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흑림
***
“만약 내 뒤를 쫓아와 비급을 강제적으로 되찾고자 하는 문파가 있다면···.”
꿀꺽.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수가 많지 않을 것이니 숫자로 밀어붙여 비급을 탈취할 생각이었다.
“크게 환영해드리지.”
“!”
왕호는 전에 문주가 말한 것과 달라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곧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다.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큼큼. 우리는 의를 숭상하는 정파 무림의 기둥일세. 그런 일은 없을 것이야.”
“그럼. 당 가주님만 믿겠소.”
호충은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무림의 인사들을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특히 진호현과 진호중이 눈에 들어왔다. 진호중은 의뭉스러운 본래의 성격대로 이런 혼란에서도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다.
“진가장은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하오문은 무림맹 주요 방파의 실전 무공 외에도 다른 무공 비급을 입수했고, 이번 경매에 이것들도 올려서 판매할 것이오.”
“!!”
“!!”
“이미 멸문한 방파의 무공이지만, 상승 무공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소. 아무래도 진가장이 필요할 것 같아 하는 말이니, 경매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오.”
“···진정이오?”
호중의 물음에 간단하게 답했다.
“그날 와서 확인하면 알 것이오.”
당세천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말하지 않소.”
“그게 무엇이오?”
“우리가 문파의 비급을 구입한다 해도···. 그대들이 사본은 갖고 있지 않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당세천의 말에 대부분의 장문인과 가주가 동조했다.
“옳습니다. 비급의 사본을 남겨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일문의 무공은 대외적으로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 법.”
“이제 막 개파한 하오문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뻔한 질문이었다.
“큭큭. 이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지.”
호충은 가볍게 사본을 입에 올렸다.
“비급의 사본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소? 어차피 나는 무림맹의 일원이 될 생각인데, 함부로 당가와 척을 지겠소? 아니면 여기 있는 다른 문파와 척을 질 것 같소?”
다음에 이어진 호충의 말은 하오문의 약세를 강하게 드러냈다.
“하오문은 무림에 끼지도 못했던 뒷골목의 주먹이 모여 만든 문파요.”
“뒷골목의 주먹?”
“다들 알지 않습니까. 기루를 보호하고 도박장을 운영하는 흑패들 말이오.”
“···흑패? 그 하잘 것 없는···.”
무림인 중에 흑패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중소문파의 이대 제자들만 해도 혼자서 한 지역의 흑패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그렇소. 나는 그 하잘 것 없는 흑패를 모아 하오문을 열었소. 아직 세를 불리는 중이기는 하나 무림맹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힘없는 이들이라오.”
“하! 겨우 그런 이들을 모아서 개파했단 말인가?”
“정말 우스운 일이로다.”
“그럼 문주와 호위무사의 무공만 뛰어났던 모양이군.”
“······.”
왕호는 흑패를 경시하는 이들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내가 바로 천수의 흑패주이거늘···.’
당세천은 순순히 하오문에 대해 밝히는 호충을 향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호충의 입이 생각보다 가볍다고 여긴 것이다.
“···송 문주. 하오문은 실전한지 오백년도 더 지난 무림의 비급들을 어디에서 구했소. 우리도 그렇게 찾았지만, 대부분 찾을 수 없었던 비급이라 무척 궁금하다오.”
“푸흐흐. 그거 좋은 질문이오.”
호충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누군가 다람쥐처럼 비급을 모아두었더이다. 비급을 보관하던 녀석은 이것이 비급인지도 모르고 있더군. 그저 오래된 골동품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손쉽게 비급들을 손에 넣었소. 하지만 무공이라는 것은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 익힐 수 있지 않겠소? 중소문파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오문은 비급을 가르칠 스승도 없고, 좋은 자질을 가진 인물도 자원도 없소. 비급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곳에 파는 것이 최선이지요. 나는 비급을 팔아 나와 여기 호위무사가 익힌 우리의 독문무공을 문도들에게 가르칠 생각이오. 하오문은 이것만으로 만족이오.”
‘보물을 손에 넣었으나, 지킬 힘은 없는 이들이로다.’
당세천은 결정할 수 있었다.
