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영감의 무위
***
송 영감은 전각 뒤뜰에 나와 있다가 사중환과 왕호를 맞이했다.
“허허허. 도련님의 의제가 이제야 돌아왔구려. 참으로 반갑습니다.”
“별고 없으셨지요? 헤헤.”
“늙은이가 별일이야 있었겠소. 매일 저승으로 한 발짝 다가갈 뿐이지요.”
“검은 좀 느셨습니까?”
“검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아직 언덕도 제대로 오르지 못해 해매고 있지요. 도련님이 그토록 열심히 수련을 도와주셨는데, 느리기만 합니다.”
“늦은 나이에 무공을 익히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요.”
왕호는 아무리 살펴도 송 영감이 고수라고 느껴지지 않았고, 눈치를 보던 사중환이 나섰다.
“인사도 드릴 겸 왕호가 어르신의 무공을 보고 싶다하여 데려왔습니다. 같이 어울려 보시겠습니까?”
“호오. 안 그래도 요즘 적적했는데, 영창 대협이 재미난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그려.”
송 영감은 짧은 사중환의 답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들끼리 붙지 못하니 자신을 끼워넣은 것이다.
“에이. 그러지 마세요. 제가 익힌 무공은 너무 강대하여 자칫 어르신의 뼈마디가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허허허.”
왕호의 말에도 웃기만 하던 송 영감은 뜰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었다.
“요즘 새로 익힌 것을 펼쳐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구려.”
“···어르신. 정말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럼 적당히 상대해주면 되지 않겠소.”
“하오문에는 살살이라는 단어도 없다던데······.”
왕호는 송 영감을 말리라는 듯이 사중환을 쳐다봤지만, 사중환은 웃기만할 뿐 말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르신 다치면 다 네 탓이야.”
“내가 책임지겠네.”
“분명 책임진다고 했어. 대형이 뭐라 하시면 난 모른다고 할 거야.”
왕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세 수는 양보하겠습니다. 편히 오십시오.”
“허허허. 선수까지 양보하면 답이 없을 터인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왕호가 대월천룡권의 단단한 기수식을 보일 때 송 영감은 느긋하게 다가와 목검을 들어 올렸고 또 느긋하게 아래로 휘둘렀다.
‘···저걸 피해, 막어?’
내공으로 두른 팔을 들어 올려 막기로 결정한 왕호는 자신의 단단한 팔에 목검이 막히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따악!
“끄악!”
왕호는 얼른 목검에 맞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송 영감의 목검이 자신의 팔을 통과한 것처럼 지나간 것이다.
“뭐, 뭐야?”
“대련은 실전처럼. 의제는 도련님의 말씀을 잊으셨소?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합니까?”
송 영감의 목검은 자비 없이 다가왔다.
후웅.
왕호는 좌에서 우로 휘둘러져 들어오는 목검의 궤적을 보며 바짝 정신을 차렸다.
‘잠시 방심했을 뿐.’
이번엔 확실하게 막아낼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몸에 내공을 돌리며 방비를 철저하게 한 것이다.
퍼억.
“꺽.”
목검에 맞은 곳은 우측이 아니라 좌측이었다. 우측으로 날아오던 목검이 어째서 좌측으로 돌아와 몸통을 가격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허. 도련님이 의제의 성취를 보시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소. 정신 차리시오.”
왕호는 송 영감의 기이한 목검 궤적에 하나의 검식도 막지 못하고 얻어터졌다.
“어깨, 무릎, 허리.”
딱, 투둑, 퍼벅.
“으악.” “윽.” “꾸엑.”
하나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 목검의 궤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려줘도 못 막으면 어쩌자는 거요? 세 수의 양보는 벌써 끝나지 않았소. 어서 공격을 해보란 말이오.”
“자, 잠시만···.”
“생사대적이 봐주면서 상대한다고 하던가!”
예전 호충에게 많이 듣던 말이었다. 왕호는 다시 목검을 드는 송 영감을 보고 얼른 소리쳤다.
