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232)

월궁 항아

***

검식의 변초를 배우자면 자신과 비등한 상대와 오랜 수련을 통해 몸으로 익혀야 했다. 하지만 무림의 상승 검법이 실전된 요즘은 서로 대등하게 겨룰 상대가 없었고, 이는 결국 지금과 같은 정석적인 검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 호충은 심상 대련을 통해 절대급에 속하는 스승들과 항상 대련하고 있었다. 수련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고, 변칙에도 익숙했다.

“하합!”

아무리 기합을 넣고 검식을 보인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속도만 더하면 뭘 하겠는가. 상대에게 닿지도 않을 것인데.’

휘익. 휙.

호충은 검격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해 황룡살도(黃龍殺刀)를 펼쳤다.

“조심하게.”

부앙.

바람을 가르는 무거운 중도가 내는 소리가 대기를 울리고 있었다.

떠엉. 찌이잉.

겨우 호충의 도를 막아낸 한천의 검이 부르르 떨었다. 남궁 가의 검이 폭이 넓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검처럼 폭이 좁은 세검이었다면, 바로 부러져버렸을 것이다.

“크흡.”

“또 간다.”

부아앙. 떠엉. 떵.

가볍게 날아드는 도는 가볍지 않은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남궁 가의 검이 추구하는 중검(重劍)을 도(刀)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번엔 좀 빨리 가지.”

따당. 땅. 땅. 따다당

검과 도가 마주하며 내는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큭.”

한천의 팔은 해소하지 못한 도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부아앙.

아까와 같은 무거운 도가 쏘아져 들어오니 막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떠엉.

“윽.”

“아직 멀었어.”

따당. 땅. 따다당.

“크흑. 큭.”

호충의 도격을 막아낼 때마다 한천이 들고 있던 검이 쑥쑥 내려갔고, 곧 파국을 드러냈다. 상체가 훤히 드러난 것이다.

남궁 가의 무사가 얼른 소리쳤다.

“그, 그만! 대인. 사정을 봐주십시오!”

호충은 듣지 못한 것처럼 빠르게 도를 휘둘렀다.

“하앗!”

“안 돼!”

후앙. 퍼억.

“커헉.”

호충은 마지막에 도를 비틀어 도면으로 한천의 어깨를 밀친 것이다. 맞는 소리만 컸지 몸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휴우”

한천의 목이 잘리지 않았음을 안 무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도 팔자로군. 황산에서 남궁 가의 소가주를 상하게 하겠는가.”

“사정을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인.”

호충은 도면에 맞고 튕겨져 나간 한천을 보고 말했다.

“기절한 것도 아니잖아. 어서 일어나지?”

“···끄응.”

한천은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일어났고, 호충은 그 곁으로 다가섰다.

“이봐. 친구. 여인을 만나고 싶거든 정석적인 절차를 밟으시게. 임자가 있는 여인에게 왜 치근대서 화를 자초하는 가.”

“···내가 패배했다고 해서 그런 충고까지 들어야하는가!”

“여자 경험은 있고? 보아하니 여자라곤 만난 적도 없는 샌님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그, 그건···.”

그러니 옛날 옛적에도 통하지 않았을 방법으로 여자에게 들이대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언뜻 봐도 한천은 상당히 젊은 모습이었다. 노회한 호충에 비하면 아직 풋내기에 불과했다.

“내가 세가의 중검을 제대로 익혔다면 오늘처럼 밀리지 않았을 것이야!”

“···그러셨겠지. 하지만 남궁 가엔 상승 무공이 없다지?”

남궁 세가에서 실전한 창궁무애검법과 제왕검형은 여전히 실전한 채로 남아 있었다. 실로 뼈아픈 일이다.

“내가 창궁비연검만 익혔어도···.”

그나마 남아 있는 창궁비연검이 소가주가 익힐 수 있는 가장 강대한 무공이었기에 입에 올린 것이다.

“이미 패배한 놈이 말이 많다. 가자. 가서 밥이나 먹자.”

턱.

호충은 스스럼없이 한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뭐?”

“같은 말을 또 하게 하냐? 가서 밥이나 먹자고. 이리 와.”

“지, 지금 뭐하자는···.”

