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재회
***
“끄응. 그 집 장사 잘하네.”
호충의 등에는 찻잎이 가득 든 등짐이 실려 있었다.
상인의 언변에 홀랑 넘어가 상당한 금자를 내준 다음에서야 아차 싶었지만, 찻잎은 자신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돈은 되겠어.”
이번에 사들인 차는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객잔과 기루에서 판매하면 될 일이다.
‘특별한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물건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마련이지.’
따라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여인들을 일꾼으로 모집해 차를 따고 거기다 유향차라 이름을 붙이면 하오문도 유향차의 생산자가 될 수 있었다.
“좋았어! 한몫 잡는 거야!”
무거운 등짐을 지고 걸어가며 하는 소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들릴 지경이었다.
누군가 그런 호충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마주한 사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인은 아니군.]
[기억해둬야겠어. 그래야 나중에 더 벗겨 먹지 않겠나.]
호충은 자신을 향하던 주변의 눈빛이 조금씩 드물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믿을만하냐?’
찻잎을 산 것은 충동적이었지만, 그 덕분에 의심 어린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호충은 신강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진짜 바글바글 하구만.’
일류 무인들로 보이는 마인들이 수시로 지나다녔다. 문제는 이들이 검조차 패용하지 않은 일꾼 복장을 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누가 봐도 무인으로 보이지 않을 터였다.
‘이놈들이 중원에 잠입한다 해도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
호충은 상회를 기웃거리며 신강을 돌았고, 적당한 시간이 되자 신강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머물면 또 의심하겠지.’
이미 확인할 것은 대부분 확인했다. 신강 주변을 돌아본 것만으로 만족이다. 거대한 전각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여기며 아쉬움을 달랬다.
‘오늘은 살려주마. 하지만 나중에 나를 마주하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호충은 마교의 전각이 있던 방향을 노려보며 그 안에 있을 마교의 교주를 떠올렸다. 교주가 얼마나 높은 무공을 쌓았는지 모르지만, 두렵지 않았다. 교주뿐 아니라 무림의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네 놈들이 아무리 수련을 해봤자···.’
심상 대련을 통해 매일 죽음에 가까운 수련을 이어가는 호충이다. 이것이 자신보다 높은 경지를 쌓은 고수가 두렵지 않은 이유였다.
‘다음엔 꼭 얼굴을 보겠다. 교주.’
***
호충이 신강을 벗어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품에 있던 서찰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바스락.
[호충아. 호충아. 내 아들 호충아.]
서찰 속엔 호충을 향한 진휘평의 부정(父情)이 가득 들어 있었다.
“······.”
호충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내가 아비로 모신다지 않았습니까. 왜 자꾸 부르십니까.’
[먼 길을 따라오느라 얼마나 고됐겠느냐. 아비는 편히 마차로 가면서 어린 아들을 고생시키고 있으니, 아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지에서 홀로 너를 키워낸 네 어미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지아비 없는 그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무도한 놈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나도 살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너는 또 어떠했느냐. 사람 같지도 않은 진가의 자식들이 너를 괴롭혔다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훗날 녀석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하십시오. 적당히···.’
안타까운 감정도 잠깐이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분노와 한탄에 호충은 서찰을 대충 눈으로 훑으며 지나갔다. 서찰의 핵심을 찾기 위함이었다.
‘본론이 참 멀기도 하네.’
[···역천을 시작하자면, 우선 내가 외부로 나가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던 대신들과 장군들은 나를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한 일. 역천에 실패하면 구족(九族)을 멸하는 형벌을 받는데 함부로 믿으면 병신이지.’
말이 쉬워 구족이지, 삼족(三族)만 해도 아버지와 본인, 자식을 포함하기에 삼촌과 사촌에 조카까지 모조리 목이 잘려 나간다는 뜻이었다. 구족의 단위를 보자면 직계친으로 증조, 조, 부, 본인, 자, 손자, 증손, 현손까지를 이르고 방계친으로는 고조의 사(四)대 손이 되는 형제,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를 포함하는 동종의 친족 전체를 말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보통 천 단위를 넘어간다. 한 놈이 역천을 꿈꿀 수 없으니, 수십 또는 수백의 인원이 이 형벌에 처해 진다면 만 단위가 훌쩍 넘어가는 사람들의 목이 나뒹굴게 되는 것이다.
형벌이 가혹한 것은 역모에 가담한 이의 친척들이 살아남아 보복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황권의 강대함을 자랑해 경고를 남기기 위함이었다.
[혹여 대계가 실패하여도 너는 걱정하지 마라. 네 존재는 오직 나만 알고 있으니, 네게 화가 미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호충은 숨이 턱 막혔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도 자식만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 남경으로 향할지 알 수 없으나, 마교가 있다는 신강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한 고생 하지 말고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지난번 네게 마교를 맡기려고 했던 말들은 모두 잊어라. 마교의 무인들은 황궁의 금의위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오늘 내가 본 절정급 마인이 몇인 줄이나 아십니까?’
[호충아. 아비를 기다리거라. 아비가 황좌를 차지하고 너를 찾아갈 것이다. 부디 건강하게만 살아 있어다오. 호충아.]
호충은 서찰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걱정과 당부들을 읽고 다시 품에 넣었다.
“하여간 걱정도 태산이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하면서도 호충은 서찰을 단단히 챙기고 가슴을 두드리며 서찰이 잘 있나 확인했다.
‘두고 보세요. 저의 하오문을 전 중원에 퍼트릴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황제로 옹립할 것이오!’
