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32)

백 년은 이르다

***

이후 왕호는 남경 곳곳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자생하는 뒷골목 건달을 정리했고, 오래지 않아 남경의 뒷골목 전부를 평정할 수 있었다. 호충이 일을 맡기고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호충의 말대로 잔인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뒷골목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 인해 왕호가 나타나기만 해도 저마다 백기를 들어 항복을 표했다.

“문주님. 명하신 바를 완수했습니다.”

“천천히 하라니까.”

“일개 문도가 문주님의 명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남경에서 호충과 함께한 다음부터 왕호의 얼굴에선 웃음기를 찾기 어려웠다. 호충의 명이 인생의 과제라도 되는 듯이 열중했고, 함께 수련에 임할 때에도 진중하게 수련을 이어갔다. 덕분에 왕호의 무공실력까지 급격한 진보를 보이고 있었다.

“편하고 재미났던 왕호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문주님.”

왕호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덕분에 무림맹에 가는 길이 조금 느긋해졌어. 이제 천천히 가보자고.”

“따르겠습니다.”

“그 전에.”

호충은 얼마 전 서안에서 도착한 물건을 꺼냈다.

“선물이다. 왕호. 내가 전에 말했었지?”

“······.”

고풍스러운 나무상자가 왕호의 손에 전달되었다.

“열어봐.”

“예. 문주님.”

왕호가 나무상자를 열자마자 강렬하고 청아한 향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후흡. 정말 진한 기운입니다.”

“하오문에서 특별히 제조한 영단(靈丹)이다.”

“!”

“의제의 대월천룡권이 날개를 달게 될 것이야.”

왕호는 영단이라는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딱.

그리고 뚜껑을 닫아 도로 앞으로 내밀었다.

“이러한 영단이라면 문주께서 취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하. 전 같으면 누가 먹을까 홀랑 제 입으로 가져갔을 것인데···.”

“문주님의 무공이 고강해야 문도들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감히 제가 손댈 영단이 아닙니다.”

“오호. 내 무공이 고강하지 않다는 말이냐? 내가 그리 약해 보였나?”

“그, 그것이 아니오라···.”

“큭큭. 농이다. 나는 영약으로 발전할 수 있는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났다.”

“······.”

왕호는 혹시나 자신을 위해 이런 말을 하나 싶어서 호충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에라이. 누가 그걸 나한테 쓰라든?”

상대의 눈빛과 심장박동으로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했기에 이후 왕호는 상대의 속내를 읽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진정이시옵니까?”

“나는 그거보다 더 좋은걸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러니 나까지 생각할 것 없어.”

“하지만···.”

“네가 그걸 먹지 않으면 앞으로 사중환이랑 옥비연한테 크게 밀릴 걸?”

“네?”

“녀석들은 서안에서 먹으라고 했거든. 걔들은 벌써 영단을 취하고 높아진 공력에 적응하고 있을 것이다.”

“!!”

“왜. 너만 줄 것 같았냐?”

“녀석들에게 돌아갈 것도 있었단 말입니까?”

냄새만 맡아도 정말 대단한 영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귀한 영단이 대체 몇 개나 있다는 말인가.

“앞으로 하오문의 중추로 올라설 단주들에게도 모두 지급될 영단이다. 물론 이 영단보다는 효능이 조금 떨어지겠지만···.”

방주급과 단주급은 한 단계 차이가 있었기에 방주에게 지급할 영단과 단주에게 지급할 영단을 구분하여 제조했다. 특히 영단의 만년석태의 함유 비율에 따라 그 효능이 달라졌다. 그 이하 문도들에게 지급될 영단도 있었다. 만년석태는 거대한 냄비에 발만 담그고 나온 수준으로 들어갈 테지만, 황궁 비고에서 가져온 영단 제조법에 의해 제조한 영단이기에 시중의 그 어떤 영단보다 좋은 성능을 갖고 있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문주님. 감사합니다.”

“호법을 서주마. 지금 영단을 복용하고 운기를 시작해라.”

“옙!”

왕호는 상자에서 조심스럽게 영단을 꺼내 입을 가져갔고, 영단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물처럼 녹아 사라졌다. 왕호는 영단이 천천히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로 대단한 기운.’

