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32)

창궁무애검법과 제왕검형

***

한천의 손길을 느낀 여인이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응. 벌써 깨셨어요? 더 자요. 더 자.”

“······.”

“이리와요. 내가 더 재워드릴게요.”

“허읍.”

아리따운 여인은 익숙하게 이불 속으로 한천을 잡아끌었고, 한천은 어젯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어제 기루에서부터···.’

화끈하게 동정을 잃은 기억이 쏟아졌다.

“!”

음주와 가무가 곁들어진 끝에 기녀의 손에 이끌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으로 들어갔고 이후엔 자연인의 모습으로 그녀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어요. 너무 상심하지 마셔요.]

[크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거야. 그럼 다시···.]

[이번엔 조금 더 천천히···.]

“어휴.”

‘···제기랄. 아주 지랄이 났었어.’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기녀가 조그맣게 말을 전해왔다.

“공자님. 소첩이 매달릴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처음 기녀가 되었을 때부터 마음먹고 있었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자님과의 추억은 가슴 깊이 묻어두겠어요. 그러니 오늘 아침까지만 편히 머물다 가시어요.”

“······.”

한천은 어젯밤 기억의 한 자락이 떠올랐다.

[소첩은 오늘 공자님을 처음으로 맞이한답니다. 하지만 제가 기녀인 이상 필연적인 일이니 괘념치 마시어요.]

[나를 신의 없는 놈팡이로 생각하느냐? 너야 말로 나만의 선녀이니라. 오늘 나는 내 짝을 만났다.]

[말씀만으로 감사해요. 공자님.]

[하하하.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어쩌자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단 말이냐.’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여인이 기녀인 이상 미래는 불투명했다. 남궁 가의 대공자가 맞이할 여인이 아닌 것이다. 한천은 이어진 기녀의 말을 듣고 더욱 가책을 느꼈다.

“꿈에서 깨는 것은 조금 늦추시어요. 저는 아직 달콤한 잠에 빠져있답니다.”

“······.”

어젯밤의 일은 여름밤의 한 자락 꿈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아직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녀의 바람이기도 했다.

“공자님이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제 꿈이 조금 더 이어질 수 있도록···.”

눈물자국이 있는 얼굴로 환히 웃으며 올라다보는 그녀를 본 한천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나도 너와같이 달콤한 꿈을 꾸고 싶다.”

“공자님···.”

한번 기울기 시작한 마음은 속절없이 기울기 마련이었다.

.

.

.

터벅. 터벅.

“······.”

“······.”

한천은 기루에서 나와 본가로 돌아가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곁에 있던 무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본래 기루에서 나오자마자 어제의 즐거웠던 일들을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한천의 굳은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호 형.”

“공자님. 겁나게 왜 또 그렇게 부르십니까.”

무사는 호라는 성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입을 달싹 거리던 한천은 결국 묻고 싶었던 말을 뱉지 못하고 다른 것을 물었다.

“···별거 아니야. 어제 비연이 머물던 객잔으로 가자.”

불편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안 그래도 속이 쓰린 참이었습니다. 뜨끈한 두부 탕이나 한 그릇 하시지요.”

“그러지.”

한천과 무사는 집으로 가던 걸음을 돌려 어제 호충과 만났던 객잔으로 향했다.

***

그 시각 면사를 쓴 화진은 여인들을 대동해 한전과 무사가 빠져나온 기루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방주님.”

하오문 산하의 기루 연합은 하나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화진은 루방의 방주였다. 루는 기루(妓樓)의 루(樓)가 아닌 눈물 루(淚)를 쓰고 있었다. 눈물이 그칠 날이 없었던 과거의 기루 생활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흑패도 마찬가지였다. 주먹을 쓰는 패방과 도박을 의미하는 도방이 있었고, 도둑과 소매치기를 의미하는 배방도 존재했다. 그 외에도 직종 분류에 따라 방을 만드는 중이었다. 하오문의 문주는 이들을 통솔하는 위치였으며, 지금은 오직 호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하오문은 지난 이 년 간 착실하게 중원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월향은 어디 있지?”

“내실에서 방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지.”

루주의 안내에 내실로 들어선 화진은 아침과 달리 방긋 웃고 있는 월향을 볼 수 있었다.

“루방(樓放)의 말단 방도가 방주님을 뵈오니 영광이옵니다.”

“인사는 됐으니 앉아.”

“예. 방주님.”

“어때? 가능성은 보이던가?”

