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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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남궁 세가에서 마차가 빠져나왔다.
“왜 갑자기 밖으로 나가서 저녁을 먹고 오라하시는 거야?”
소선은 이유도 모르고 호충과 화진이 머무는 객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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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은 어제처럼 술을 들이키며 물었다.
“크흐. 그런데 네 연인은 갑자기 어딜 갔어?”
잠시 함께했던 화진은 둘을 남겨두고 자리를 피했다. 호충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달라고 전음을 전한 것이다.
‘검보의 대금에 대해 대화하려면 화진이 자리를 피해야지.’
“황산에 둘러볼 곳이 많다고 하더라. 나를 따라 이 멀리까지 왔는데, 구경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잖아.”
“너는 왜 안 따라갔어? 혼자 가면 무슨 재미야?”
“나는 남궁 가의 대공자님을 모셔야지. 앞으로 삼도상단의 큰 손님이 될 지도 모르는데.”
“하! 아까는 그렇게 무시하더니?”
“무시는 할 만하니 하는 거고.”
“이익!”
“크크. 네가 발끈할 때가 제일 재미있더라. 이러니 내가 안 놀릴 수가 있나.”
“후우. 평정심. 평정심.”
그 사이 객잔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었기에 사람이 몰린 것이다.
호충은 소란 속에 잔뜩 무게를 잡으며 오늘 남궁 세가에 전한 검보를 입에 올렸다.
“한천. 아까 들었겠지만, 가주님과 총관의 생각은 과도한 면이 있어.”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가문의 대공자로서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야. 너는 분명 네가 나와 결론을 내린다 하였고, 가주님도 이를 허락하셨지.”
“그리고 나는 친우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어. 내 마음도 두 분과 다르지 않아.”
“이거 답답하네.”
“···나는 오늘 낮에 네가 전한 말을 듣고 솔직히 너를 의심했었다. 네가 상인으로서 나를 잘해준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오오. 기본 머리는 있었던 모양?”
한천은 가볍게 넘어가려는 호충의 말에도 속지 않았다.
“사과하겠다. 미안하다. 비연.”
“어허. 친우에게 왜 고개를 숙여? 또한 가문의 대공자로서 당연한 일이야. 괘념치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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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고 또한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대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 기분이 나쁜 참이었다.
‘오라비의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 남궁 가의 대공자인 오라버니에게 감히?’
하지만 상대는 오히려 자리에서 일어나 오라버니의 허리를 세우며 손을 내젓고 있었다.
‘···뭐.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닌 모양이군.’
식사를 하러 왔지만, 오직 둘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소선은 계속 둘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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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너는 배울 것이 많은 친우라는 것을 알았다. 여인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공과 사람을 대하는 것까지···. 하나 같이 대단했어. 오늘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친우가 아니라 형님으로 모시고 싶을 지경이다. 비연의 나이가 나보다 많은 것 같으니 형님이 낫지 않을까?”
“새로운 고문방법이야? 적당히 하지? 아니면 내 말대로 가격을 밀어붙이던가.”
“그래. 너는 이런 친우였지.”
“에효. 다시 반복해야 하나?”
친우가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도록 한천이 먼저 확정지어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서른다섯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건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수준의 금액이야.”
‘삼십오만 냥이면 넉넉하게 불렀다 여겼거늘···.’
호충은 아무래도 조금 더 받아야 이번 일이 끝나겠거니 싶었다.
“그래서. 한천 네가 생각한 것은 얼마야? 네 사정을 되도록 맞춰주마.”
“총관님이 처음 일흔넷에 스물의 융통까지 입에 올리셨으니 최대가 아흔넷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정을 보아 맞춰줘도 두 배 이상은 무리였다.
“그랬지. 하지만 그건 불가. 너도 알지?”
“그래. 나도 네가 받아들일 일이 아님은 충분히 이해해. 그래서 아까부터 고민을 이어왔어. 내 생각엔 일흔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오. 많이 내려가긴 했지만, 지금도 과하다.”
“그럼 예순다섯은 어떠냐.”
“에효. 그냥 예순으로 끝내자. 스물다섯을 남겨도 너무 많이 남긴다 싶긴 하지만, 너희 가문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서 또 깎는단 말이야?”
“나중에 네가 혼인하면 목 좋은 곳에 장원이라도 하나 지어주마.”
“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앞으로 꾸준히 보자는 소리지. 대신 삼도상단이 남궁 가와 작은 거래라도 할 수 있게 가주님께 언질이나 해줘.”
“너 상인이 맞기는 한 거냐? 왜 덜 남기지 못해서 안달이야? 너희 상단을 이끄시는 상단주도 이문을 많이 남겨오면 좋아하실 것인데···.”
외조부가 상단을 세웠다고 했으니, 친우의 부친이 상단주로 일하겠거니 여기고 있었다.
“정심으로 장사하는 것이 우리 삼도상단의 기본 정신이다. 나를 속이지 않고 너를 속이지 않으려 함이다.”
“······.”
사기 치는 이의 말은 얼마나 감미롭던가.
“서른다섯에 산 것을 두 배인 일흔이나 받았다고 하면 내가 쫓겨 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라면 맞아죽을 지도 모르지. 외려 더 싸게 넘겨줘야 한다고 하셨을 거야.”
“···부친도 대단하신 분이네.”
“부친은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다. 상단주이신 외조부께서 부모님이 안 계신 나를 정성으로 길러주셨다. 내게 외조부의 말씀은 곧 법이야.”
“어···. 비연은 부모님이 안 계셨구나···.”
