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32)

영단(靈丹)

***

“이제 천룡출두(天龍出頭)는 할 줄 압니다···.”

“그건 당연하고! 대월천룡권(大月天龍拳)은?”

“···고작 흉내만 내는 수준이지요. 부끄럽습니다.”

“크흐흐. 괜찮다. 몇 년이나 지났다고 대월천룡권을 대성하겠어? 무공은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여 성장하는 법이다.”

“대형께서 내력을 전해주신 덕에 흉내라도 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대형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내려주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왕호는 대월천룡권을 익히며 알 수 있었다. 초기에 내력의 기틀을 마련해준 호충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도 천룡출두에서 헤매고 있었을 일이었다. 그 내력 덕분에 작은 지룡(地龍)이라도 방출해 대월천룡권을 흉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이 어긋나지 않았다면 더 일찍 만나서 후반부를 가르쳐주었을 터인데 말이야.”

“길이 어긋나다니요?”

“일전에 천수에 갈 일이 있었다. 의제를 너무 오래 못 봤잖아. 그래서 의제 얼굴도 볼 겸 천수로 갔었지.”

“아! 그럼 제가 감숙성 전역을 돌아다닐 때···.”

왕호는 감숙을 재패하고 바로 서안으로 왔기에 천수에 들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호충은 바쁜 와중에 천수까지 걸음 했던 것이다.

“그래. 천수에서 나준을 만났는데, 녀석이 알려주더구나. 네가 류창과 함께 감숙성 정벌에 나섰다고 말이야.”

“아아. 괜히 움직였나 봅니다. 대형을 만나는 일이 우선이었는데···.”

서안으로 오는 길에 류창을 천수로 돌려보냈고, 홀로 서안으로 당당하게 돌아왔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갔으니 엇갈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너만 보러 갔던 것은 아니니 마음 쓰지 마라. 갔던 일은 잘 해결하고 돌아왔다.”

호충은 황궁 비동에 다시 들르기 위해서 천수에 갔었다.

‘덕분에 좋은 것을 찾았지.’

호충은 황궁 비동에 모셔둔 사부님들의 비석을 세워줬다. 사부님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비동으로 간 것이다. 또한 오랜만에 갔으니 비동에 비치된 무공서를 다시 면밀히 살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흐흐. 그래도 대형께서 저를 어찌 생각하시는지 알아서 좋습니다.”

“큭. 어쨌든 네 무공을 알아보는 것은 내일이니 오늘은 쉬자.”

“옙! 오늘은 놀고 내일부터 시작하는 맛이 있지요.”

“하하하. 너는 항상 나와 마음이 잘 맞았지. 그리고 조만간 하오문의 중요 인물들에게 선물이 있을 것인데, 네가 딱 맞게 잘 왔어.”

“오오. 그렇습니까? 어떤 선물입니까?”

“비밀이다. 요 놈아.”

호충은 비동에서 발견한 이끼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이끼가 천고의 영약인줄 어찌 몰랐을까.’

공동은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 이상 공청석유의 기운으로 가득했고, 이끼는 그곳에서 함께 번성했다. 이끼에도 특별한 기운이 서려있음을 짐작해야 했는데, 이번에 가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가는 길에 삼을 한 뿌리 캐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겠지.’

비동으로 가는 길에 캔 삼을 고이 보관하려고 나무를 잘라 상자를 만들었고, 비동에 도착해 그 안에 자라고 있는 이끼를 떼어 완충제로 깔고자 했다. 하지만 이끼를 떼어내 손에 쥐니 손바닥으로부터 기이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호충은 그 즉시 이끼를 조금 떼어 입으로 가져갔고, 밖에서 캔 산삼 한 뿌리보다 더한 기운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 이끼는 영단으로 둔갑하는 중이니, 너희의 공력이 크게 성장할 것이다.’

의원 일을 배운 하오문 문도들을 찾았고, 정확한 배합과 제조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갖가지 희귀 재료를 추가로 매입하고 단환을 만들 사람을 구하는 데 시간이 들긴 했지만, 초기 완성품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걸 또 송 영감 입에 넣었으니, 얼마나 더 공력이 성장했겠어.’