다짜고짜 묻는 말이지만, 이미 어제 나눈 대화가 있었기에 준비한 듯이 답했다.

“예. 아직 어리숙한 공자님이시라 어렵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황산의 남궁 세가는 무림의 중요 세력이다. 시시때때로 정보를 얻어야 할 것이야.”

“예. 방주님. 대공자를 통해 많은 것을 얻어 보겠습니다.”

월향은 애초부터 한천을 통해 남궁 세가의 내밀한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투입된 여인이었다. 어제 호충이 지시한 명령에 이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남궁 세가는 오르기 쉽지 않다. 괜한 기대는···.”

“사전에 충분히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그런 기대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

월향에겐 남궁 세가의 대공자를 포기하라는 듯이 말했지만, 화진의 속은 편치 않았다. 본인은 남궁 세가와 비견될 진가장의 막내공자를 얻지 않았겠는가.

‘나도 아직 성혼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마음에 괜히 한마디 더하게 된다.

“남궁 세가에 들키지 않을 정도로는 만나도 좋겠지. 하지만 네가 깊이 마음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방주님. 저도 방주님처럼 고절한 고수가 되고 싶습니다. 집만 지키는 인형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월향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것보다 무림을 종횡무진 질타하는 여협이 되고 싶었다. 화진은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훗. 그와 자주 잠자리를 하면 그리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 남궁 세가의 대공자를 고수로 만들면 너도 자연스럽게 고수가 될 것이다.”

이미 이곳 기루에도 방중술과 음공이 전해지고 있었다. 방중술을 통해 내공을 수급한다면 어렵지 않게 무공의 증진이 있을 것이다. 화진 또한 호충을 통해 많은 내공을 전해 받아 무공을 키워오지 않았던가.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오가는 하오문의 상인들을 통해 서찰을 전해야 할 것이다.”

“예. 방주님.”

“이만 가겠다.”

“곧 첫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방주님.”

화진은 함께 걸음 했던 루방의 방도들과 함께 기루를 나섰다. 이번엔 다른 기루로 가서 얼굴을 보여야 했다.

“방주님. 황산에 남은 기루는 두 곳입니다. 마차로 오르시지요.”

“급하게 갈 것 없으니 오늘은 한 곳만 들르기로 하지. 나머지는 내일 간다고 이르게.”

“예. 방주님.”

호충의 일은 오늘부터가 시작이라고 했다. 보통 며칠은 걸리기 마련이라 화진도 이곳에서 루방 방도들의 무공을 봐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가가와 뱃놀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장강을 볼 수 있었다. 장강 하류 근처에는 호수가 많았기에 뱃놀이에 그만이었다. 화진은 작은 아쉬움을 달래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

“여. 어제 재미가 좋으셨나봐? 얼굴이 아주 홀쭉하네? 볼 살이 쭈욱 빠졌는데?”

혼자 객잔에서 차를 들던 호충이 객잔으로 들어오는 한천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재미는 무슨···.”

한천은 속이 심란해서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반면 남궁 가의 무사는 입가에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옥 공자님.”

“크하하. 즐거웠으면 된 거지. 내가 같이 못가서 어찌나 아쉽던지···.”

호충의 말에 한천은 삿대질까지 하며 열을 올렸다.

“너는 그녀가 있잖아! 그런데 가면 안 되지!”

“···그래서 안 갔잖아. 거기 가면 나 죽어. 나뿐 아니라 나랑 같이 논 애도 죽을 걸? 네가 그녀의 성정을 잘 몰라서 착각하는 모양인데, 여자는 내밀한 속이 다른 법이야. 겉모습만으론 판단할 수 없지.”

내밀한 속이라는 말에 월향의 헐벗은 몸을 떠올린 한천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하던 말을 끝냈다.

“크흠. 어쨌든 그런 곳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마. 그런 여인을 두고 한눈을 파는 건 못할 짓이다. 기루에 드나드는 건 사내가 할 일이 아니지.”

어젯밤 기루에서 하루를 묵고 나온 녀석이 하는 말이라 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호충은 옆에 있는 무사에게 한천이 왜 이러냐는 듯이 눈짓했고, 무사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안 풀렸나?’

어제 자신이 지시한 일들이 계획과 달라졌나 싶었다.

“어제 술을 그렇게 들이부었으니, 속이 확 풀리는 탕이라도 시켜주지.”