이미 옥비연의 얼굴을 하고 상단주의 자제 노릇을 할 때부터 만들어둔 이야기였다. 전에 제갈 세가에서 비급을 팔아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옥비연은 배수들의 방인 배방의 방주이자 하오문의 훈련교관을 겸하고 있었지만, 이후 삼도상단이 속한 상방의 방주 노릇을 하는 것도 얘기된 바였다. 훈련 교관의 일은 조만간 사중환과 다른 문도들에게 넘기기로 했고, 배방의 방주 일은 전부터 함께했던 장위가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상방의 방주는 서안에서 놀고 있는 송 영감에게 맡겨둔 상태였다.
“오래전 일이니 그리 마음 쓸 필요는 없다.”
“휴우. 그나저나 집에 가면 내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 겨우 이 금액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말씀드리면···. 맞아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가주에게 육십만 냥으로 얘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고맙다. 내 고집을 이해해줘서.”
“그리고 아까 네가 부탁한 대로 너희 상단과의 거래를 시작하는 일을 건의해볼게. 이미 가문과 관련된 상단이 많지만, 가주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실 거야. 적당한 소규모 물품 정도는 공급할 수 있겠지.”
“그것이 진정으로 고맙군. 오늘의 일은 정상적인 상행이 아니었으니까. 남궁 가에 납품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 만족일세.”
“너는 무공이 그렇게 높으면서···.”
‘항상 상인의 일이 먼저구나.’
한천은 자신의 친우가 무림의 일보다 상인의 일을 우선하는 진정한 상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네가 좋구나.’
의뭉스러운 속내를 감추고 겉멋만 들어있는 무림의 후지기수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연인에게 모든 것을 내바치는 친우가 마음 속 깊이 각인되었다.
“큭. 오늘의 성공적인 거래를 축하하며 잔을 들지 않을 수 없겠어.”
“좋다.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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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은 기쁘게 잔을 들어 들이부었고, 소선은 그런 오라버니의 모습을 입을 삐죽거리며 바라보았다.
‘쳇. 뭐가 맛있다고 술을 저리 먹어?’
나온 음식을 깨작거리며 먹던 소선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눈을 빛냈다.
‘드디어 나가는 구나!’
아직까지 오라버니와 대작한 이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소선의 관심은 오롯이 상대에게 쏠려 있었다.
‘대체 어떤 이가 오라버니와·········.’
상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비단 옷자락을 한차례 털었고, 천천히 몸을 돌리며 오라버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옥 같은 뽀얀 얼굴과 쭉 뻗은 팔과 다리, 귀공자처럼 보이는 그는 얼굴에 구김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의 소란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그의 모습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소선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것이다.
“!”
쿵.
환히 웃으며 오라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를 본 소선은 자신의 심장이 어디론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오라버니와 상대가 객잔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소선은 자신의 입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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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 밖으로 나온 한천이 확언했다.
“내일 이 객잔으로 사람을 보낼 터이니, 함께 장원으로 오면 될 거야.”
“자신 있는 거지?”
“되든 안 되든 해봐야지. 나는···.”
친우가 상인으로서 확고한 길을 가는 것처럼 자신도 남궁 가의 무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움직이고 싶었다.
“남궁 가의 대공자 남궁한천이니까.”
허리에 양 손을 올리고 가슴을 쭉 편 한천의 모습에 호충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풋. 지금 내 앞에서 뭐하는 거냐? 영웅의 출사표? 어디 전쟁 나가?”
“쫌! 그냥 넘어가!”
***
한천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내일 아버지께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육십만 냥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안 된다고 하실 것 같은데···.’
창궁무애검법을 삼십만 냥에 사려고 했으니, 제왕검형은 그보다 더 높아야 했다. 그렇게 따지면 최소 칠십만 냥부터 흥정을 시작했어야 옳았다.
‘이걸 육십만 냥에 사기로 했다고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쏟아낼 불호령이 뻔히 그려졌다.
[남궁가 검보의 가치가 고작 육십만 냥에 이르겠느냐! 외부에 알려지면 가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질 일이야!]
“흐음···.”
고민 중에 방문한 이가 있었다.
“오라버니. 안에 계셔요?”
자신의 방에서 오라버니를 찾을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소선이냐? 어서 들어와.”
소선은 조신한 걸음으로 한천의 방에 들어왔다.
“어제 집에 안 들어오셔서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더니···. 멀쩡하네요?”
“너는 오라비가 혼이라도 났으면 하는 눈치구나?”
“호호.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앞으론 그럴 일 없다.”
월향이 마음에 걸리지만, 앞으로는 연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대공자의 직분에 충실할 다짐이었다.
“······.”
소선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꺼내기 쉽지 않았다.
“저···. 오라버니?”
“응. 왜?”
무심한 한천은 소선의 얼굴에 쓰인 난감함을 읽지 못하고 아버지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옳을 지 생각하고 있었다.
“···고민이라도 있어요?”
본인 마음에 고민이 있어 한천의 얼굴에 그려진 고민이 더욱 뚜렷하게 들어왔다.
“조금. 아버지께 조금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받아들이시기 힘들 것 같아.”
“제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
한천은 자신보다 영특하다고 평가 받아온 여동생에게 조금 도움을 받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실전한 가문의 비급이라는 것만 말하지 않으면 되겠지. 그리고 나중엔 소선도 알게 될 일이고.’
“우리 가문에 호의를 가진 이가 가문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왔다고 치자.”
“네. 그래서요?”
“그는 가문에 지극한 호의를 갖고 있기에 되도록 적은 가치를 산정해 넘기고 싶어 해.”
“오오. 좋은 일이네요? 물건을 가져온 이는 싸게 넘기려고 하고 우리에겐 필요한 물건이고요.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아직 모든 정보를 듣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