안 그래도 공력이 높았던 송 영감은 새로 제조한 영단 덕분에 다른 의제들과 더욱 차이를 벌릴 수 있었다. 화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진은 영단이 노화방지와 피부에 좋다는 호충의 말에 날름 영단을 삼켰다.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영약을 통해 엄청난 내공의 발전을 이루어냈고, 각자의 무공을 상당히 끌어올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을 통해 영단의 효능을 확인한 지금은 비동의 의술서적이 가득한 곳에서 찾아낸 영단 제조법에 따라 종류별로 영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중요 재료인 만년석태(萬年石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년석태(萬年石苔)가 본래 비동에서 자란 이끼의 정확한 명칭이었다.

황궁의 비동은 비동으로 만들기 전부터 공청석유와 이끼가 자생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공청석유의 방에 문을 만들기 전에는 공청석유가 바닥을 타고 그대로 흘러나갔을 것이며, 그렇게 흘러나간 공청석유는 만년석태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공청석유를 흡수했는지 만년석태는 공청석유를 극도로 압축했다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의술을 공부하신 편 스승님은 다 알았을 거면서 왜 안 알려주신 거야?’

호충의 작은 오해였다. 네 스승이 황궁의 비동에서 머물고 있었으나, 식량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끼를 떼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고 먹을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한 것이다. 황궁의 명에 움직인 비동의 제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공청석유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변의 지물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이끼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푸른 이끼일 뿐이었다. 호충도 이끼에 꼭꼭 숨어 있는 영약의 기운을 바위에서 떼어내고 나서야 알 수 있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제 곧 영단이 완성될 터이니···.’

짧은 수련을 거친 하오문의 문도들은 내공 축적의 시간을 건너뛰고 고수로 성장할 예정이었다.

“대형께서 준비하신 선물이라면 기대가 큽니다.”

“크흐흐. 기대에 부족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대형이 주시는 선물 아닙니까. 뭐든 나쁘겠습니까. 대형께서 무공을 가르쳐주시는 것도 그랬습니다. 당장은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익히고 나면 세상에 이런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습니다.”

“······.”

호충은 온전히 마음을 열고 자신을 향해 지극한 호의를 보이는 왕호를 볼 때마다 새로웠다. 왕호뿐이 아니다. 사중환도 그렇고 옥비연도 마찬가지다. 송 영감과 화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근래에는 자신을 따르는 하오문의 문도들도 그랬다.

‘이게 높은 자리에 앉은 자의 즐거움일까?’

호충은 이래서 과거 정치인들이 그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용을 쓰지 않았나 싶었다.

‘아니야.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누구나 존경받지는 않아.’

호충은 과거 자신이 죽인 조직폭력배의 두목을 떠올렸다. 그는 존경받지 못했기에 이인자에 의해 제거되지 않았겠는가.

‘나는 이들의 믿음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거야.’

신뢰는 신뢰로 갚아주면 될 일이다.

“내일 의제의 수련 성과가 조금 부족해도 봐주도록 하지.”

“···안 봐주실 생각이셨습니까?”

“응. 기대치에 못 미치면 조져버릴 생각이었거든.”

“아, 아까는 무공은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여 성장하는 법이라고 하셔놓고···.”

아까는 말로만 그리한 것이다. 내일 얻어터진다고 생각하고 노는 것보다 행복한 내일을 꿈꾸며 노는 것이 더 기쁘지 않겠는가.

“이 년이면 애가 태어나서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고도 남는 시간이거든? 그 시간동안 충분히 수련하지 않고 팽팽 놀았으면 얻어터져야지.”

“헙.”

“이제 봐준다니까 그러네.”

“···예. 살살 부탁드립니다.”

“어허. 정신머리부터 뜯어 고쳐야겠네? 생사대적이 봐주면서 한다든? 언제부터 우리가 살살 수련했지? 나와 수련한지 오래됐다고 벌써 다 잊어버렸어?”

서안에서도 귀에 박히도록 송 영감에게 들었단 말이었다.

“끅. 실언했습니다. 확실하게 수련을 부탁드립니다.”