“야. 남자끼리 대련 한번 했으면 벗이지 무슨 말이 많냐? 가서 예쁜 내 애인 자랑할 생각이니까 군소리 말고 따라와라. 설마 아직도 내 여인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

한천은 호충에게 붙잡혀 객잔으로 다시 올라갔고, 무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따랐다.

‘정파인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무림인의 대결은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의 패배가 알려진다면 남궁 가 입장에선 얼굴을 들지 못할 일이었다. 오늘 대결에서 패한 사람이 바로 남궁 가의 소가주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상대는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친우를 자처하고 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

***

화진은 멀쩡하게 호충과 같이 올라온 한천을 보며 호충을 보고 말했다.

“이봐. 이봐. 내가 한다니까. 이제 비켜 봐요. 내가 한 방에 끝내고 올 테니.”

“이제 내 벗이야. 너무 뭐라 하지 마.”

“뭐요?”

“남자들끼리는 치고받고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야. 그대가 이 녀석과 친해지면 큰일이잖아. 그러니 내가 상대해야지.”

화진은 호충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남궁 세가를 상대로 일을 시작하자면 남궁 가의 대공자를 상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 별 소리를 다 듣네요. 알았어요. 요리 식기 전에 어서 들기나 해요.”

“오오. 그 사이 요리가 나왔어? 너도 앉아. 같이 들지.”

“······.”

한천은 쭈뼛거리며 곁에 앉았고 호충은 술까지 권하며 친밀하게 대했다.

“술도 한잔 하지. 이렇게 만난 것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지.”

[안 그래도 어찌 남궁 세가에 들어가나 고민했는데 잘 됐어. 그러니 황매도 어울려줘.]

화진은 호충의 전음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를 먹자면 면사를 치워야했기에 화진은 자연스럽게 면사를 벗어 옆에 두었다.

사박.

화진이 면사를 벗자 삼층 객잔이 환하게 밝아진 느낌이었다.

“!!”

화진의 실물을 본 한천은 막 입에 머금었던 술을 도로 뱉어내며 입을 벌렸다.

주르륵.

“황매. 이 친구가 술은 삼킨 다음에 면사를 치웠어야지.”

호충은 한천의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며 말했다.

“얘가 완전히 맛이 갔네. 훠이. 이봐. 정신 차려 이 사람아.”

“공자님. 이게 무슨 추태란 말입니까.”

남궁 가의 무사까지 와서 한천을 흔들었다.

“허어. 허어···.”

정심한 내공을 통해 가꾸어진 화진의 미모는 전과 비교하기 힘들만큼 아름다운 용모를 뽐내고 있었다. 뽀얀 살결은 만지면 묻어날 것 같았고,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은 손대면 터질 것 같았다. 촘촘하고 무성한 속눈썹 아래에 존재하는 봉목(鳳目)은 더했다. 그 깊고 맑은 눈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도련···. ······도련님. ···도련님!!”

“어! 뭐, 뭐라고?”

“옷섶이 다 젖었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추태란 말입니까.”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한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월궁항아가 인세에 내려오지 않았느냐. 저 미려한 자태를 보아라. 별빛 같은 눈망울에 고운 미소를 입에 문 그녀가 나를 보고 있지 않느냐. 감히 항아도 비길 수 없구나. 오오. 선녀께서 지상에 내려왔음이로다.”

호충은 한천의 말에 탄성을 터트렸다.

“캬하. 좋다. 역시 배운 티가 나네.”

“좋기는 뭐가 좋다고 그래욧!”

화진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고, 한천은 화진의 돌아선 얼굴을 마주하고 싶어 허리를 쭉 뺐다.

“공자님 좀 앉으세요! 추한 꼴은 그만 보이시고요!”

한천이 제 정신을 되찾는 것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아. 이야···.”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한천은 고개를 들어 함께 앉아 있는 호충과 화진을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수려한 용모의 남자와 아리따운 용모의 여인이 한 곳에 앉아 있으니 마치 선남과 선녀가 함께 앉아있는 것 같았다.

호충은 자신이 상당한 재력을 가졌다고 설명했고, 지방의 유력 상가의 자제라 포장했다. 돈 많은 부호에 무공도 자신보다 높았고, 옆에는 아리따운 여인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하아.”

쭈욱. 탁.

“크흐.”

술이 절로 들어간다. 술잔이 비자 호충이 얼른 다시 잔을 채웠다.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쫄쫄쫄.

