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32)

서른 닷 냥

***

‘갑자기 내가 혼인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왜 궁금한 거야?’

“예? 아직 혼인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한천.”

“예. 아버지.”

“가서 소선이 있는지 보고 이리로 데려오너라.”

“그 아이를 왜···.”

“이 친구를 한번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

한천은 아버지가 친우에게 소선을 선보이려 함을 듣고 비연의 약혼녀를 떠올렸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아버지. 비연은 혼인을 약조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아직 성혼한 것은 아니잖아.”

보통 부인을 둘 셋 두는 일은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궁 가의 여식이라면 어딜 가서도 본처가 될 것이기에 연인이 있다는 말에도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게다가 재력이 있는 중소상단의 후계자라고 하니 여러 부인을 얻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것까지 강요하시면 저 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할 것입니다.”

호충은 한천을 응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소선이가 어디 가서 빠지는 아이도 아닌데?”

“소선이 백을 데려다 놔도 이 친구 약혼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 다른 이가 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나, 아들의 말이라 달리 들렸다.

“···봤어?”

“예. 어제 함께 만났습니다. 천상의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습니다.”

“···그럼 소선이도 안 되고, 준다는 검보 대금도 다 안 받겠다고 하니···. 대체 어쩌라는 말이냐?”

“제가 따로 대화를 나눠보지요.”

“······.”

‘아들이 데려온 손님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제 벗이 되었다고 하니 둘이 대화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제 아들 녀석도 다 컸으니 큰일을 맡겨야지.’

남궁 가주는 아직 멀뚱히 서 있는 호충을 돌아봤다.

“옥 공자.”

“예. 가주님.”

“그럼 비급에 관한 대화는 이 녀석과 나누시게.”

“···배려에 감사합니다.”

호충은 그나마 한천을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적당한 수준에서 가격을 협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잠시 내게 시간을 내주시게나.”

“예?”

“옥 공자의 무공 수위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거든.”

“!”

“나도 겨우 검보의 필체가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옥 공자도 알아보지 않았는가. 분명 상당한 무공을 익혔을 터. 잠시 나와 어울려주시게.”

스르릉.

남궁 가주는 호충의 답도 듣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아들 녀석이 미련하긴 하지만 상당히 고된 수련을 거쳤다네. 녀석을 쉬이 상대했다면 나와 어울려도 무리는 아닐 것이야.”

‘남궁 가는 무공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어쩔 수 없이 어울려야겠어.’

“고수와 겨룰 기회를 마다할 무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마침 가주전이 상당히 넓었기에 대련에 무리가 없었다. 총관과 한천은 훌쩍 뒤로 물러섰고, 넓은 공동에 폭이 넓은 검을 든 남궁 가주와 태도를 든 호충이 마주 섰다.

“하수인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오게.”

호충은 한천에게 보였던 중도를 펼치며 남궁 가주의 수준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부우웅. 떠엉.

‘이 정도는 쉽게 받아내는군. 확실히 한천보다 세 수는 위다.’

남궁 가주 또한 호충의 도를 한번 받은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허! 상당한 수준의 도법이로다! 도법의 이름이 뭔가!”

“황룡살도라 하옵니다!”

“좋구나! 실로 용을 살해할 도법이로다!”

“······.”

한천은 남의 도법을 칭찬하는 아버지를 처음 보는 참이다.

‘도는 산적이나 수적이 사용하는 거라며 낮추어 보셨는데···.’

그런 아버지가 친우의 도법을 크게 높여 보고 있었다.

“타합!”

부앙. 따앙.

호충의 도가 만월을 그려내며 번뜩이는 도광을 토해냈고, 남궁 가주는 어렵지 않게 도를 받아내며 조언했다.

“무거운 중도에 빠른 쾌도를 더하게! 그래야 도의 수발이 편해질 것이네.”

“옙!”

슈욱.

단 한마디 조언에 도의 속도가 달라졌다. 과도한 속도가 아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더해 도격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도격의 강맹함은 더해졌다.

떠덩.

남궁 가주는 두 번이나 검을 놀려 호충의 도격을 해소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 이걸 곧장 적용한단 말인가! 이제 내 검도 받아보시게!”

