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32)

동상삼몽

***

“이제 두 맹의 주요 인사들이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다.”

“셋이 함께 나서는 것이 보기 좋을듯 합니다.”

“호중이 말이 맞다. 우선 호성이너는 우리 형제가 공동으로 진가장을 이끌어 갈 것을 밝히고 나머지는···.”

“저와 형님이 번갈아 가며 공표해야 할 것입니다.”

둘은 호성의 결정을 듣고 새로이 계획을 세운 다음이었다.

“네가 먼저 나서겠느냐.”

“그러지요.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나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지요.”

호성은 두 형의 대화를 들어도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

호성은 자신이 모르는 일도 오늘 일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지만, 두 형은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호성이 묻기도 전에 호현은 셋을 대전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여러 무림의 선배님들을 뵈옵니다. 무림말학 진호현이 인사 올립니다.”

“진호중입니다.”

“···진호성입니다.”

셋은 자리한 두 맹의 인사들에게 일일이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고, 호성이 얼른 나섰다.

‘그래도 내가 가주다. 형님들이 아니라 내가 가주야.’

“아버님을 이어 진가장의 가주를 맡아온 진호성입니다. 저는 마교의 손아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형제를 맞이하여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호성은 주변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무림의 동도들께 고합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내려주신 가주의 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형님이 이렇게 살아 돌아오시었고, 진가장은 마교의 침입까지 허락한 혼란한 지경입니다. 하여 임시로 공동 가주직을 통해 진가장을 이끌고자합니다. 세 형제가 함께 진가장을 이끌어 간다면 서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애 깊은 형제로다. 어찌 가문의 수장인 가주직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말씀대로 형제의 우애가 깊어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두 분 형님은 앞으로 저를 도와 진가장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호성은 그 와중에도 자신이 중심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호현은 차가운 미소로 호성의 답을 듣고 있었다.

‘그래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련한 동생아.’

호성의 말에 아예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호중이 나섰다.

“겨우 이런 일로 무림의 중요한 일을 하시는 선배님들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여러 선배님들께 말씀드릴 중대한 일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호성을 지나쳐 호중에게로 쏠렸다.

“저는 일전에 산서(山西)의 홍동(哄洞)에서 마교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마교의 소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홍동에서 마교의 흔적을 찾았고, 포진한 마교의 무사들을 피해 어제 진가장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홍동으로 가서 마교의 잔당을 처리해야 합니다.”

“홍동에 마교도가 있었단 말인가!”

“진가장에서처럼 자네들을 따로 노린 줄 알았거늘···.”

“저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번엔 호현이었다.

“홍동뿐이 아닙니다. 가주님의 명으로 분양(汾陽)에서 마교도를 찾던 저도 마교의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침 저를 도와주신 은거 고수가 아니었다면, 저는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산서(山西)의 홍동(哄洞)과 분양(汾陽)에서 저희를 쫓아온 마교도는 도합 일 백인 이상이었고, 절정급 마인들도 있었습니다.”

“저, 절정급 마인들이!”

절정 마인들의 숫자를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마교도의 숫자는 거의 확실했다.

“지금 정무맹과 협의맹은 힘을 더해 마교도를 멸해야 할 줄로 압니다. 중원 무림의 평화를 위해 저희가 나서야 합니다.”

호중이 곁에서 호현을 거들었다.

“저희가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마교도들은 진가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꼬리를 감추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당장 무인들을 파견해 쫓아야 합니다.”

호중은 홍동(哄洞)에 힘들게 세운 무관과 남은 무사들이 걱정이었다. 호현은 무림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관에도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절정급 마교도를 상대하자면 금의위의 손을 빌려야 합니다.”

“!”

“관이라니···.”

무림의 일에 관을 끌어들이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마교는!”

호현은 목소리를 높였다.

“마교는 중원 무림의 적이지만, 황궁의 대적이기도 합니다. 마교의 흔적을 발견하고도 관에 알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문제가 될 것입니다.”

두 맹의 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절정급 마인들이 우리 맹의 중요한 분들을 헤한다면 저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정무맹과 협의맹의 선배님들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진 모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진호현은 누가 봐도 정의감이 가득하고 협의가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진가주가 자식 농사는 정말 잘 지었군.”