“하오문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오늘은 이대로 끝내고 다시 봅시다. 송 문주의 오늘 무례는 잊어 주리다. 다들 동의하신다면 이대로 송 문주를 보내드립시다.”
당세천은 진호현과 다른 무림의 인사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하오문의 인물들을 보내고 다시 논의하자는 뜻이었다.
“흠흠. 작은 무례를 이해해주는 것도 의로운 일이지요. 그리합시다.”
“염려할 일은 별로 없겠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호충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답했다.
“역시 무림의 앞날이 밝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 오늘 무례를 범했으나, 대인이신 무림의 여러 선배님들은 대범하게 이해해주시는 군요. 하하하. 곧 하나로 일어설 무림맹에 기대가 큽니다. 저도 무림맹의 일원이 되어 지지하겠습니다.”
호충과 왕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림맹을 나설 수 있었다.
“문주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지켜보기나 해라.]
왕호는 전해진 전음에 다시 입을 다물고 호충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둘의 뒤로 멀찍이 따르는 무림 각 방파의 무사들이 있었다.
***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실로 그렇소.”
호충이 떠나간 회합장에 다시 머리를 맞댄 장문인과 가주들은 면면에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꼬리를 붙여 놨으니, 녀석들이 머무는 곳을 알아낼 것이오.”
“당 가주의 일처리는 언제나 확실하지요. 허허허.”
“아미타불. 소림의 비급까지 갖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소.”
“분명 과거 신투로 명성을 떨린 이가 모아둔 비급이었을 것이오. 그러니 각 문파의 비급을 모조리 모아두었겠지요.”
“대도신투라면 말이 됩니다. 당시 당왕께서도 녀석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하지요.”
현 무림에도 신투가 활동하고 있지만, 고대 무림의 신투는 차원이 다른 경공과 은밀함을 자랑했다. 당시의 천하제일인으로 이름 높았던 당왕도 대도신투를 마주하고 쫓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대도신투는 무림의 비급을 포함해 귀물도 상당히 모아두었을 터···.”
이들의 눈에 욕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오문을 치면 비급뿐 아니라 재물까지 얻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귀물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오. 서책은 알아보지 못할 수 있지만, 귀물은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지 않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들은 하오문이 가진 것이 이미 자신들의 주머니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당세천은 근본적인 것부터 확실히 하고 싶었다.
“자. 대부분 이미 마음을 정하신 것 같소만···. 하오문의 비급을 회수하는 일에 동의하시는 지 묻지 않을 수 없소.”
말이 좋아 회수지 결국 강도짓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부정적인 뜻을 드러냈던 화산파의 무환 장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사님이 남기셨을 비급을 이런 식으로 얻는다면 무림의 동도들이 손가락질 할 것이오.”
진호현은 무환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장문인. 오히려 조사님이 남기신 귀한 비급이 저들의 손에 있다는 것이 더욱 불경한 일입니다. 또한 경매를 통해 값을 매겨야 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비급을 돈으로 환산하는 저들의 행태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비급을 본래 문파에 돌려주고 적당한 수고비를 받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억지로 끌어다 맞춘 말이지만, 비급을 공짜로 회수하고 싶었던 무림의 인사들은 동조했다.
“진 가주의 말이 실로 타당합니다. 지금도 저들의 손에 비급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사님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당장 회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오문에 죄를 물어야 합니다. 무림맹의 창설을 대외적으로 알려야할 이 시기에 무도한 짓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옳소! 오히려 저들을 가만두고 경매에 참여하는 것이 무림맹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당세천은 남궁 세가, 제갈 세가를 돌아보며 물었다.
“화산파는 비급이 없다니 빠져도 상관없을 것이고···. 남궁 가주님과 제갈 가주님도 그러하십니까?”
남궁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빠지겠소. 하오문의 손에 남궁 가의 비급이 있지도 않은데 피를 보고 싶지 않소.”
제갈진도 마찬가지였다.
“제갈 가의 진법은 쉬이 익힐 수도 없으니, 있다면 언젠가는 찾을 일이오. 나중에 의로운 일이라면 나서리다.”
이번 일은 의롭지 않다는 뜻이었다.