호충의 세 수를 받아주고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호충은 묵직하게 날아오는 남궁 가주의 폭이 넓은 검을 보며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스승님들을 제외하고 무림 고수와 제대로 상대하는 것은 오랜만이군.’

심상 수련이 아닌 현실에서 무림인과 상대할 일이 많지 않았다. 일전에 진가장을 탈출할 때 겨뤘던 진천대 황 대주가 있었고, 마교의 절정급 마인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또한 홍동에서 사국도를 맞이하여 대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일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고, 정파의 무림 고수와 상대할 일은 손에 꼽았다.

‘남궁 가주는 앞으로 정파 무림인을 상대할 때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호충은 넓은 도면으로 찔러오는 검을 비껴냈다.

티잉.

검은 옆으로 튕겨 나가면서 다시 회전했고, 끊임없이 호충의 몸을 향해 진격했다.

‘검의 압박이 상당하군.’

세검으로 찔리나 중검으로 찔리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겠으나, 중검이 주는 압력은 세검과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몸이 훅훅 밀려날 정도였다.

슈슉. 부아앙.

따다다당. 따다당.

특히 찌르던 검이 갑작스럽게 회전하여 도처럼 날아드는 것이 위협적이었다.

떠덩. 떵.

호충은 세 번의 도를 펼쳐 검격을 해소하며 뒤로 물러섰다. 남궁 가주가 보인 것과 비슷한 힘의 해소였다. 가주는 호충의 신형을 쫓지 않고 눈을 빛냈다.

“······정말 욕심나는 놈이로다. 마른 땅이 물을 흡수하듯이 무공을 익히는구나.”

호충은 더이상 대련을 이어가면 밑천을 보여야 할 것 같아 얼른 도를 회수하며 마무리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가주님.”

“자네. 정녕 내 딸을 만나보지 않겠나?”

“실로 곤란한 말씀이시옵니다. 남궁 가의 금지옥엽은 제게 과분합니다.”

“허어. 이를 어쩐다.”

가주는 너무나 아쉬웠다. 사위로 삼아서라도 가문과 이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천은 친우가 곤란한 지경이라 얼른 나섰다.

“아버지. 친우의 무공을 보셨으면 이제 제게 시간을 주시지요. 계속 붙잡아두실 요량입니까?”

“···너는 근시일 내로 옥 공자와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예. 그리하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주님. 보중하십시오.”

호충은 얼른 가주에게 포권하며 작별을 고했고, 한천과 함께 가주전을 빠져나왔다.

남은 가주와 총관은 호충이 나간 문을 보며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 녀석을 어찌해야 좋을까···.”

“무공의 재능은 비범하고 심성은 올곧지요. 게다가 상단의 후계자라 하니 재력도 나무랄 바가 없습니다. 삼십오만 냥을 단번에 낼 수 있는 재력을 갖춘 상단은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삼도상단은 상인의 세 가지 도를 따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들었습니다.”

“상인의 세 가지 도? 그게 뭔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손님을 속이지 않으며, 언제나 정심으로 바른 물건을 판매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정도(正道)를 표방하는 상단인 셈이지요.”

실제 하오문 산하의 삼도상단이 표방한 세 가지의 도였다.

“허허. 집안의 어른을 보지 않아도 훤히 그려지는구나. 옥 공자가 바르게 클 수밖에 없었겠어.”

“무림 방파의 어디에서도 저런 인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없었지.”

“제가 소선 아가씨께 따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소선이는 내가 무림의 후지기수를 소개한다고 해도 질색하지 않았나.”

“그야 지금까지 눈에 차지 않으셨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옥 공자는 혼인을 약속한 이도 있다는데···.”

“본래 약속은 잘 깨지는 법입니다.”

“흐음···. 한천이 옥 공자와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게. 소선이 밖으로 나가서 저녁을 들지도 모르겠어.”

“예. 가주님. 그리하겠습니다.”

우연하게라도 소선을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

남궁 세가의 정문을 나선 호충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할 지경이다.”

