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232)

강소성(江蘇省)으로

***

“월하검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무척 궁금하군.”

“외부에 감춰왔던 터라 말씀드리기 곤란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남궁곤이 아니었다.

“월하답보를 대성했다는 외조부와 자네를 비견하면 어떤가?”

간접적으로라도 월하검문의 검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는 외조부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합니다.”

“!”

이미 검을 나눴던 터라 옥비연의 무공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외조부와 일초지적도 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필패라는 뜻과 같았다.

‘그런 검문이 어찌하여 지금까지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호충은 남궁 가주의 생각을 읽은 듯이 답했다.

“관에 무공을 숨기고 있었던 터라···.”

이는 월하검문의 무공이 곧 상승무공이라는 뜻이었다.

“허허! 은거고수셨군. 어서 뵙고 싶어.”

“외조부와 함께 다시 이곳으로 오자면 바로 길을 떠나야 할 것이옵니다.”

“이런. 연회라도 열어 가문의 보물이 돌아온 기쁨을 나누고 싶었는데···.”

“외부에 알릴 단계는 아닌 것으로 압니다. 관에 허락을 받기 전까지 외부에 각별히 보안을 유지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실례되는 언행이라는 것을 알지만, 남궁 가를 염려하여 드리는 말씀이오니 부디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아들과 달리 생각도 깊고, 처신도 훌륭하구나.”

“······.”

한천은 자신과 계속 비교하는 아버지의 말을 한귀로 흘려버렸다.

‘비연이 똑똑하긴 하니까.’

“외조부께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고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가주님.”

“그렇게 하세. 옥 공자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지. 그때는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니···.”

돌아온 남궁 가의 검보를 익혀 더욱 강해지겠다는 뜻이었다.

“무운을 비옵니다. 남궁 가는 중원 무림의 푸른 하늘을 가르는 지고한 제왕의 검이 될 것입니다.”

“허허허. 옥 공자의 축언을 들으니 당장이라도 검식을 익히고 싶어져. 허허허. 어서 떠나게. 그리고 어서 돌아오게.”

“보중하십시오. 가주님.”

호충은 가주가 붙잡을까 얼른 가주전을 나섰고, 한천과도 짤막하게 인사를 나눴다.

“간다. 한천.”

“급하게도 가네.”

“안휘성까지 외조부를 모셔오자면 한시가 급하다. 이런 큰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정말 좋아하실 것이야.”

“그래. 어서 다녀와라. 기다리마.”

“또 보자.”

.

.

.

한천은 호충을 장원 밖으로 보내고 가주전으로 돌아갔는데, 가주전을 기웃거리던 소선이 한천의 눈에 걸려들었다.

“넌 여기 왜 왔어?”

“···오라버니. 그 분은 언제 오시는데요?”

“내 벗? 그는 벌써 갔지. 아버지도 뵙고 거래도 훌륭하게 잘 끝났고···.”

“!!”

그토록 오늘을 기다렸건만 길이 어긋나 버린 것이다.

“넌 얼굴이 그게 뭐냐?”

소선은 분을 얼마나 발랐는지 얼굴만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얼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누가 보면 낮에 귀신이 나왔다고 기절하겠는데?”

“···모, 몰라요!”

소선은 그를 보기 위해 한천에게 작별도 고하지 않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예쁘게 보이려고 한껏 준비했더니!’

소선은 그가 머물고 있다는 객잔으로 가려고 밖으로 향했다.

“아차. 화장부터 지워야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소선은 들뜬 분을 부랴부랴 지워냈다.

***

호충은 객잔으로 가서 화진을 불렀다.

“가가. 어찌 그리 급하게 부르셔요.”

“작업 끝.”

남궁 가를 벗겨먹는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소가주를 구워삶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가주와 총관까지 홀라당 넘어왔다.

‘호구는 자신이 호구인지 모르는 법이지.’

다른 무림 방파와 달리 앞으로도 쭈욱 벗겨먹을 예정이었다.

“가자.”

“벌써요? 한참 걸릴 줄 알았더니.”