다시 고개를 들어 둘을 본 한천은 또 한숨이었다.

“하아.”

쭈욱. 탁.

“크흐.”

“이 친구야. 우리가 안주라도 되는가? 왜 우리만 보고 술을 마셔?”

“술이 쓰다. 너무 써서 가슴이 아릴 정도야. 그런데 이상하게 술이 술술 들어간다. 술술 들어가.”

화진은 호충을 향해 조그맣게 말했다.

“저 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네요. 좀 어떻게 해봐요.”

“황매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걸 어떻게 해.”

한천은 호충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도 아름답게만 보일뿐이다.

“선녀님. 나도 그렇게 말을 걸어주시오. 허어엉.”

“······.”

화진은 질겁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긴 하겠네. 황매는 가서 준비 좀 해주겠어?”

호충은 전음으로 자세한 요구사항을 전했다.

[············.]

“!”

“녀석이 선녀를 찾으니, 아무래도 신선한 경험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가가는 출입금지에요. 알죠?”

“···그래도 남궁가의 대공자를 혼자 보낼 수는···.”

“오늘 머리끄덩이 잡을 사람이 따로 있었네?”

화진은 살기 어린 눈으로 호충을 노려봤다. 앙칼진 눈빛과 내공을 가득 머금은 조(爪)가 호충을 위협했다.

‘저 손톱에 할퀴면 끝장나겠구나.’

“아, 아냐. 농담. 농담.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제가 모임에서 항상 강조하는 첫 번째가 바로 가가에 관한 것이에요. 가가를 맞이하는 년은 땅 끝까지 찾아가서 보복한다고 했거든요.”

모임은 기루 연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화진은 기루 연합의 수장으로 지금까지 차지한 모든 지역의 기루를 손안에 두고 있었다. 그곳의 첫 번째 규칙이 하오문의 문주를 손님으로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가 수장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어.”

“그러니 허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

“···어, 엄밀히 따지면 혼자가 아니네. 남궁 가의 무사도 같이 갈 테니까. 나는 그냥 여기 있을게.”

“좋은 생각이세요. 여기서 기다려요. 준비 끝내고 금방 부를 테니까.”

한천은 화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모습을 따라가며 고개를 돌렸다.

“여신이 가시네. 날 두고 가시네···. 가시나, 가시나, 날 두고 어딜 가시나···.”

“이 친구야. 적당히 해. 술도 어지간히 마셨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루에서 사람이 왔고, 호충은 불콰하게 술이 취한 한천과 남궁 가의 무사를 맡겼다.

“저 사람을 따라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네. 그러니 남궁 공자를 데리고 가봐.”

“좋은 곳이요?”

“가보면 알 것이니 더는 말을 삼가지.”

“···알겠습니다.”

황산에서 남궁 가에 해를 끼칠까 싶었던 무사는 한천과 함께 황산의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 붉은 등이 걸린 기루에 도착했다.

“···어라?”

“헤헤. 여긴 선녀가 가득하네.”

헐벗은 여인들이 거리에서 사내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한천은 여인들을 보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고, 공자님. 여긴···.”

“천상 낙원이로다. 여신님이 저기 계신 모양이다.”

무사가 말리기 전에 기루에서 나온 이가 둘을 잡아끌었다.

“오늘 제대로 모시라는 윗선의 각별한 당부가 있으셨습니다. 편히 맡겨주시지요.”

“자, 잠깐만!”

“빼지마시고 어서 들어오십시오. 미리 대금까지 다 치루셨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무사는 빼는 척 하면서도 작은 힘에 딸려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 우리 황산 기루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월향이가 공자님을 모실 것입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큼큼. 그럼 나는?”

“첫째가 있으면 둘째도 있지요. 하하하.”

그날 한천은 신세계를 경험했다. 무사도 덕분에 좋은 구경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가고 싶기는 했으나, 지금까지는 남궁 가의 무사로 함부로 이런 곳에 드나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

.

.

이른 아침 한천은 아픈 머리를 흔들며 잠에서 깨어냈다.

“끄으응. 어제 술이 너무 과했···.”

물컹.

“!”

자리에서 일어나던 한천은 자신의 침상 옆에 무언가 물컹한 것이 만져지자 얼른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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