“큭. 아버지 앞에선 대차게 들이대던 네가?”

“들이대긴 내가 언제! 가주님이 강요하신 거잖아!”

“아버지와 대등하게 검을 섞다니···. 난 그게 더 대단하다 느껴져.”

한천은 아버지가 언제나 거대한 산으로 보였다. 아버지와 대등하게 검을 섞는 일은 꿈에서나 그려본 일이었다.

‘어제 비연이 보여준 도는 나를 배려한 것이 분명했어.’

“됐고! 어쨌든 대충 일은 마무리되었으니 객잔으로 가자.”

“마무리? 아직 우린 검보의 가치에 대해···.”

“어허. 남궁 가의 대공자가 입이 이렇게 가벼워서야.”

“헙. 입조심은 내가 해야겠군.”

남궁 가의 검보는 외부에서 함부로 입을 열 사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친우가 어? 이미 얘기까지 다 했는데! 어? 난 모르네? 아무것도 못 들었네? 이게 할 소리야?”

“······다 자네 잘되라고 하는 소리 아니었는가.”

“됐고! 이따 집에 가서 서른 닷 냥으로 결정 났다고 알려드려!”

누가 들을까 금 삼십오만 냥이라 하지 않고 서른 닷 냥이라 한 것이다.

“자네. 내가 집에서 쫓겨나는 꼴을 보고 싶은가?”

“하아. 내가 그리 힘들게 설명했는데···.”

“우선 술이나 마시면서 얘기하세. 응?”

“에효. 그러시던가.”

‘뭐지?’

호충은 한천과 객잔으로 가며 기감으로 뒤따르는 남궁 가의 무사들을 느꼈다.

‘나름의 보호? 아니면 내가 도주라도 할까봐?’

더 받을 생각은 없지만, 본래 받으려던 가격은 받아낼 생각이었다.

‘내 돈은 다 받아낼 것이니 걱정마시오!’

호충은 무사들이 따라와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서 쫓겨나면 너는 더 좋지 않아?”

“허.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이 좋긴 뭐가 좋아?”

“집안 눈치 안 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한천은 잠시 잊고 있었던 월향을 떠올렸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가문을 빼면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한 몇 년 밖에서 살다가 덜컥 애라도 만들어 오면 어쩌겠어? 집안 장손이 손주를 낳아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크흠. 큼. 그, 그거 생각지도 못한 좋은 생각이긴 하군.”

“좋기는 개뿔.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는 생각은 못 하는구나? 부모 마음이 마음이겠어?”

“아.”

“이래서 자식새끼는 낳아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지 않았다니까. 가주님. 아드님 교육을 더 확실히 하셔야겠습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나보고 어쩌라고?”

“중심 잘 잡으라고! 너도 확신이 없으면서 괜히 열심히 일하는 기녀한테 바람 넣지 말라는 소리다. 내 연인이 기루를 운영하는데 그런 일을 한두 번 봤겠어?”

“······.”

호충은 과거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의 일화를 지금에 맞게 각색해서 들려줬다.

“마음만 앞선 지체 높고 어리숙한 공자가 자주 그랬지. 기녀는 가슴에 헛바람만 가득 차서 공자를 따라갔다가 결국은 다시 기루로 돌아오더라. 그렇게 나이를 먹어 돌아오면 청루로 다시 갈 수나 있을 것 같아? 이미 혼인까지 파하고 왔으니 홍루로 직행이야.”

“···그, 그건···.”

“고작 하루 만난 기녀한테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

한천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친우의 말대로 확신이 없었다.

호충은 고민에 빠진 한천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겼다.

“빨리 와. 허약하고 줏대 없는 녀석.”

“뭣!”

“꼬우면 다시 덤벼 보시던가. 앙?”

“···나, 나중엔 다를 것이야. 내가 창궁···.”

창궁무애검법을 익히면 이길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야. 너 머리가 돌이야? 이번엔 그걸 입에 올리네.”

“아차차.”

호충과 한천이 투덕거리며 객잔으로 들어가자 멀리 따르던 무인 중 하나가 얼른 남궁 세가로 몸을 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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