그 대단한 기운이 끝도 없이 덩치를 키워나갔다. 절로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입을 다물고 진기 도인에 전심을 다해라. 단 한 톨의 기운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야.”

“······.”

왕호는 가부좌를 틀고 전심전력으로 운기를 시작했다.

호충은 왕호 곁에서 조용히 호법을 서기 시작했다. 잠룡진을 풀고 본연의 내공을 다 드러낸 왕호는 누가 봐도 고수라 할 정도의 내공을 자랑했다. 여기에 영단의 기운이 더해지며 내공의 기운이 휘몰아쳤고, 호충은 그 변화를 모두 눈에 담았다.

‘녀석. 이제 정말 네 녀석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지난날의 가벼움을 버리고 진중한 모습으로 변한 왕호가 흡족했다. 앞으로 아버지의 대계에 동참하자면 자신은 하오문에서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다. 일문의 문주가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는 대리를 맡아야 할 터. 호충은 그 자리를 하오문의 방주들 전부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중환과 옥비연 그리고 황매와 왕호가 함께 하오문을 이끌어 갈 수 있겠어.’

왕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하오문의 일익을 담당할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왕호가 영단을 흡수하느라 고생하는 동안 호충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중환은 내가 자리를 비운 하오문의 중심이 될 것이고···.’

사중환은 넷 중에서 그마나 제일 연장자였고, 자신을 가장먼저 그리고 깊이 따른 인물이기도 했다. 하오문이 아무리 무림의 문파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 근본에는 흑패가 있었기에 흑패에 근본을 두고 있는 사중환은 중심이 되기에 적합했다.

‘비연은 삼도상단에서 주로 일을 해야 하고, 화진은 루방을 관리하는 것으로 벅차지.’

비연은 서안에서 영단을 취하고 송 영감과 함께 황산으로 향할 것이다. 앞으로 삼도상단을 이끌어가자면 서안엔 쉬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화진은 중원 전역에 퍼져있는 기루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왕호 네가 필요했다.’

사중환 혼자 하오문을 이끌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중추가 될 인물이 필요했고 왕호는 사중환과 마찬가지로 흑패를 기반으로 성장했기에 하오문의 중추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나는 너희만 믿겠다.’

호충은 진기도인에 여념이 없는 왕호를 향해 큰 믿음을 주고 있었다.

***

호충과 왕호는 간단한 행랑을 꾸려 길을 떠난 참이었다. 호충은 여전히 송재호의 얼굴이었고, 왕호는 굳은 얼굴로 호충을 뒤따르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주님.”

“하루는 그렇다 치는데, 이틀은 너무하지 않냐?”

왕호가 영단을 취하는데 무려 이틀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아무리 느려도 다음 날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가부좌를 튼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그 다음날 새벽녘에서야 눈을 뜬 왕호였다.

“덕분에 나까지···. 에효. 말을 말자. 그 얘긴 뭐 하러 또 꺼내?”

호법을 서느라 이틀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저도 이렇게 시간이 지났으리라고는···.”

“됐다. 네가 영단을 확실하게 흡수한 덕분에 확실히 절정까지 돌파했으니까.”

화경에 도달하진 못했으나, 절정 말미에 이른 것은 확실했다. 왕호가 영단을 흡수하고 온 몸의 노폐물을 밖으로 빼내며 환골탈태나 다름없는 변화를 보인 것이다. 왕호의 내공 수발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했고, 근골 또한 더욱 단단하게 성장했다.

“문주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잊으면 그게 금수지 사람이냐?”

왕호는 조금 띠꺼운 표정으로 답했다.

“···안 잊는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잊지 마시라고.”

“예. 예.”

“어쭈? 쫌 컸다 이거냐?”

호충은 왕호의 말투에서 작은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일부러 호충이 화를 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제 문주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네? 한번 엉기고 싶냐?”

“아휴. 그건 아니고요. 그냥 좀 몸이 근질근질 해서···.”

내공이 진일보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왕호는 얻은 힘을 밖으로 내뿜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물며 자신 앞에는 모든 힘을 받아줄 호충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형한테 뿔을 드러내셨다?”