“원로원에 갔어도 마음은 편하겠어.”

“자식들이 저리 잘 컸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보다 당장 두 맹의 회합을 열어야겠소. 마교가 또 꼬리를 감추기 전에 멸해야 할 것이오.”

어느새 뒤로 빠진 호현과 호성이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서에 진출한 진가의 무관을 지키려고 정무맹과 협의맹을 이용하는 것이다.

호성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진가장의 가주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내가 주인공이 될 줄 알았는데···.’

마교의 손아귀에서 살아났으니 응당 마교의 일을 떠올려야 했음이다. 가주직에 눈이 멀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것이다.

.

.

.

정무맹과 협의맹이 급하게 회합을 열었고, 그 자리에는 세 형제가 함께하고 있었다.

“화산의 무성입니다. 우선 마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무사히 진가장에 돌아온 두 분께 큰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호현과 호성이 화산의 도인에게 미소를 보이며 포권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헌데 진가장의 형제는 넷이 아닙니까. 어째서 진가장의 넷째인 진호충 공자는 공동 가주직에서 제외한 것이오?”

갑작스럽게 나온 질문에 셋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으시니 응당 넷째 공자도 공동 가주직을 맡아야 할 것입니다.”

호현은 별일 아니라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셋이 넷이 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없으니 진가장의 막내인 호충도 저희와 함께 공동 가주직을 맡을 것입니다. 넷째가 멀리 떨어져 있어 미리 상의되지 않아 제외한 것입니다.”

어차피 집안의 천덕꾸러기인 녀석이라 경계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본도는 진가장으로 향하던 중에 진호충 공자를 마주하였소. 참으로 영민하고 형제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하더이다.”

그날 호충의 검끝에서 보았던 매화가 아직도 아련히 심상에 남아있었다.

“!”

“나는 진 공자에게 두 형제가 마교도의 마수에서 빠져나와 진가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소. 하여 화산에 기별하여 분양과 홍동에 제자들을 파견해 달라 요청하였소.”

“!!”

“허!”

“맹에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는가!”

화산은 회합이 진행되기도 전에 움직인 것이다. 두 형제를 구한 당사자가 전했으니 얼마나 소식이 빨랐겠는가.

“진 공자는 혹여 두 형제의 일이 외부에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내게 단단히 입을 다물어줄 것을 부탁하였소. 이제 두 공자가 진가장에 도착했으니 말하는 것이외다.”

“우리도 제자들을 파견하겠소!”

“이쪽도 마찬가지요!”

정무맹과 협의맹의 인사들이 저마다 입을 열어 소리쳤다.

무성은 배에 힘을 주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구심점이 필요한 일이오. 저마다 무사를 파견하면 명령이 일원화되지 않아 오히려 일이 어려워질 수 있소!”

무성은 가장 먼저 제자들을 파견했기에 어깨가 두 치는 솟아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분양과 홍동의 마교도를 파악하고 계획을 세울 것이니 두 맹에서 보낸 인원을 능히 통솔할 수 있을 것이오.”

“처음 마교의 흔적을 발견한 것도 화산파가 아니었소. 화산파가 이번 마교의 멸에 수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성 도장의 말대로 가장 먼저 도착했다면 가장 먼저 마교도를 파악했을 것이오. 이번만큼은 화산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오.”

협의맹의 인사들까지 무성의 말에 동조했다.

“그럼 분양과 홍동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진가장의 공자님도 빠질 수 없겠소.”

“!”

“!”

호현과 호중이 이미 분양과 홍동에서 마교도의 꼬리를 찾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진가장 내부의 일은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니, 기쁘게 따르겠습니다.”

“진가장을 유린한 마교도를 가만히 둘 수 없습니다.”

호현과 호중은 무림인들 앞에서 호기롭게 소리쳤다.

호성도 빠질 수 없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두 분 형님을 해치려한 마교도를 발본색원하겠습니다!”

세 형제는 무림에서 공을 세워 가주직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내가 마교도를 가장 많이 잡을 것이다!’

‘이번엔 형님께 지지 않을 것이오!’

‘···숫자로 밀어버릴 것이다.’

세 형제의 동상삼몽이었다.

***

번쩍 눈을 뜬 호충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회복완료.’

호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어서 움직여. 아직 갈 길이 멀다.”