“하루 종일 의제와 수련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큰 마음먹고 네 시진으로 줄여주지.”

“······.”

네 시진이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해가 뜬 시간 전부를 수련에 임한다는 뜻이었다.

“왜. 싫어?”

“아닙니다! 너무 부족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역시! 내 의제는 이런 강한 의지가 있었지! 그럼 수련이 끝나고 따로 개별 수련을 맡길게.”

“···가, 감사합니다.”

왕호는 썩은 표정으로 호충과 어깨동무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유도영이 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 단주.”

“예. 문주님.”

“여기 왕호는 하오문의 중추인물이니 얼굴을 익혀두게. 다만, 방주나 단주 급이 아니면 얼굴도 몰라야 해. 문도들이 하오문의 지도부를 알아보지 못해도 상관없어.”

“예. 문주님. 기억하겠습니다.”

문주가 하오문을 점조직으로 운영하고자 한다는 뜻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하오문의 실체를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내 얼굴은 노출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지만 문주님의 신변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지···.”

안 그래도 매번 문주가 일선에 나서서 자잘한 흑패들을 정리하고 있어 무척 염려되던 참이었다. 남경 흑패를 정리하던 때에도 문주가 가장 앞에 나섰는데, 그 때는 하오문이 뭔지도 몰랐기에 넘어 갔었다. 하지만 하오문에 들어오고 나니 하오문이 얼마나 큰 세력인지 알 수 있었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하오문의 문주는 문도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런 문주가 외부에 얼굴을 알리고 있으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문주님. 유 단주의 판단이 옳습니다. 아직 저희는 대외적으로 중원 무림에 개파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불순한 세력이 문주님을 노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 중 마교가 가장 걱정이지 않습니까.”

왕호의 지원사격에 유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라고 내가 나서는 거야. 내가 아닌 너희를 노리면 어쩌겠냐? 나야 일신의 무공이 있으니 걱정 없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만약 마교가 떼로 몰려와서 너희를 잡겠다고 나서면 너희는 당해낼 수 있겠어? 난 녀석들이 몰려와도 전부 모가지를 따버릴 수 있는데 말이야.”

“······.”

“······.”

왕호는 호충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고 있었기에 할 말이 없었고, 유도영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또한 둘 모두 자신이 위험을 감수해 문도들을 지킨다는 말에 크게 감격한 상태였다.

‘역시. 대형은 일문의 문주가 되기에 손색이 없으시구나!’

‘···나도 무공을 익혀 온전한 제 몫을 해 낼 것이다.’

“내가 걱정을 안 하게 하려면 무공을 더 단련하던가.”

“···죄송합니다. 문주님. 작은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수련에 임하겠습니다.”

“···기본 수련을 얼른 시작하고 싶어집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문주님.”

“유 단주는 계속 정보를 살피고 있어. 그리고 다음부터 주변 정리는 왕호가 맡을 것이니 처리할 잡다한 놈들의 정보는 왕호에게 넘기고.”

“옙! 문주님.”

“흐흐흐. 몸 풀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문주님.”

“애들 적당히 잡아. 네가 힘쓰면 걔들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 남경에서 크게 소란피우면 바로 황군이 출동할 거야.”

“힉.”

“몸을 풀라고 하는 게 아니라 힘 조절을 배우라고 널 보내는 거야.”

“···에효. 또 감숙성에서 흑패를 재패하던 때와 비슷해지겠습니다.”

이미 감숙성에서 흑패주를 잡으며 내공을 줄이고 권공의 강약을 조절했던 왕호였다.

“얘들은 더 약할 걸?”

“에효. 그럼 산보하는 셈 치지요.”

“큭큭. 산보도 아니고 걸음마지. 그것도 애기 걸음마.”

“아. 녀석들은 패주도 아니니 문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살짝 때려도 죽을지 모르지요.”

“맞아! 나도 저번에 한 놈 잡을 뻔했다니까. 툭 쳤더니 바로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게워내더란 말이지.”

“문주님이 치셨으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겁니다.”

“······.”

유도영은 험악한 저잣거리의 무법자들을 가벼이 여기는 둘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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