“져, 졌습니다! 어르신!”
후앙.
왕호의 눈앞에 목검의 검 끝이 보였다. 멀리 있던 검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던 것이다.
“어허. 겨우 이렇게 끝내면 안 되거늘.”
송 영감은 무척 아쉬운 얼굴로 검을 내렸다.
“제가 눈이 어두워 어르신의 경지도 몰라봤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영창 대협이 상대해주시겠소? 얼마 전에 깨우친 터라 검식에 숙달이 필요하다오.”
사중환은 자신에게 돌아서는 송 영감의 모습을 보고 대경하며 말했다.
“저, 저는 하오문의 일이 바빠서 가봐야 합니다. 어르신.”
본래 사중환과 옥비연은 송 영감의 무위를 알고 있었다. 전에 호충과 함께할 때 대련을 통해 몸으로 체감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의 기이한 검공은 처음 보는 참이었다.
‘저 목검을 무슨 수로 막아?’
“급한 일은 마무리 한 것으로 압니다만?”
사중환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왕호 녀석이 감숙성을 재패하고 각 지역의 패주들을 데려왔습니다. 녀석들을 교육하러 가야 합니다. 향후 훈련 계획도 점검해야 하고요.”
“겨우 저 정도 경지로 감숙성을 재패했단 말입니까? 어허.”
송 영감의 관심을 다시 왕호에게 돌린 사중환은 얼른 작별을 고했다.
“왕호는 어르신께 맡겨둘 터이니 소일삼아 무공이라도 봐주시지요. 저는 그럼 이만···.”
“나, 나도 같이 가야지!”
“너는 여기서 어르신의 말동무나 하고 있어라.”
파앗.
사중환은 경공까지 펼치며 전각에서 도망쳤고, 왕호와 송 영감만 남았다.
“······.”
“안 그래도 도련님의 의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늘···. 돌아와서 의제의 무공이 이리 퇴보했음을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소.”
‘퇴보라니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익혔는데!’
“······.”
패자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부실하게 익힌 검도 막지 못하니 어찌 퇴보가 아니겠소.”
‘익히기 어려웠다면서! 언덕도 못 올랐다면서!’
부실하게 익힌 검이 이 정도라면, 제대로 익혔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언덕이 아니라 기암절벽이 가득한 고산(高山)에 못 올랐다면 이해라도 하지!’
“도련님과 만나기 전에 무공을 더 익히도록 합시다. 도련님의 의제가 약한 꼴은 볼 수 없지요.”
“···어, 어르신. 제가 먼 길을 오느라 아직 몸이 성치 못하여···.”
“허허. 고작 관도를 오갔다고 몸이 축난단 말을 내가 믿겠소?”
“······.”
송 영감은 자신과 천수에서 자장까지 함께 이동한 바 있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기 전에도 여정을 멀쩡하게 소화했었고 무공을 익힌 지금은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송 영감이 어찌 모르겠는가.
“허나, 여정 중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겠지요.”
“예, 예. 그렇습니다! 그 와중에 흑패를 접수하기도 했고, 녀석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심력이 엄청 들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수련을 시작합시다.”
“······.”
“나와 수련하는 편이 도련님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오.”
왕호도 진이 빠질 때까지 다그치는 호충과의 수련을 기억하고 있었다.
“···형님 눈에는 어차피 똑같지 않을까요?”
“흐음. 도련님 눈에는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앞으로 하오문의 중추가 될 도련님의 의제가 이렇게 약한 꼴은 못 보겠소. 최소한 내 검을 일합이라도 막아야 할 것이오.”
“···예이.”
왕호는 감숙을 차지하고 자신이 받을 칭찬을 기대하며 기쁘게 서안으로 들어왔지만, 돌아온 것은 이가 갈리는 수련이었다. 송 영감이 말 한대로 수련은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이었다.
따악.
“아악!”
“어딜 공격하는지 다 얘기했는데 왜 못 막습니까!”
“목검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막습니까!”