“예!”

진휘평과 함께한 무리가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호충은 방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살폈다.

진휘평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일행을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

진휘평의 발걸음이 순간 가벼워졌고, 얼굴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자주 뵙지 못할 것이나, 마음만은 항상 아버지를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진휘평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호충은 마교도 일행이 사라지고 나서야 눈을 부비며 방을 나섰다. 아버지가 머물던 방을 치우려 점소이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음.”

“일어나셨습니까. 손님.”

“덕분에 잘 쉬었다. 방이 좋더구나.”

“제가 가장 좋은 방으로다가 드렸습지요.”

“헌데 난 옆에 방이 더 좋아 보이던데?”

“······.”

진휘평이 더 좋은 방에 머무른 것은 사실이었기에 점소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보게. 소형제. 내가 저 방에 머물진 못하겠지만, 구경은 해볼 수 있을까? 저 방을 누군가 차지해서 못 내줬다는 건 나도 이해하는 바일세.”

구리동전 몇 개가 점소이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헤헤. 구경이야 뭐가 어렵겠습니까요.”

호충은 어렵지 않게 진휘평이 머물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인 것처럼 침상에 드러누웠다.

“허허. 침상이 이리 부드럽다니···.”

“···방은 조금 이따 치울깝쇼?”

“다른 방부터 치우고 오시게. 여긴 침구부터가 고급이야.”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나중에 또 찾아주시면 꼭 이 방을 드립지요.”

“허허허. 자네 정말 대성하겠어.”

호충은 점소이가 사라진 다음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아버지가 어디에 서찰을 숨겼을까.’

호충의 시야는 어렵지 않게 기이한 흔적을 찾아냈다. 날카로운 칼로 낸 흔적이 있었다.

‘저기까지 오르시느라 고생 좀 했겠어.’

천장 대들보에 새겨진 작은 칼자국은 그 위에 뭔가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타악.

호충의 신형은 가볍게 위로 솟구쳤고, 대들보에 고이 놓인 서찰을 잡아 내려왔다.

서찰을 품에 넣은 호충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나왔다.

“다음엔 꼭 이 방에 머물러야겠군.”

다른 방을 청소하는 점소이에게 자신도 짐을 정리 하겠다 이르고는 금방 객잔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호충은 객잔 밖으로 나와서 어제와 같은 마교도의 시선을 느꼈다.

‘가만히 있어도 의심한다면 더욱 평범하게 보여야겠지.’

호충은 마교도의 시선을 보지 못한 것처럼 상회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한 상회에 발을 들이밀었다.

“계시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슨 차를 찾으십니까.”

호충이 들어간 상회는 찻잎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상회였다.

“신강에서 유명한 차를 좀 사려고 왔습니다. 내가 차를 유통하는 상인인지라···.”

“하하. 잘 오셨습니다. 저희 상회의 찻잎은 품질을 알아주기에 관에도 납품되고 있습지요.”

“오오! 관까지? 그 차의 이름이 무엇이오?”

“유향차(乳香茶)라 하지요.”

“뭣이라 하시었소? 유향차(乳香茶)?”

향기가 나는 차라는 뜻은 알겠는데, 유(乳)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상인은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유향차(乳香茶)는 요정의 입술로 따는 차라오.”

“요정의 입술이라니···.”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아리따운 처녀들이 일절 손을 쓰지 않고 입술로만 찻잎을 따고 있지요.”

“커흡.”

“또한 딴 찻잎은 자기 가슴에 있는 작은 바구니에 넣지요. 커다란 살덩어리 사이에 놓인 앙증맞은 바구니는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진 찻잎을 받아냅니다.”

상인은 큰 과일을 들고 있는 것처럼 손짓하며 맛깔나게 설명을 곁들였다.

“······와.”

호충은 절로 그 광경이 연상됐다.

“그렇게 채취한 찻잎은 여인의 체온으로 첫 건조를 시키니, 어찌 유향(乳香)이 베지 않을 수 있겠소. 유향차는 생기를 북돋아주는 향과 맛이 나고 질병을 치료하는 효과까지 있다하지요.”

“······있는 것을 다 주시오.”

“허허허. 최대한 물량을 확보해 보리다.”

호충은 계획에도 없던 지출을 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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