“일이 잘 끝났어. 이제 놀자!”

“호호호. 저와 놀고 싶어서 일을 빨리 끝내셨어요?”

“그럼! 여기까지 와서 뱃놀이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잖아. 하오문에는 여기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서 서찰을 보낼 터이니, 우리는 마음 편히 놀면 되는 거야.”

“···가가는 저와 마음이 정말 잘 맞아요.”

안 그래도 호충과 뱃놀이를 가지 못해 서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으로 가능하겠어요?”

우드득.

호충은 금방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변신 완료. 이제 날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걸?”

“호호. 안 그래도 옥 대협의 얼굴을 계속 보자니 속이 거북하던 참이었어요.”

황산에서는 대부분 호충의 본 모습이 아닌 옥비연의 얼굴만 마주했기 때문이다.

“내가 비연에게 다 이를 거야.”

“호호호.”

길고긴 서찰을 작성해 하오문도에게 넘긴 호충은 화진과 밖으로 나갔고, 누가 볼 새라 얼른 마차에 올랐다.

.

.

.

“왜 안 보이시지? 벌써 가셨나?”

객잔에서 옥비연을 찾던 소선은 이미 객잔에서 나갔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소선은 크게 한숨을 쉬며 자책했다.

“하아. 님이 가셨다니···. 괜히 다시 화장을 지우느라 시간을 지체했어. 그냥 나올 걸. 그랬다면 옥 공자님을 뵐 수 있었을 텐데···.”

소선은 아직 출발하지 않은 마차의 곁이었다. 그녀가 바라던 낭군이 바로 그녀의 곁에 있었다. 호충은 본래의 모습으로 그녀 곁을 지나 마차에 탑승한 참이었다.

.

.

.

마차 안에서 밖의 상황을 살피던 화진은 눈을 반짝 빛냈다. 소선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소선이 마차에서 멀어지자 호충에게 물었다.

“누구죠?”

“나, 난 몰라. 정말이라니까?”

화진은 마차 밖의 인물을 불렀다. 루방의 방도였다.

“자은.”

“예. 방주님.”

“조금 전 마차 곁에 있었던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봐.”

“예. 바로 알아오겠습니다.”

마차가 출발해서 가는 동안 호충은 정말 억울하다고 항변했지만, 굳은 화진의 얼굴을 펴지지 않았다. 그리고 화진이 지시한 일에 답변이 돌아왔다.

“방주님. 자은입니다.”

“누구더냐.”

“황산에서 유명한 여인이라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남궁 가주의 딸 남궁 소선입니다.”

“향후 일봉이 될 거라는?”

황산에 도착하면서부터 경계했던 여인이었다.

“예. 바로 그녀입니다.”

“······.”

화진의 눈이 호충을 노려봤다.

“언제 또 그런 짓을 하셨을까? 내가 그토록 경고했는데 말이죠. 전부 이실직고하세요!”

“난 얼굴도 본 적 없는데?”

호충은 당당했다.

“설마요. 이미 그녀는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아니면 어떻게 저리 마음을 빼앗겼겠어요?”

“내가 아니라 비연이겠지.”

호충이 지금까지 비연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무렴 어때? 비연이 좋다고 하면 맺어주면 되지.”

하나도 복잡할 일이 아니었다. 서로 좋다면 맺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옥 대협과 남궁 가의 금지옥엽을 이어준다고요?”

“나와 대화도 안 해봤다니까? 분명 비연이 반반한 얼굴만 보고 반해버렸을 거야. 어차피 앞으로는 비연과 송 영감이 남궁 가에 들락거려야 할 테니 잘 됐지 뭐.”

“정말 가가와는 따로 만나지 않은 거죠?”

“어허. 서방을 어디까지 의심해? 난 황매 외에 아무도 없어.”

“흠흠. 죄송해요.”

“그래도 가끔 이런 일도 좋네. 그대가 내게 관심을 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화진은 풀어진 오해에 웃음을 되찾았다.

“아이참. 가가는 가끔 엉뚱하게 말씀하세요. 호호호.”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 그대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야. 내 마음을 온통 그대가 차지하고 있는데, 누가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있을까.”

