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232)

정보의 힘

***

“······.”

유도영은 험악한 저잣거리의 무법자들을 가벼이 여기는 둘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저도 하오문의 무공을 익히고 말 것입니다.’

성현의 말씀은 언제나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높은 곳을 지향했지만, 세상 속에선 아무런 힘도 없는 글월에 불과했다. 남경 흑패에서도 그랬고 하오문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오문과 흑패는 큰 차이가 있었다. 흑패는 자신의 머리만 활용해야 했으나, 하오문은 무공을 익힐 기회를 주지 않겠는가.

‘기회가 생겼으니, 그 기회를 단단히 잡아야지요.’

하오문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면 최소한의 무공을 익혀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문주와 닮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오문을 위함이었다.

“두 분의 술상을 봐 두라고 말해두었습니다.”

“오오. 문주님. 유 단주 눈치가 상당합니다.”

“큭. 유 단주는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챙길 것 없어.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객잔이나 가서 먹으면 되는데 말이야.”

“문주님. 그래도 유 단주 성의가 있는데 가시지요.”

“그래. 오랜만에 만났으니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지. 유 단주는 나중에 동석하기로 하세.”

“예. 문주님. 다녀오십시오.”

‘다음엔 꼭 문주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

호충은 왕호와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시간을 나눴다. 왕호는 그간의 수련과 감숙성을 재패하며 있었던 일들을 맛깔나게 풀어놨고, 호충은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흑패들을 정리한 일화를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호충은 황산에서의 일을 입에 담았다.

“크흐. 남궁 가엔 비연의 얼굴로 갔었거든.”

“비연의 얼굴로 가셨으면 또 제갈 세가와 같은 일이 생겼겠습니다. 흐흐흐. 남궁 가에 차기 일봉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남궁 세가에서 일봉의 면상도 못 봤다는 거 아냐.”

“하하하. 형수님이 마음 놓으셨겠습니다.”

“크크. 나는 못 봤는데, 그 여자는 날 본 모양이더라. 황산에서 떠나는 날에 마차 곁에 와서 날 찾더라니까?”

“푸훕. 대형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자빠뜨리지요. 크하하.”

‘누구든 안 되겠느냐. 아무리 지조(志操) 있고 절개(節槪) 있는 여인도 소용없을 것인데···.’

황궁의 비고엔 얼굴을 바꾸는 역용술 외에도 기이한 사술이 많았고, 그 사술 중엔 여인의 심상을 뒤흔들어 육욕을 채우던 색마의 무공도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의 호충에겐 하등 가치도 없는 무공이었다. 여자와 노는 것은 예전에 졸업했기 때문이다. 젊어서 놀만큼 놀았고, 나이를 먹은 지금은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여자는 이제 흥미 없다. 비연에겐 삼도상단 이름으로 남궁 세가에 가라고 했으니, 녀석이 알아서 하라고 하지 뭐.”

“오오. 그럼 비연이 남궁 가의 사위가 되는 겁니까? 푸하하하.”

“잘하면 제갈가의 사위도 될 걸?”

“아차. 거기도 있었지요. 비연 녀석 바쁘겠습니다.”

비연의 어머니가 기루에서 일했던 터라 평소 여인에겐 관심도 두지 않았던 옥비연이다. 그런데 호충 때문에 자신을 연모하는 여인이 둘이나 생긴 것이다. 비연은 얼굴도 모르는 여인들이었다.

“송 영감과 삼도상단 꾸려나가려면 앞으로 엄청나게 바쁘겠지.”

“크크. 그 와중에 기라성 같은 세가의 규수까지 만나려면 더 바쁘겠네요. 흐하하.”

호충은 왕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쪼르르.

“그나저나 한동안 너는 천수로 안가도 되는 거지?”

“나준 녀석이 알아서 잘 꾸려나가고 있고, 옆에서 류창 녀석도 도울 테니 저 없어도 될 겁니다.”

“그럼 앞으로 날 따라다녀. 조만간 하오문이 중원 무림 전면에 나설 일이 있다.”

“!!”

‘내가 그런 곳에 따라가다니! 역시 대형은 날 이인자로 여기시는 거야!’

사중환은 자장에서 나름의 얼굴을 알린 상태라 누군가 알아볼 수 있었고, 옥비연은 삼도상단의 후계자 역할을 맡아야 했기에 호충은 어쩔 수 없이 왕호를 선택한 것이다.

“문주님! 이 왕호! 문주님께 충심을 다 바치겠습니다!”

“얼씨구. 왜 갑자기 문주님이야? 됐으니까 술이나 마셔.”

“헤헤헤.”