***
호충은 신강에서 아래로 향했다. 다시 서안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관도를 타고 있지만, 저녁에 산길로 접어들면 경공으로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었다. 모두가 사용하는 관도라 부지기수로 사람들을 마주하는데, 이번엔 조금 독특했다.
“엉?”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이들이었다. 얼마나 강행군을 펼쳤는지 그들의 여정을 함께하지 않았어도 알 정도였다.
‘뭐가 그리 급하기에···.’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근처까지 다가와서야 호충은 이들의 소속을 알 수 있었다.
“커흡.”
호충은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문질렀다.
‘제기랄! 저들이 왜 여길 와?’
우드득.
호충은 역용으로 사용하던 얼굴을 순식간에 송 영감의 얼굴로 바꾸었다. 가장 익숙한 얼굴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앞을 제대로 주시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잖아!’
방금까지 호충은 화산의 접객각주인 현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진! 좀 천천히 가세.”
“현인. 화산이 공을 쌓을 기회네! 늦었다가는 다른 방파에 공을 빼앗기고 말 것이야!”
화산의 현진과 현인을 필두로 이대 제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이 호충의 얼굴을 확인했다면 단박에 알아봤을 것이다.
‘···썩을. 그런데 왜 이렇게 반갑냐.’
호충은 하산 이후 다시 만나는 현진과 현인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는 그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허허. 다들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
“······.”
현진과 현인 일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호충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호충은 송 영감이 화산의 제자들과 마주한 일이 없었기에 당당하게 나선 것이다.
“기이하군. 현인.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뭐가 말인가?”
“모르겠나? 저 노인이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단 말이네.”
“···사람이 말을 걸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무공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노인이야. 그런데 우리는 모두 검을 패용하고 있지. 평범한 노인이라면 우리를 피해갔어야 옳은 일이네.”
“···그도 그렇군.”
“게다가 우리 복장은 평범해.”
이들은 화산파의 도복이 아닌 평범한 복색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우리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단 말이네.”
“듣다 보니 정말 의심스럽군. 나이도 적지 않은 상인이 바쁘게 길을 가는 무림인을 불러 세웠다?”
현인의 말을 들은 이대 제자들은 슬금슬금 호충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진과 현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호충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
호충은 반가운 마음에 괜히 말을 걸었음을 후회하고 있었다.
‘멍청이. 무림인들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상인이 어디 있어!’
“제, 제가 무림인들을 몰라뵙고 그만···.”
“아니. 그대는 우리가 대화하는 중에 일말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다 안다는 눈치였어.”
어쭙잖은 변명에 속아 넘어갈 현진이 아니었다.
‘이걸 어쩐다.’
호충은 허겁지겁 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가 뭐라도 팔아보려고 말을 걸었는데, 무림인들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을 다 드릴 터이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
‘제발 속아 넘어가자. 응?’
호충은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현진. 노인은 몰랐다지 않은가.”
“···아니야. 모르는 눈빛이 아니었어.”
“그럼 대체 저자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잊었나?”
이들이 향하는 곳은 마교가 꼬리를 드러냈다는 지역이었다.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믿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저 상인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할 것이야.”
“뭣들 하느냐. 어서 저자의 짐을 뒤져보아라.”
이대 제자들이 호충을 향해 다가왔다.
호충은 자신의 품에 있는 아버지의 서찰을 떠올렸다. 그리고 화산의 보은패도 품에 있었다.
‘이들이 화산의 보은패를 보면···.’
“···다들 손을 거두시게. 헐헐헐.”
호충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진과 현인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기운을 슬쩍 흘리며 무공을 드러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당당하게 입을 여는 호충의 모습은 일대종사의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무림 동도를 만난 기쁨에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야. 숨기려 했건만 어쩔 수 없군. 그대들이 목이 탈까 싶어 차라도 한 잔 내주려 했거늘···.”
“모두 검을 들어라!”
챙. 챙. 챙.
호충에게 다가오던 화산의 이대 제자들이 뒤로 물러서며 검을 뽑았다.
현인도 호충에게 검을 뽑아 겨누고 물었다.
“넌 누구냐!”
“중원 무림에 하잘것없는 무림인 중 하나일세. 그대는 언제까지 하대할 작정인가. 내 나이가 있거늘···.”
현진도 현인의 옆으로 와서 검을 겨누고 물었다.
“사문을 밝히시오. 노인장.”
“사문? 사문이 있다면 내가 이리 혼자 돌아다니겠는가. 게다가 일인전승의 가문이라 남은 것은 나 혼자라네.”
“······.”
“······.”
거둘 수 없는 의심이 현진과 현인의 눈에 가득했다.
하지만 호충은 이미 힘을 드러내기로 작정했기에 여유가 있었다. 의심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화산의 제자들을 두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내가 신강에서 좋은 차를 샀다네. 급히 길을 가는 것은 알겠으나, 잠시 목을 축일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호충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차를 끓이기 위함이었다.
“···멈추시오. 더 움직이면 우리의 검도 움직일 것이오.”
“허허허. 아직 배움도 부족해 보이거늘···.”
호충은 외부로 드러내던 내공을 배로 증가시켰다.
후우웅.
“으읍!”
“끅!”
이대 제자들은 호충에게서 전해지는 내공의 압력을 견디기 어려웠다.
“큭. 너희는 뒤로 물러서라!”
이대 제자들이 뒤로 물러선 가운데 호충이 다시 현진과 현인에게 내공을 더욱 집중하며 말했다.
“무림의 동도끼리 살수를 펼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마음먹었다면 그대들의 목이 땅에 떨어지기까지 한 식경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네.”
현진의 검 끝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고수. 그것도 우리를 한참 넘어선 경지의 고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