오늘따라 가슴에 훅 들어오는 연인의 말이 감미로웠다.

“···가가.”

“우린 뱃놀이나 하며 편히 쉬자고. 오늘 서방이 얼마나 벌어왔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걸?”

“호호. 얼마나 버셨는데요?”

호충은 화진에게 전음으로 전했다.

[남궁 가의 실전된 검보 값으로 육십만 냥.]

“!”

화진은 호충이 지금까지 비급을 팔아 돈을 벌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돈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향후 남궁 세가의 전 사업장에 물건을 공급할 권리가 담긴 가주의 수결이 찍힌 계약서!]

“헙!”

비급의 대금도 엄청났지만, 앞으로 하오문 산하의 삼도상단이 거대 상단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감축 드립니다. 문주님. 모두 문주님의 공입니다.”

“우리 문이 성장하는 것은 내 성공이 아니라 모든 문도들의 성공이야. 그러니 방주도 축하를 받아야지. 축하해 방주. 하하하.”

“······.”

‘이러니 우리 문도들이 문주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잖아요.’

호충은 하오문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언제나 일선에 나서서 문도들을 이끌었다. 지역의 흑패주 자리에만 앉아도 뒤에서 명령하는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법인데, 일문의 문주로 올라선 호충은 그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것이라 여겨도 될 하오문인데, 언제나 문도들을 앞에 두고 자신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덕분에 루방의 기녀들 중에도 문주인 호충을 흠모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호충의 본 모습이 아닌 송재호라는 이름을 가진 엉뚱한 얼굴의 문주를 흠모하는 것이지만, 화진에겐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년들 단속하느라 얼마나 힘들 줄 아세요?’

“가끔은 문주님도 따로 챙기세요. 그리고 하오문이 오래 유지되려면 더 단호하고 엄한 문주님의 모습도 필요해요.”

“아니야. 하오문은 하오문의 문도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선 안 되는 거야. 단체의 존립과 유지는 문주가 아니라 문도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법. 내가 하오문을 개파하고 문주가 되었지만, 하오문은 내 것이 아니지. 하오문은 문도들의 것이고 문도들에의해서 유지될 거야.”

호충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조폭들과 어울리고 불법적인 일에 몸을 담았어도 조직을 구성하고 꾸려나가는 근본에는 민주주의와 구성원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한 마음으로 하오문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이번 생의 목표로 삼았을 뿐이다. 하지만 옥비연과 사중환이 밑으로 들어오고,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고 또 왕호를 비롯한 흑패의 동생들이 늘어가며 점차 바뀌어 간 것이다.

무엇보다 중원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오문을 통해 이들의 삶에 가치를 더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하오문을 문주의 마음대로 이끌어 가면 지금까지 그들이 살았던 삶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라의 모든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할 수는 없지만, 내 사람만은 챙길 것이다.’

“···문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일파의 장문인이나 세가의 가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큭. 없으면 어때? 내가 시작하면 되는 거지.”

이렇게 매력이 가득한 연인에게 누가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맨날 나만 힘들게 만들고···.”

“그래도 팔아먹은 비급은 본래 내 것이었으니, 조금은 써도 괜찮아. 갖고 싶은 건 뭐든 말해. 다 사주지.”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요. 문주님. 저도 방주로 받는 월봉이 상당하거든요?”

하오문의 방주를 비롯한 문도들은 고정된 월봉을 받고 또 성과에 따라 추가 월봉을 받는다. 문도들이 받는 높은 월봉도 하오문의 문도들의 충성심이 날로 커지는 중요 이유 중 하나였다.

“에이. 그래도 서방님이 사주는 거랑 다르지.”

“우린 어서 뱃놀이나 가요.”

“그래! 가자! 오랜만에 황매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여야겠어.”

“그럼 강소성엔 뱃놀이 끝나고 가는 거죠?”

“······.”

호충은 강소성(江蘇省)의 중심인 남경(南京)을 떠올렸다.

‘···아버지.’

남경에 진휘평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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