“어딜 가는 줄이나 알고 좋아해?”

“중원 무림 전면에 나서자면 무림 방파에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다른 세가나 무림 방파에 대형께서 입수한 비급을 팔려고 하시는 거죠?”

왕호는 호충과 화산에서 작업을 함께한 바가 있었기에 비급 판매를 잘 알고 있었다.

“오오. 반은 맞췄구나. 역시 우리 왕호는 영민해.”

“하하하. 저를 인정해주시는 건 역시 대형밖에 없습니다.”

“반은 틀렸다는 말이거든?”

“···그래도 반이나 맞추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둘 중에 뭐가 틀렸지요?”

“무림 방파에 간다는 것.”

“···어. 그럼 돈 많은 상단으로 가시려고?”

상단에 비급을 팔면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상단도 아니다. 우린···. 무림맹으로 갈 것이다.”

“!!”

‘무림맹이라니···. 거길 왜···.’

“하나씩 팔아먹으려니 감질나서 못해먹겠어. 중원의 모든 무림방파와 세가를 포함하고 돈께나 쓴다는 상단까지 모조리 모아놓고 비급을 경매에 붙일 것이다. 임시무림맹이 조금 시끄러워지겠지.”

“저, 전부를 모아놓고 경매를 붙인다고요?”

“큭큭. 아주 볼만할 거야.”

지금까지 화산파와 제갈 세가, 남궁 세가에 비급을 팔아먹었다. 하지만 호충의 품엔 더 많은 무림 방파의 비급이 남아 있었고, 시간은 부족했다. 언제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비급을 돌려주고 돈을 회수할 것인가. 무엇보다 마교의 대계가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수년 내로 실행될 것이 확실했다. 그 전에 중원 무림에 실전된 상승 무공을 전달하고 고수를 양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저희 둘로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다가 그들이 합세해서 대형의 비급을 빼앗으려고 하면 어쩐답니까?”

“비급이 인질이지.”

“···그 비급을 빼앗긴다니까요? 빼앗기면 인질이고 뭐고 없습니다.”

“풋. 비급의 사본이 백 권이라면? 아니 만 권이라면?”

“힉!”

“비급을 구입하지 않고 빼앗으려 하는 무림 방파의 비급은 무상으로 중원 전역에 배포한다고 경고할 것이다. 무림인에게 비급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는데,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지.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끔찍하게 아끼거든. 그런 비급이 저잣거리에서 동전 몇 문에 거래되는 꼴을 볼 수 있겠느냐? 그들은 감히 비급을 빼앗으려 시도하지 못할 것이야.”

화산파도 그랬고 제갈 세가와 남궁 세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무림 세력은 문파의 비급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여겼고,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정말 빼앗으려할까? 녀석들이 비급 탈취를 시도해도 나쁠 일은 없겠지.’

무력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비급을 인질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원활한 거래를 위함이었다. 정파 무림의 거두라는 이들이 음험한 짓을 한다면 그 자체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일이었다. 오히려 호충은 이들이 야밤에 찾아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휘유. 그래도 단단히 준비해야겠습니다.”

“큭큭. 너와 나 단 둘이 가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오문 수련관을 돌파한 문도들이 암중에서 지원할 것이다.”

하오문의 초창기부터 함께 시작한 문도들의 무공은 어지간한 문파의 일대 제자를 수월하게 상대할 수준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오오.”

“그리고 넌 네 무공 수위에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야겠구나. 겨우 무림인 몇이 모였다고 겁을 먹으면 어쩌느냐.”

왕호는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말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제가 겁을 먹긴 언제 먹었다고 그러십니까! 저 왕호는 대형의 가장 소중한 의제이고 하오문에서 대형을 빼고 가장 강한···.”

왕호는 서안에서 자신을 두들겨 패던 송 영감이 번뜩 떠올랐다.

‘뭐···. 어르신은 나보다 강하니까.’

“어르신을 빼고 가장 강한···.”

또한 과거 목소리로 대기를 울리던 형수도 떠올랐다. 형수는 그간 대형의 곁에서 수련했으니 과거보다 더한 공력을 쌓고 무위를 올렸을 것이다.

“···형수님도 빼야겠지요?”

“푸흐하하. 다 빼고 네가 제일 강하다고 하자.”

“···그런데 제가 정말로 무림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까?”

왕호는 아직까지 정파의 고수들과 붙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왕호를 위해 얼마 전에 대련했던 이를 떠올렸다.

“얼마 전 남궁 세가의 가주와 검을 마주한 일이 있었다. 내력의 수발도 훌륭하고 남궁 가의 검법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지.”

“오.”