당세천은 의(義)를 따지는 제갈진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다른 이들을 돌아봤다.
“그럼 우리끼리 진행합시다. 진 가주도 함께하시겠지요?”
진호현은 당연히 빠질 수 없었다. 문파의 비급들 외에도 다른 상승 무공이 있다고 하질 않았는가.
“···무림에 의를 세우는 일에 어찌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하오문을 치는 것이 의라고 주장하는 호현이었다.
“좋습니다. 무림맹이 정식으로 발족하기 전에 미리 손을 맞춰볼 기회가 되겠습니다. 이번 일의 장은 진 가주께 양보하지요.”
“!”
“서문 세가는 가문의 무사들을 차출하지요.”
“소림의 무승들이 나설 것이오.”
이후 각 문파와 세가에서 저마다 고수를 보내겠다고 소리 높였다.
“당문은 가문과 문파의 뒤에서 모든 것을 지원하겠소. 당문의 독인들이 나섰다가는 소중한 무림맹의 무인들이 상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게 좋겠소. 당가의 독은 우리에게도 위험하니까···.”
“다만 하나만 확실히 하지요. 당문은 뇌룡심법만 얻으면 그만이오. 나머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소.”
당문은 뇌룡심법 하나만 얻을 수 있으면 만족이었다. 다른 상승 무공은 필요하지 않았다. 당문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다른 무림 방파와 달리 독공은 상승 무공으로 분류하기 어려웠기에 황궁에 빼앗긴 무공이 거의 없었다. 다른 무림 세력과 달리 기존의 힘을 그대로 유지해온 것이다.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심법이었는데, 뇌룡심법만 있으면 만천화우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만천화우는 뇌룡심법으로 다시 살려낼 수 있으니까···.’
만천화우는 암기를 무수히 많이 날리는 암기 발출 무공의 하나일 뿐이었다. 웅혼한 내력으로 무수히 많은 암기를 일시에 적에게 도달하도록 만드는 이 무공의 기반이 바로 뇌룡심법에 있었다. 뇌룡심법을 극성으로 익히면 만천화우를 되살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무공은 우리가 알아서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특히 진가장에 필요한 듯하니···.”
알아서 진가주에게 양보하라는 뜻이었고, 무림의 인사들은 저마다 눈을 빛냈다. 자신들의 비급이 아닌 다른 무공을 진가주에게 건네고 생색을 낼 기회라 여긴 것이다.
“오늘 밤 비급을 회수하자면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할 것이오.”
“그럼 일어납시다.”
“곧 이곳으로 가문의 무사들을 집결 시키겠소.”
“이따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전격적으로 하오문 비급 탈취 작전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오직 호중만이 당당한 하오문주의 태도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번 일엔 빠져야겠다. 어차피 공이 있어도 첫째 호현이 챙길 것이니 나는 빠져도 상관없겠지.’
***
왕호는 뒤에 꼬리를 달고 객잔까지 돌아온 문주의 속내를 알지 못해 무척 답답했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호충은 객잔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듣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왕 방주.”
“예. 문주님.”
호충은 왕호에게 하오문의 여러 무력단을 맡긴 상태였다. 각 지역의 패주들을 관리하는 패방에서 분리되어 오직 하오문에 소속된 무력단은 하오문의 중추라고 할 수 있었다.
“무림이라고 흑패와 다르지 않다. 오직 나와 조직을 위해 칼을 들어 남의 생을 빼앗는다. 정파 무림을 표방하는 저들은 의(義)라는 명분을 취하며 성장했을 뿐, 흑패와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지.”
“저희가 무림의 일원이 될 것이니, 이젠 무림(武林)이 아니라 흑림(黑林)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호충은 왕호의 입에서 나온 흑림이라는 단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림(武林)이 아닌 흑림(黑林)이라. 하오문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단어야.’
“그거 좋군. 무림이 아니라 흑림! 흑패와 무림의 절묘한 조합이로구나.”
“문주님은 그런 흑림의 지존이 되실 것입니다.”
둘은 큰 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객잔의 누구도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 소채는 언제 나오나?”
“술 한 병 추가!”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점소이가 분주하게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예이! 갑니다요~.”
***