일 것으로 짐작했으나, 셋째 어미인 방자연의 중부전장과 호성의 유약한 심성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호충이 나중에 알게 되면 배가 아파서 드러누울 일이었다.

호현은 호성의 서찰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을 직시했다. 지금부터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호성이 아니라 셋째 어미였다.

‘중부전장의 늙은이가 딸을 장기 말로 내세웠어.’

호성은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셋째 어미 방자연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욕심이 과하면 독이 되는 게지.”

서찰을 가져온 무사가 호현의 혼잣말에 답했다.

“진가장을 되찾아야 합니다.”

호현은 무사에게 서찰에서 호성이 밝히지 않은 일을 물었다.

“지금 호성이 주변에 믿을 수 있는 무사들은 얼마나 되는가?”

“저를 포함해 기존 진가장의 무사들이 이십입니다.”

“고작 이십이라고? 어째서!”

내부에 기존 진가장의 무사들이 상당히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적어도 너무 적었다.

“그렇다면 이삼을 포함한 가주님의 호위는 남아 있는가?”

“가주님의 호위 중 두 분은 마교가 침입했던 당일 명을 달리하셨고···.”

“뭐라! 그럼 누가 남았는가?”

“이삼 호위님과 미(嵋) 호위님이 남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연락해 이리로 오라고 해주게. 당장 봐야겠어.”

“죄송합니다. 남은 가주님의 호위를 포함해 무사들 대부분이 외부로 나가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셋째 공자님이 아닌 마님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호현은 잠시 지금까지 세운 계획을 검토하다가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았다. 틀어진 계획을 다시 짜 맞추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명분을 만드는데 무사들은 필요 없겠지. 나는 내일 무림의 인사들을 모으겠다. 너는 믿을 수 있는 무사들을 모아 호성이를 데리고 대전으로 나와야할 것이다.”

“예. 공자님. 맡겨주십시오.”

“······.”

호현은 한 가지 확인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너는 서찰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

“···예.”

“그렇다면 호성이 말한 공동 가주에 대해 어찌 생각하지?”

서찰의 말미에는 호성이 세 형제가 동등하게 가주를 맡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는 호현과 호중이 바라던 일이었다. 계획을 틀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전 가주님의 아드님 가운데 가주를 맡기에 부족한 분은 없으···.”

부족한 이가 없다 하려던 무사는 넷째 호충을 떠올리며 말을 줄였다. 호충은 자신이 검을 가르친 호성을 눈앞에서 두들겨 팼고, 무사들에게 지독할 정도로 손을 쓴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충에게 진가장의 가주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호현은 그의 의중을 읽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넷째는 빼고.”

“···부족한 공자님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진가장의 혼란기입니다. 하나 보다는 셋이 낫겠지요.”

‘진가장의 혼란을 먼저 염려할 줄 아는 이라면 중부전장의 간자가 아닐 것이야.’

지금 눈앞의 무사가 간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기에 물은 것이다. 간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겼으니 다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회유였다.

“마지막으로 묻지. 그대는 호성이를 얼마나 따르는가. 목숨을 바칠 정도인가.”

“······.”

지금은 하나의 손이라도 더 필요할 때였다.

“나와 둘째, 셋째가 공동으로 가주직을 맡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임시로 결정한 방식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는 없는 일. 언젠가는 진가장의 가주를 맡을 하나만 남을 것이다. 너는 호성이가 혼자 가주직을 맡을 수 있다고 보는가? 이미 가주직을 수행하는 호성을 보았으니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제가 함부로 입에 올릴 사안이 아닙니다.”

“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나를 찾아와라.”

“······.”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무사 눈동자는 이미 답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진가장은 강한 구심점이 필요하다. 당장은 혼란을 잠재워야하기에 손을 잡지만, 언제든 등을 돌릴 형제들이지. 나는 그대와 같은 유능한 인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 가서 그대가 통솔하는 무사들에게도 나의 생각을 전해다오. 나는 진가장의 무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꼴을 볼 수 없다.”

“······꼭 전하겠습니다. 공자님.”

호현은 무사가 이미 자신의 사람이 된 것처럼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맙네. 그대를 잊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공자님.”

몸을 돌려 창으로 빠져나가던 무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강여홍 무사가 진가의 무사들을 지도하는 날에 나도 곁에 있을 것이네.”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셨던가···.’

감격한 강여홍은 깊이 허리를 숙여 포권하고 창을 통해 호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호현은 창을 닫고 침상으로 돌아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한참이나 고민했기 때문이다.

‘저딴 놈의 이름까지 전부 기억해야 하다니. 그저 소모품으로 사라질 무사의 하나일 뿐이거늘···.’

진가장의 모든 무사가 같았다. 무사는 쓰고 버려질 소모품에 불과했고, 동생들은 밝고 올라설 디딤돌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를 것이다. 모두 내 손아귀에 넣고 말 것이다.”

호현은 진가장을 넘어선 중원을 꿈꾸고 있었다.

.

.

.

다음날 날이 밝고 호현은 호중과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가장 내에 머무르는 맹의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오늘 진가장의 대전에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 알려야하기 때문이다. 중부전장 무사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두 맹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야 했지만, 각자의 가문의 무사들이 있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협의맹 소속인 모용가와 서문가에서 온 무사들이 급하게 움직였다.

“허허. 중대한 일이라···. 아직 우리 정무맹은 마교의 꼬리를 찾지 못했는데, 협의맹은 찾았단 말인가.”

정무맹의 인사들은 혹시 협의맹이 성과를 낸 것인가 싶어 얼른 걸음을 옮겼고, 협의맹도 다르지 않았다.

“정무맹의 늙은이들이 발은 빠른 모양이야. 그래도 진가장에 먼저 알린 모양이군.”

두 맹의 인사들이 진가장의 대전으로 향하자 중부전장의 무사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서 마님께 고해야한다.”

“예!”

방자연도 두 맹의 인사들이 진가장에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말릴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이 벌어졌는데 대체 가주는 어디 있느냐!”

가주가 있어야할 곳에 가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종은 방자연의 무시무시한 목소리에 얼른 답했다.

“가, 가주께선 아까 무사들과 잠시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님.”

“주변? 밖에 어디로!”

“그것까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짝! 짝!

허리를 숙인 시종의 고개가 획획 돌아갔다.

“분명 가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라하지 않았더냐!”

“사, 살려주십시오. 마님.”

“뭣들 하느냐! 어서 가주를 찾아와라!”

“예! 마님.”

***

방자연이 호성을 찾느라 난리일 때 이미 호성은 대전에서 호현과 호중을 만나고 있었다.

“형님들. 이제야 이 동생이 인사를 올립니다.”

호현은 호성의 어깨를 두드리기만 했고, 호중은 입을 열었다.

“형님께 네 결정을 들었다. 잠시라도 가주를 맡아서 그런지 나름 영리한 방법을 선택했더구나.”

“덕담에 감사합니다. 둘째 형님.”

호성은 웃는 낯으로 형들을 대하며 다짐했다.

‘지금은 중부전장의 힘을 줄여야하기에 손을 잡지만, 대의명분은 내게 있음이다.’

가주가 직접 자신을 지목해 자리를 물려줬기 때문이다. 호성은 가주직을 넘기기 위해 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은 셋이 그 위에 오르더라도 종내에는 자신이 차지할 각오였다.

하지만 각오만으로 모든 일이 풀려간다면, 안 될 일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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