“남궁 가주와 네가 붙으면···.”

꿀꺽.

왕호는 침을 삼키며 호충의 말을 기다렸다.

“이백초 안에 결착을 볼 수 있겠구나.”

“후아. 제가 가주를 상대로 이백초나 버팁니까?”

“버티는 건 남궁 가주다. 왕호 네가 이길 것이다. 그것도 완벽한 승리일 것이야.”

“!!”

“상승 무공을 실전한 무림은 우리 하오문의 상대가 되지 않아.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가진 무공은 과거에도 절대의 영역에 속한 무공이었고, 상승 무공이 희소한 지금은 더하다. 공력의 차이도 크지 않고, 무공의 격차는 거대하다. 남은 것은 네 자신감과 숙련도에 있는데, 이 때문에 이백초나 걸린다고 예상한 것이다. 만약 네가 대월천룡권을 대성한다면, 남궁 가주를 삼초 이내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

입을 쩍 벌린 왕호의 입에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넣는 호충이다.

“우헥. 퉤퉤. 뭐하십니까?”

왕호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네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대월천룡권의 초식을 따를 정도로 수련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려고 그랬다. 아직 멀었구나.”

“······정말 아직 멀었습니다.”

‘대형은 작은 행동에도 다 이유가 있었는데, 여전히 짐작하지 못하다니···. 대형의 모든 행동이 나를 깨우치게 해주려 하심이다.’

“우리 문도들이 익히는 파산도법(破散刀法)과 류상비도(柳狀飛刀) 또한 상당한 수준의 상승 무공이니,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마라.”

“예. 문주님.”

왕호는 또 의문이 생겼다. 하오문이 이렇게 고절한 무공을 갖고 있다면, 외려 외부에 상승 무공의 비급을 팔지 말아야 맞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대형에게 계획이 있겠거니 싶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

“큭. 넌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구나.”

“···헤헤. 안 팔고 저희만 다 가지면 좋지 않습니까.”

“마교의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

“중원 무림은 다시 피를 흘려야 할 터. 만약 중원 무림에 비급을 전하지 않으면 오롯이 하오문 혼자 마교를 상대해야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림에 비급을 전하려는 것이다.”

“···다 생각이 있으실까봐 입을 다물었습니다.”

“크크. 너와 어울리지 않으니 그냥 물어봐라.”

외부인이라면 몰라도 왕호라면 뭐든 말해줄 수 있었다.

“아! 하나 더 여쭤볼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응? 앞으로의 일은 대충 설명한 것 같다만.”

“···진가장의 일입니다.”

“진가장? 거긴 왜?”

왕호를 비롯한 하오문의 중추만이 호충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하오문의 문주가 송재호라는 이름을 쓰는 중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도 호충은 송재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형도 공동가주에 이름을 오르셨다고 하던데···. 왜 진가장에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왕호도 중원 무림의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있었기에 진가장의 일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마교의 손에 죽은 줄 알았던 두 형제가 돌아오고 가주의 위에 있던 셋째와 함께 공동가주직을 맡아 꾸려나간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여기엔 진가장의 넷째인 진호충도 공동가주에 속한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다.

“거긴 맛있게 먹으려고 아껴뒀지.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수 있지만, 두고두고 괴롭히고 싶거든.”

“···아.”

왕호도 호충이 자신의 본가에 가진 감정을 알고 있었다.

‘대형께서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호충은 진가장이 거론되자 화진이 루방을 통해 알아냈던 정보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재미있는 정보가 들어와서 기대하는 중이지.”

“재미있는 정보요?”

“진가장의 전전대 가주에 관한 일이야. 내 조부라고 할 수 있겠군.”

“지금 전대 가주님과 함께 원로원에 계시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진행하는 상승 무공의 철폐가 조금씩 수면으로 올라오면 종국엔 원로원도 개방하게 될 것이야. 무림의 고수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거지.”

“어휴. 끔찍하네요. 노괴들이 무림에 돌아다니면···.”

“무엇보다 세가에서 이들이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림 방파야 문주나 장문인을 위주로 돌아가니 크게 걱정할 일이 없지.”

“그렇다면 진가장도 전전대 고수인 대형의 조부께서 갖는 영향력이 커지겠습니다.”

“그 전에 한 놈은 확실히 보내야지.”

“누굴···.”

“진원우.”

“대형의 부친을···. 보낸다굽쇼?”

보통 흑패에서 확실히 보낸다는 말의 의미는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왕호는 설마하고 있었지만, 호충의 이어진 말로 정말 본래의 의미대로 사용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신으로 만들지 죽일지는 원로원에 계신 조부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

왕호는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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