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가 입성
***
호충은 한천의 말을 자르고 짤막하게 답했다.
“창궁무애검법과 제왕검형의 검보.”
“!!”
호충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는 한천에게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걸 어렵게 입수해서 여기까지 들고 왔단 말이네.”
“자, 자, 잠깐, 잠깐.”
한천은 얼른 문밖의 기척을 살피고 돌아와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욱.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남궁 가의 보물을 들고 왔다? 그것도 일개 상인이?’
한천은 호충을 향해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보였다.
“자네. 지금 한 말에 거짓은 없나?”
“친우에게 거짓을 말해 얻는 게 뭐가 있겠나? 내가 이런 일에 농을 섞을 것 같은가?”
“······.”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하는 말이라 의심하기 쉽지 않았다. 호충의 얼굴엔 한 점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녕. 남궁 가에서 실전한 검보인가?”
“내가 어찌 확신하겠는가. 이를 확인하려면 가주님과 대면해야 할 것이네. 그래서 자네에게 가주님과 독대할 기회를 달라할 참이었네. 무려 금 삼십오만 냥을 주고 샀단 말이네.”
근래 중원의 모든 무림 방파에서 상승 무공을 암암리에 찾고 있었다. 덕분에 상승 무공의 가치는 수직 상승했고, 호충은 이를 반영하여 비급의 가치를 산정한 것이다. 하지만 찾는다고 나올 것이면 진즉에 다 나왔을 일이다. 현재 중원 무림엔 가짜 비급만 판을 치고 있었다. 진짜는 모두 호충이 들고 있었다.
“금 삼십오만 냥?”
“남궁 가에서 실전한 두 개의 검보를 사들이기 위해 사용한 상단의 자금이네. 가끔 흑점에서 이런 식으로 검보가 세상에 나오곤 하거든. 아마도 예전에 남궁 세가에서 잃어버린 검보를 누군가 발굴해 냈겠지. 나는 언제나 남궁 세가가 정파의 굵직한 기둥이라 생각해 왔기에 거금을 들여 검보를 입수했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왔네.”
막힘없이 이어지는 호충의 말은 전혀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허.”
“가주님이 요즘 무림맹의 일로 공사다망하시다고 알고 있네. 나 또한 무림에 한발 걸쳤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가주께서 본가로 돌아오셨다면 잠시 얼굴만 뵈었으면 하네.”
정무맹과 협의맹은 하나의 무림맹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마교의 일로 인한 파급효과였다.
“···최근 본장에 돌아오긴 하셨네만.”
당연히 남궁 세가의 가주인 남궁곤이 가문으로 돌아왔다는 정보도 파악하고 있었다. 호충은 가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다른 일을 미뤄두고 황산으로 온 것이다.
“그럼 뭘 꾸물거리는가? 빨리 앞장서게.”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나. 요즘 가짜 비급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두 권의 무가지보를 가진 것만으로 내 다리가 후들거릴 거란 생각은 못 하나? 맞든 아니든 빨리 치우고 싶은 심정이야. 그래서 구입한 돈에서 한 푼도 보태지 않고 넘길 생각이란 말이네.”
“만약 검보가 진본이 아니라면 자네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나?”
“검보가 거짓이라면 내 목을 내놓으면 될 일. 내가 가져온 검보가 거짓이라면 나는 금 삼십오 만 냥과 목숨을 잃겠군. 그녀는 혼인도 못 해보고 과부가 될지도···.”
“뭐···. 내가 말리면 목은 치지 않으실 테지.”
“내 목숨이 친우에게 달려 있었군. 잘 좀 부탁함세.”
“···하아. 이거 진짜 걱정되는데 말이야.”
***
호충은 비단으로 감싼 비급을 품에 조심스럽게 안고 한천을 따라 남궁 세가의 장원 문턱을 넘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어. 별일 없었지?”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지요?”
“일이 좀 있어서···.”
“가주님께 문안 인사부터 하시지요.”