“그럼 더 천천히 공격할 테니 막아보시오.”
슈웅.
“허리, 허리!”
퉁.
‘막았다!’
왕호는 처음으로 송 영감의 목검을 저지했지만, 막아낸 공격은 첫 번째뿐이었다. 다음 검식은 반대쪽에서 번쩍 나타나 왕호의 허리를 가격했다.
퍽.
“꺼흑.”
“내가 허리를 두 번 공격한다지 않았소! 어째서 한쪽만 막는 것이오!”
“죄, 죄송.”
“다시 가겠소! 다리, 머리!”
퍽. 빠각.
“커컥.”
이번엔 둘 다 놓쳤다.
“정신 차리시오!”
감숙의 흑패주들은 수련장 근처에서 얻어터지는 왕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
“······.”
수련할만한 공간은 여기 한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왕호는 볼썽사납게 얻어터지는 꼴을 모두에게 보이고 있었다.
‘여긴 골골 거리는 영감쟁이도 형님을 뚜드려 패는구나.’
‘형님이 다 이길 줄 알았는데···.’
‘호굴이다. 내가 호굴에 들어왔어.’
‘여길 차지하겠다고 큰소리쳤다니···. 내가 미쳤지.’
감숙에서 천외천의 신위를 보여줬던 왕호도 여기선 그저 동네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정신줄 놓고 있을 거야! 거기 팔 제대로 안 올리냐!”
옥비연은 마보자세를 유지하는 감숙의 흑패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수련을 봐주는 중이었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목을 빳빳하게 들고 있어?!”
옥비연이 곁을 지나가면 알아서 눈을 내리깔았다. 어제 이미 예절교육을 제대로 받은 탓이다.
“시골 촌구석에서나 목에 힘주고 다녀 새끼들아!”
옥비연은 마보를 취한 이들 앞으로 나가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만났던 사람을 기억하나?”
어제 서안 흑패 전각에서 만났던 하오문의 문지기를 말함이다.
“그 녀석도 너희보다 훨씬 강하다. 너희가 전부 덤벼도 단칼에 목을 자를 수 있지.”
“!”
“!”
“!”
얼마나 자신들이 우스워보였을까.
“이곳에서 일하는 누구도 너희보다 약하지 않다. 그러니 몸가짐을 똑바로 해라. 알았느냐!”
““옙!””
소리 높여 대답은 했지만, 크게 기운이 빠졌다. 언제나 우두머리였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왕호 밑으로 들어간 것도 무공의 고하를 겪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인데, 여기선 자신들이 막내나 다름없었다. 어찌 기운이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옥비연은 이들에게 다시 기운이 생길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공을 소홀이해서는 안 될 것이야. 지금도 이곳으로 오는 흑패주가 있으니 너희가 모범을 보여라!”
서안으로 향하는 지역의 흑패주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중이었다.
“오오! 우리가 끝이 아니구나.”
“그 놈들보다는 강해질 것이야.”
“너희가 무공을 제대로 익히면 기존의 강자를 뛰어넘을 것이나, 소홀하게 익히면 늦게 온 자가 너희를 뛰어넘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옙!””
“대답은 대답이고···. 팔은 왜 내려 새끼야! 정신 안 차려!”
옥비연은 능숙한 교관의 모습으로 흑패주들을 단련했다.
“팔, 다리, 머리!”
퍽, 퍽, 따악.
“꾸에엑.”
“어디다 한 눈을 팝니까! 지금 저들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왕호는 괜히 흑패주를 돌아봤다가 얻어터지기만 했다.
***
히이잉.
마차가 멈추며 문이 열렸고, 한 남자가 내려섰다.
덜컹. 저벅.
강소성과 절강성을 도모한다던 호충은 안휘성으로 넘어와 황산에 도착해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선 호충은 뒤이어 내려오는 면사 여인의 손을 잡아줬다.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기품만으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착했어. 황산이야.”
“가가. 황산엔 어인일로 오셨어요?”
면사의 여인은 바로 화진이었다.