“뿔까지는 아니고요. 대련을 조금만 해주시면 좋겠다 싶어서···.”

“큭큭. 마침 인적이 드물어 보는 사람도 없네?”

“예. 이쯤이면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다시 영단을 먹었던 날의 일을 꺼낸 것이다.

“영단의 기운이 전부 잔머리로 간 모양이야.”

“문주님.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 우리 왕호가 얼마나 컸는지 보자. 땅콩에서 호두까지는 컸겠지?”

“에이. 이만한 땅콩이 어디 있습니까. 흐흐.”

“내공 말고.”

“······.”

왕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봤다.

“이건 원래 더 안 큽니다만···. 그리고 전부터 땅콩보다는 컸습니다.”

“오냐. 메추리알이라고 해주마.”

“···여기서 할 깝쇼?”

후웅.

왕호는 잠룡진을 풀어내며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고, 호충은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따라와라! 하하하.”

파앙!

호충이 경공을 전개하자 왕호도 호충의 뒤를 따랐다.

“같이 갑시다! 문주님!”

파앙!

둘의 신형이 숲속 깊은 곳으로 향했다.

***

“썩을···.”

왕호의 한쪽 눈가는 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한쪽 팔은 부목을 대어놓고 호충 뒤에서 걷고 있었다.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할 줄은···.’

진보한 자신의 내공을 자신하며 기세 좋게 덤벼들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에효. 어르신이 그리워질 줄이야.”

서안에선 검식이 잠깐이라도 보이기라도 했지만, 이번엔 아예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혼자 궁시렁대? 빨리 안 와? 네가 다치는 바람에 경공도 못 쓰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대형이 이렇게 만들어놓고!’

하지만 대련은 자신이 원했던 일이었다.

“가, 갑니다. 문주님.”

왕호는 부지런히 발을 놀려야 했다.

‘녀석. 그래도 확실히 크긴 컸네. 호두 정도로 컸다고 해주지.’

호충은 왕호를 맞이하여 상당한 내공과 진신 무공을 풀어내야 했다. 무공이 진일보했을 때 자만심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럴 때 확실하게 눌러줘야 앞으로 무림의 인사를 만나서도 무공을 과신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조금 봐줄 걸 그랬나?’

왕호는 덜렁거리는 팔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남경을 빨리 정리해서 여유가 있는 줄 알아라.”

“헤헤.”

“팔은 사흘만 지나면 붙을 거야. 심법을 운용하면 더 빠르겠지.”

“빨리 나아서 다시 문주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하하하.”

‘왕호 녀석을 더욱 단련해놔야겠군.’

***

무림맹이 들어서는 사천(四川)의 성도(成都)까지 가는 동안 호충과 왕호는 계속 대련을 이어갔다. 왕호는 첫날처럼 심하게 다치진 않았어도 매번 얻어맞았다.

“하압!”

따악.

“아윽.”

대련 중에 호충의 빈틈을 보고 파고들었지만, 함정이었다.

“빈틈을 봤으면 소리 없이 다가서야지! 공격하겠다고 다 알려주면 누가 맞아주나!”

“······.”

이후 왕호는 말없이 초식을 발현했고 얻어맞아도 꾹 참았다.

꾸웅.

“······.”

두드려 맞는 고통에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잘 참았다. 상대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헤헤.”

“맞고 좋아하지 마라. 내 손에 작은 칼이라도 들려 있었으면 방금 넌 죽었으니까.”

“···예.”

‘녀석의 무공이 일취월장하는 구나.’

왕호는 호충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받아들였다. 영단으로 내공을 끌어올린 대다가 몸을 통한 체득까지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공만 올린 허깨비가 아닌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접어드는 것이다.

“좋다! 좋아!”

“······.”

왕호는 호충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름의 변초를 쓰며 호충을 꼬여내봤지만, 절대급에 이르는 스승들과 대련하는 호충에겐 어리숙한 수작으로 보일 뿐이다.

“웃차. 아직 멀었다 이놈아!”

“익!”

“팔이 다 나았으니 경공을 쓰자. 가면서 계속 수련할 것이다!”

“꼭 한 대 때려주고 말 것입니다!”

“큭. 백 년은 이르다. 하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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