한천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가, 가주님이 날 찾으셨어?!”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 가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가주가 찾지 않았어도 밑에서 보고를 올려야 할 일이었다. 물론 보고가 들어갔고, 가주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한천에게 가주의 일을 설명하려던 수문 무사는 한천 옆에 있는 인물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함께 오신 이분은 누구신지···.”
‘그래. 이 친구의 핑계가 있었지.’
한천은 오늘 자신의 친우가 돌파구라 여기며 어깨를 펴고 소개했다.
“이쪽은 오늘 가주님의 중요한 손님이 되실 분이라 내가 어제부터 모시고 있었네. 어제 들어오지 못한 것은 이분을 대접하느라 그런 거야.”
“아. 공자님.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가문 내부의 일이 아닌 공적인 일로 판단한 무사는 얼른 자세를 바로하고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
.
.
.
호충에게 차를 내준 한천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제 옥 형이 날 살려줄 차례야. 그 검보가 진본이라면 나도 옥 형도 사는 거지.”
자신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어야 했다.
“난 한천만 믿고 있었는데 어쩌라는 거야?”
“···여기서 기다려.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올게.”
“피가 마르는 시간이 될 거야. 어서 돌아와 줘.”
“······.”
한천은 고개만 끄덕이고 아버지가 머무는 가주전으로 향했다.
***
“소자 한천. 아버지께 아침 문안 올립니다.”
“다 늦은 시간에 아침? 왜? 아예 저녁 문안을 오지 그랬느냐? 이리 왓!”
한천은 아버지의 손이 벼루로 가려 함을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뭘 해보기도 전에 벼루가 머리로 날아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중요한 손님입니다.”
“손님?”
“가문의 중요한 물건을 입수하여 가져왔다 합니다. 하지만 진위를 파악할 수 없어 가주님께서 확인해 주십사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어제 이 사람을 붙잡으려 집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가문의 중요한 물건? 우리 가문이 잃어버린 물건은 없다만···. 언제 가문에 도둑이라도 들었더냐?”
한천은 실전한 검보의 이름을 입에 올리려다가 말았다. 지금 그 얘길 해봤자 거짓이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마지막까지 설명하려면 우선 얻어터진 다음에나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느니 차라리 직접 친우를 소개하고 진위를 판단할 기회를 얻는 편이 나았다.
“···직접 보고 판단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허! 핑계가 날로 발전하는구나. 이거라도 나아지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가?”
“객청에 계신 손님을 불러올까요?”
“네가 얼마나 거창한 핑계를 만들어왔는지 보자. 총관도 불러와.”
“예. 아버지.”
한천은 아버지의 허락에 호충을 가주전으로 불러들였고, 호충의 모습을 본 남궁곤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상대가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고 용모까지 출중하였기 때문이다.
“작은 중소상단에서 일하는 옥비연이라 합니다. 가주님을 뵐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파 무림의 기둥인 가주님을 뵌 것만으로 일생의 영광입니다.”
‘진정 손님이었던가? 예의도 있고 눈빛까지 깊구나. 게다가 무공을 익혔군. 자세도 단단해.’
“작은 중소상단에서 일하는 것치고는 복색이 과하지 않소?”
“···외할아버지께서 일구신 상단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 상단의 후계자셨군. 내가 아는 상단이던가?”
“아마 그리 유명한 상단은 아닐 것입니다. 삼도상단이라 하옵니다.”
“삼도상단···. 조금 작은 상단인 모양이군.”
호충보다 조금 먼저 들어온 총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님. 가주님이 즐겨 드시는 차도 삼도상단에서 구입한 물건입니다.”
“아. 그 차?”
호충은 차라는 말에 하오문의 삼도상단에서 납품하는 차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저희 상단에서 납품하는 차는 제조과정부터 상당히 독특···.”
“큼큼.”
남궁곤의 헛기침에 호충은 얼른 입을 말을 줄였다. 유향차는 누구에게 즐긴다고 말하지 못할 차였기 때문이다.
“···향이 참 좋지요.”