“돈 벌어야지.”
호충이 돈을 번다는 말에 화진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후우. 또 무림 방파 하나를 뒤집으시려고요?”
“큭. 뒤집기는 뭘 뒤집어? 서로한테 좋은 일이지.”
“서로? 이번에도 그런 년이 있을 것 같은가보죠?”
“그런 년이라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제갈 세가의 금지옥엽이 가가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꼴을 제가 봤는데요?”
호북성에 위치한 제갈 세가에 무공서를 팔아먹었을 때를 말함이었다. 당시 제갈 세가에 방문한 호충은 잘생긴 옥비연의 얼굴이었고, 높은 무공을 선보이며 실전한 제갈 세가의 가전 무공을 팔아먹었다. 그 과정에서 제갈 가주의 막내딸이 호충에게 반해 추근거린 일이 있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이번엔 오해 안 받으려고 황매도 같이 왔잖아.”
“오해가 아니지 않았나 싶은데요?”
“오해라니까. 내가 그대 말고 여인이 어딨어?”
화진은 호충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황산에 있는 무림 방파를 떠올렸다.
“황산하면···. 남궁 세가네요?”
또한 화진은 남궁 세가에 차기 일봉을 자처하는 여협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모용 세가의 모용희가 태자비로 낙점되었으니 일봉의 자리가 비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말이 많았는데, 무림인들은 남궁 세가의 여협을 그 자리에 올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남궁소선이라 했던가요?”
“황매는 기억력도 좋아.”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 알아서 하세요.”
“에헤이. 내가 아무나 껄떡대는 흑패 놈들 인줄 알아?”
“···가가는 흑패의 두목이잖아요.”
“······.”
“안 그래도 자꾸 나이만 먹어서 되게 신경 쓰이거든요?”
올해 스물여덟이 된 화진은 이러다 혼인도 못하고 서른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호충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아홉이었다.
“나이는 먹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신담?”
“나이를 왜 안 먹어요? 한 해 지나면 한 살 먹는 거죠.”
“황매는 아직 파릇파릇한 스무 살로 보인단 말이지. 그리고 누구도 비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가득해. 그러니 마음 푹 놓으라고.”
“훗. 그야 그렇지만.”
“내가 황매까지 여기 데려와서 딴 여자를 만나겠어?”
화진은 두 손에 명경수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소선이라는 어린 애랑 엮이기만 해봐요. 내가 그년 머리끄덩이를 잡아서 다 뽑아버릴 테니까. 내가 그년 못 찾을 것 같아요? 황산 기루 애들 다 풀어서 찾으면 반나절이면 찾아올 걸요?”
안휘성의 뒷골목은 이미 하오문에서 차지했고, 홍루와 청루 또한 화진의 손아귀에 있었다.
“···살살 하자. 그러다 애 죽겠다.”
“뭐요?!”
“큭큭. 농이야.”
호충도 여자에게 관심이 없진 않았으나, 살아온 세월 때문인지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무림에서 호충으로 살아온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여자가 많아봐야 귀찮기만 하지.’
지금까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주고 곁에 함께해준 화진만으로 충분히 만족이었다.
삼처사첩을 꿈꿨지만,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안 그래도 하오문의 일로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었고, 마교에 붙잡힌 아버지의 일과 역모도 있었다. 여기에 여자들 일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다.
“난 황매만으로 충분해. 다른 여자는 바라지 않아.”
예전엔 그냥 하는 말이었지만, 이젠 진심이었다.
“···가가.”
“하오문이 자리 잡으면 우리 성대하게 혼인하자.”
“······.”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가가 아니면 제가 누굴 믿겠어요.”
“오늘은 방음이 잘 되는 좋은 방을 잡아볼까? 기루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화진이 황산까지 따라온 것은 황산의 기루를 한번 돌아본다는 핑계도 있었다.
“크흠. 한적한 별채로 부탁해요. 일은 천천히 하죠 뭐.”
“하하하. 그래. 별채가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