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단
***
‘···아버지.’
호충이 듣기로 진휘평은 야음을 틈타 남경 근방의 관인들과 장군들을 접선하고 있었다.
호충에게 이번 일에서 빠질 것을 부탁했지만, 어찌 그 말을 따를 수 있겠는가. 현재 남경에는 하오문의 문도들이 파견되어 흑패주 정리를 위한 물밑작업을 시작하며 정보를 물어오고 있었고, 덕분에 아버지의 은밀한 행적도 일부 파악한 것이다.
“···끝나고 ···가야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남경으로 가야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마교의 세력과 함께 움직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노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
야밤에 소수의 인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넓은 갓에 천을 늘어뜨려 모습을 감춘 이가 중간에 있었고, 다른 이들은 호위하듯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언제 오는 것인가? 일처리가 느리군.”
“진 대인. 금방 올 것입니다.”
진휘평과 마화평이었다.
마화평의 말대로 다른 누군가가 일행으로 다가왔다. 묵혈단을 이끌고 있는 장문소였다.
“대인. 이쪽입니다.”
마중 나온 장문소를 따르니, 곧 작은 전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분의 사가는 감시가 있어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잘 했네. 다들 주변에서 대기하게. 나 홀로 들어갈 것이네.”
하지만 마화평이 나서서 진휘평을 반대했다.
“대인. 저는 따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하고 행한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가?”
“제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마 장로 마음대로 하게.”
언제나 진휘평의 지근거리에서 감시하던 마화평은 모든 일에 진휘평과 함께하고 있었다.
진휘평과 마화평은 작은 전각으로 들어갔고, 곧 자신을 기다리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한 소식이 거짓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진휘평이 갓을 벗어 마화평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나인지 확신하지 않으면서도 여기까지 나왔는가.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갑군.”
“!!”
그 인물은 얼른 몸을 숙여 절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자신을 초청한 이에게서 듣기는 하였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세천세천천세. 신 종사현 진 왕야를 뵈옵니다.”
“하하하.”
“크흑. 신은 왕야만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했습니다. 드디어 하늘이 제 바람을 들어주셨나이다.”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와 미안하이. 종 대학사.”
대학사라는 관직은 재상과 승상과 더불어 황제 아래 중앙의 가장 높은 세 관직 중 하나였다. 본래 재상과 승상도 종 대학사와 뜻을 같이하던 인물들이었으나, 황제에 의해 다른 이로 바뀌고 종사평만 남아 있었다.
“그간 어찌하여 모습을 숨기셨습니까. 왕야를 따르던 저희는 구심점을 잃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릅니다.”
“······.”
진휘평은 준비했던 변명을 전했다.
“형님께서 날 죽이려 사람을 보냈네. 이는 이미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찌 형제에게 그런 무도한 짓을···.”
“내가 형님께 붙잡혀 죽지 않으려면 숨어 지내야 했지.”
“······.”
대학사 종사현은 내뱉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입만 우물거리다가 삼켜버렸다. 당장이라도 현 황제를 끌어내리자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일이 또 있네. 대학사.”
“······.”
“그대를 가장먼저 찾아왔어야 하나 가장 마지막에 찾아왔어.”
“!”
“이미 남경의 주둔장군과 육부의 상서들을 만났네. 모두 그대처럼 나를 따르던 이들이지.”
“그, 그렇다면!”
나라의 중요 대신들과 장군까지 대면했다면 정말 자신이 마지막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황제파였기 때문이다.
“남경에선 그대가 마지막이야. 가장 중요한 인재라 마지막에서야 보러 왔다네. 종 대학사. 내 손을 잡아주겠는가?”
“커흑. 흐흑.”
종사현은 눈물만 주르륵 흘리다가 답했다.
“언제든 하명하소서. 신 종사현 진 왕야의 명만 기다렸나이다.”
진휘평은 종사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올렸다. 종사현은 꿇어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여전히 깊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어 고맙네. 완벽하게 준비해 대계를 이룰 것이네.”
“신 종사현. 명을 다 바쳐 왕야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진휘평은 종사평의 어깨를 두드리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백성들의 고된 삶을 보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네. 매관매직과 과거 부정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크흑. 뻔히 황제파의 전횡을 보면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네. 이제 그들의 전횡을 끝내야 할 때가 왔네.”
“저는 왕야께서 만나지 못하신 다른 대신들과 장군들을 모아보겠습니다.”
“부탁함세. 나는 국경으로 가서 역전의 장군들을 만날 것이네.”
“···그들은 황제에 의해 변방으로 보내졌습니다. 대부분 왕야를 따르던 이들이니, 어렵지 않으실 것입니다.”
“형님은 그들을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겠지.”
“변방에서 오랑캐와 싸우다 죽기를 바랐겠지만, 오히려 전공을 쌓을 기회만 주었지요. 장군들은 변방에서 신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하하. 우리 장군들의 능력이 그리 출중하다니 정말 믿음직하군.”
“···왕야. 제가 사람을 붙여드릴 터이니···.”
마화평은 대학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썹을 찡그렸지만, 진휘평이 먼저 거절했다.
“괜찮네. 내가 준비도 없이 대계를 시작했겠는가. 나를 따르는 이들이 있네. 이들과 함께 움직이면 은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나는 그대를 걱정할 뿐이네. 부디 황궁의 눈을 피해 움직이게.”
종사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휘평 곁에 서 있는 마화평을 돌아봤다.
“···그대들에게 왕야의 보호를 맡겨도 되는가?”