“그 얘긴 됐고, 상단에서 남궁 가의 중요한 물건을 입수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혹여 다른 곳에 알려질까 싶어 얼른 이곳으로 달려온 참입니다.”
“꺼내보게. 아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진위를 파악해야겠네.”
“그 전에···. 여기 총관님은 확실히 믿으실 수 있겠지요?”
“허. 물건이 대체 뭐라고 그리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입에 올리는가!”
손님으로 와 놓고 가문의 총관의 의심을 하는 발언을 했으니, 누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혹여 이름 높은 남궁 가에 누가 될까 싶어 노파심에 한 말입니다. 부디 용서를···.”
가주는 호충의 말을 자르고 소리쳤다.
“물건이나 꺼내게!”
“···예. 가주님.”
호충은 품에 넣어온 비단 보자기를 꺼내 한천에게 건넸다. 한천은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들고 아버지 앞으로 가져갔다.
“흥!”
남궁곤은 거친 손길로 비단 매듭을 풀어냈다.
‘한천 네가 아무리 거짓말에 공을 들여 봤자···.’
아들 한천이 자신의 화를 피하려 일을 꾸몄다고 여기고 있었다.
“끄헙! 차, 창궁무애···.”
하지만 보자기 안에 보인 서책의 제목이 심상치 않았다. 남궁 가에서 실전한 창궁무애검법과 제왕검형이 서책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고, 곁에 있던 총관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것이 대체!”
“어디서 이걸 얻었는가!”
호충은 서책을 얻은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단에서 제가 맡은 일 중에 상단의 새로운 거래 품목을 찾는 일이 있습니다. 새로운 거래 품목을 찾다 보면 일반적인 상단이 아닌 흑점과 거래할 기회도 종종 생깁니다. 저는 흑점에서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을 돌아보다가···.”
흑점은 보통 장물을 주로 거래하는 음성적인 거래 시장을 일컬었다. 유통 경로가 불분명하고 진위를 파악할 수 없는 서화나 도서가 거래되기도 하는데, 호충은 남궁 가의 비급을 거기서 얻었다는 것이다.
“이 검보를 입수한 이는 남궁 가의 이름을 걱정하여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저 또한 감히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남궁곤은 서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서책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굳어진 진흙으로 덥혀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서책의 제목만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서책이 오래 땅에 묻혀 있었던 터라 굳어 있기도 하였지요. 괜히 열어보다가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대는 이와 같은 비급의 가본이 시중에 돌아다닌다는 것을 아는가?”
비급의 진위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흑점에서 구입했다 하니 더욱 그러했다.
“물론입니다. 근래 상승 무공이 담긴 비급을 찾는 손님이 많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급은 보자마자 감이 왔지요. 서책 밖에 적힌 용사 비등한 필체는 검의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필체만으로 고수를 판별한다? 어찌 그대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저도 상당한 수준으로 도법을 익힌 터라···.”
옆에서 한천이 한마디 보탰다.
“···제가 졌습니다.”
“뭐?”
“비연과 대련하며 검을 나누었는데, 완벽하게 패배했습니다.”
“뭣이라!”
“어제 잠시 대련하긴 하였으나, 승패는 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남궁 가의 대공자와 친우가 되었으니, 어찌 승패가 중요하겠습니까.”
“친우?”
남궁곤이 돌아보자 한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가문의 중요한 물건을 찾아온 손님이 아닙니까. 저는 어제 비연과 친우가 되었고, 오늘 그 물건을 가문 안으로 들여왔습니다.”
당당한 아들의 태도에 가주는 눈앞에 놓인 비급을 주시했다.
“허. 내가 가품인지 진품인지 당장 확인해보지.”
남궁 가주는 돌처럼 굳어진 진흙을 손으로 내려쳤다.
파앙. 파사삭.
조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친 손길이었지만, 다행히 서책은 상하지 않고 굳어진 진흙만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내공의 수발은 확실히 대단하군.’
호충은 남궁 가주가 서책 안을 확인한 다음에도 자신을 홀대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어서 펼쳐보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