한천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고, 남궁 가의 무사는 호충에게 한천을 부탁한다는 듯이 슬쩍 자리를 피했다. 호충은 얼른 점소이를 불러 식사를 주문하고 한천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죽을상이야?”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 세상 다 산 놈처럼 보이는데. 고작 하루사귄 벗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 않나.”

“옥 형.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오. 뭐든 물어봐. 내가 상단을 오가며 겪은 일이 많으니 도움이 될지도 몰라.”

“······기녀를 내자로 맞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에효. 어렵지. 그래 어려울 거야.”

호충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한천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오호라. 화진이가 제대로 된 기녀를 붙였구나. 계획은 성공했군.’

호충은 한천이 기녀에게 빠져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하룻밤 만에 홀딱 넘어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탁.

호충은 탁자를 치며 화를 냈다.

“어제의 내 경솔한 행동을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군. 괜히 너 같은 놈과 벗이 된다고 했나보다.”

“뭐? 무슨 소리야?”

호충은 한천이 크게 충격을 받을 소리를 했다.

“어제 네게 소개해준 나의 연인 또한 기녀출신이다.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인데, 너는 직업에 귀천을 두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람을 크게 잘못 본 모양일세.”

“!!”

한천은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청조하고 아름다운 용모의 그녀가 기녀로 일했다고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기녀였다고? 그럼 지금은 그만 둔 건가?”

“지금도 지방의 작은 청루를 맡아서 운영하고 있지. 하지만 직업은 직업이잖아.”

“지, 지금도 기루에서 일을?”

청루든 홍루든 기루는 기루였다.

“어제 네가 보인 호의가 후회되나? 그녀가 기녀라니까 달리 보이겠지?”

“아, 아니다! 절대로 아니야.”

그제야 호충은 조금 풀어진 얼굴을 하고 답했다.

“나는 그녀와 혼인할 생각이고, 그녀 외엔 누구도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영웅은 삼처사첩을 거느려도 흉이 되지 않는다지만, 난 그딴 게 영웅이면 안 하련다. 내 인연은 내가 죽을 때까지 지킬 거야. 집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녀를 지킬 것이다. 세상이 나를 소인배라 불러도 좋아.”

“와아······.”

한천은 크게 감격한 얼굴로 호충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이런 말에 혹하고 넘어오게 생겼더라.’

“식사가 나왔으니 어서 들기나 해.”

“자네도 들지. 오늘 자네에게 정말 좋은 얘길 들었어. 또한 자네는 그녀의 사랑을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알 수 있었네! 내가 졌네. 완전히 졌어.”

“알았으니 어서 먹기나 해. 끝나고 할 얘기도 있으니···.”

“할 얘기?”

“식사하며 할 얘기는 아니야. 한적한 곳에서 얘기하지.”

“뭐. 그러시던가.”

.

.

.

식사를 끝낸 한천과 호충은 무사까지 떼어놓고 객작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얘길 하려고 주변까지 살펴?”

안으로 들어온 호충이 문밖으로 누가 있는지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중요한 일이라 그래. 안 그래도 남궁 세가에 볼일이 있었는데, 마침 자넬 만나서 얼마나 다행이다 싶었는지 모를 걸세.”

“자네가 본장에 볼일이 있었다고? 원래 우리 가문과 거래가 있었나?”

“남궁 세가에서 물건을 주문한 것은 아니야. 그저 내가 남궁 세가에 필요한 물건을 들고 온 거지.”

“어허. 자네가 상인은 상인인 모양이군.”

한천은 자신을 통해 남궁 세가에 물건을 납품하려 한다고 짐작했다.

“······.”

그리고 가슴에 작은 실망감이 번졌다. 자신에게 친밀하게 대한 것이 결국 상인의 거짓된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술을 사고 기루까지 대접 했던가···. 이 어리석은 놈. 아버지가 괜히 나를 걱정하시는 게 아니구나. 노련한 상인에게 완전히 속았어.’

“···내가 남궁 가의 대공자가 아닌가. 조금은 힘을 써보겠네.”

그래도 호충에게 모진 말을 하지 못하는 한천이었다.

“이보게 한천. 이번 물건은 자네가 감당할 물건이 아닐세. 중원 무림에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일이야.”

“자네 허풍은 정말 알아줘야겠군. 대체 무슨 물건을 가져왔기에 그리 허풍을···.”

호충은 한천의 말을 자르고 짤막하게 답했다.

“창궁무애검법과 제왕검형의 검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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