“지금까지 훌륭하게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휘평을 보호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지난 수년 간 진휘평을 따르던 신하들은 작은 종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
“우리는 앞으로도 음지에서 왕야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왕야께서 뜻을 이루시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무림의 작은 세력에 불과합니다. 중앙의 관직을 원하지 않고, 그러니 국정의 운영에 참견할 일도 없지요.”
진휘평은 마화평의 말에 동조하며 나섰다.
“이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네. 훗날 내가 따로 챙길 것이네.”
“예. 왕야.”
“대학사. 우리는 할 얘기가 많은 것이야. 이들에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네.”
“예. 왕야. 경청하겠습니다.”
이후 진휘평은 종사현과 향후의 일을 의논하며 긴 시간을 보냈고, 새벽이 밝기 전에 헤어졌다. 진휘평은 마화평 장로와 다시 길을 걸었다. 일이 잘 풀려 모두가 긴장을 조금 내려놓은 상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이 이렇게 수월하게 풀려가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나 싶습니다.”
“···꽃이 질 때가 된 것이지.”
진휘평은 역천을 위해 움직이며, 향후 마교를 어찌 쳐내야 할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너희의 때도 머지않았다. 황궁의 힘으로 너희를 멸할 것이다.’
진휘평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지 못한 마화평은 환히 빛나는 앞날만 떠올리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언제나 새로운 꽃이 피어나기 마련이지요. 흐흐흐.”
“남경에서 조금 더 머물며 종 대학사가 진행하는 일의 경과를 살필 것이다. 이후에 국경으로 출발할 것이니 그리 알게.”
“예. 대인.”
“황궁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야. 혹여 나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황궁의 시야에 걸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니···.”
“명심하지요. 저희가 사전에 황궁의 행사를 살피고 그들에게 경고할 것입니다. 여기 장 교사가 어둠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요.”
장문소는 예전과 달리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군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이승에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다. 너희도 조심해야 할 것이야.”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황궁의 세력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의 움직임은 황궁의 세력이 아니라 새벽녘에 장사를 시작하는 이들이 보고 있었다.
‘왕야께서 어젯밤에 누군가를 만나려 움직이셨음. 이미 만나고 돌아온 것으로 보이며,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음.’
또한 멀리 작은 전각에서 나서는 대학사 종사현의 움직임도 봇짐을 이고 이동하는 행상의 눈에 들어왔다.
‘대학사 종사현이 움직였음. 누군가를 만났음이 확실하나,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음.’
이들의 보고는 한 곳으로 모여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진 왕야가 대학사 종사현과 만났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이들이 하오문의 문도들이었다.
***
화진과 짧은 뱃놀이를 끝내고 남경으로 돌아온 호충은 남경에서 급한 일정을 소화한 다음, 하오문 문도들이 취합한 정보를 보고 있었다.
“진 왕야가 종사현을 만났군. 가장 중요한 이를 마지막에서야 찾았어.”
호충과 하오문도들이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가장 큰 흑패를 접수하고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남은 일은 자잘한 흑패들을 정리하고 뒷골목을 정화하는 일이었다. 남경은 황궁이 자리한 곳이라 흑패가 활동하기 적합지 않았기 때문에 하오문이 차지할 거대한 흑패는 오직 하나였다.
“···예. 문주님. 황실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호충 앞에서 보고하는 이는 임시로 하오문의 남경 정보단을 이끌고 있는 인물로, 남경 흑패의 이인자인 유도영이라는 인물이었다. 유도영은 본디 과거를 준비했으나,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깨닫고 흑패에 투신했었다.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중앙 정계와의 연줄과 거대한 상납금이라는 조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관부에 연줄도 없고 위에 상납할 자금도 없었던 그로서는 흑패 외에 선택지가 마땅치 않았다. 이후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는데, 자신이 투신한 흑패의 흑패주가 지독한 욕심으로 똘똘 뭉쳐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흑패의 영역을 확장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들여도 흑패의 조직원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었다. 모든 것을 흑패주가 독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이 이인자의 반란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고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남경의 흑패주는 반란을 힘을 제압하고 문사인 유도영을 이인자로 내세워 흑패를 이끌어왔다. 유도영은 무공을 익히지 않아 반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남경에 도착해 흑패의 패주를 잡아 죽였을 때 별반 반발이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남경 흑패주의 무공이 강하긴 했으나, 호충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고작 일류 끝자락에 머무는 무공으로 어찌 호충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이후 유도영은 호충을 만나며 하오문의 문도가 되었다. 특히 유도영은 호충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오문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들었기 때문에 하오문의 문도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에 문도를 위한 문파는 없었다. 누구나 그리 말할 수는 있었겠으나, 실제로는 말로만 문도들을 위한다고 포장할 뿐이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이득이 가장 중요했고, 이는 황제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오문의 문주는 진실로 문도를 중심으로 하오문을 이끌었기에 문주인 송재호를 따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호충도 과거시험을 준비했다는 유도영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오문에 칼을 쓰는 놈은 많았지만, 붓을 쓰는 이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도영을 임시 정보단장에 명하고 업무능력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야 당연한 일. 시기가 언제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문주님. 그럼 정말로 역천이···.”
솔직히 나라의 백성들에게 황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평생 마주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도영이 관직에 나가려고 하긴 했으나, 관직에 뜻을 버린 터라 역천은 남의 세상 얘기였다.
하지만 유도영이 역천을 입에 올리자 호충이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어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